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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현실 안에 신화가 있다

두 영웅의 대립으로 본 <손님>

<손님>

현대의 수사극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은 전문가 집단이다. 형사 외에도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인물들이 사건에 뛰어들어 범인을 밝혀낸다. 그런 점에서 <극비수사>는 유별난 영화다. <극비수사>(2015)의 이야기(혹은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실화) 중 흥미로운 부분은 점쟁이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 김중산이 유괴 사건의 해결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점쟁이는 분명 프로페셔널한 직업이다. 하지만 그가 범죄 및 수사의 영역 안으로 뛰어들다 보니 내 몸속 수용세포들이 난감함을 표하기 마련이다. <극비수사>보다 1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나, 사건이 벌어진 시점으로 치면 10년 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살인의 추억>(2003)에서도 비슷한 장면 하나를 찾을 수 있다. 형사 박두만의 연인 설영(전미선)은 “정 답답하면 무당집 같은 데라도 가봐”라고 말한다. 다음날 두만은 진짜로 무당을 찾아가고, 무당은 이런저런 말을 내뱉던 끝에 묘책 하나를 제시한다. 부적 따위는 팔지 말라고 대꾸하면서도 두만은 무당이 내놓는 종이를 들고 현장에 간다. <극비수사>의 점쟁이가 밤마다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대상과 <살인의 추억>의 형사가 내심 못 미더워하면서도 매달리는 대상은 종교적인 의미의 신이나 현실 바깥에서 운신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민간신앙에서 모시는 신은 기본적으로 현실 위를 디디고 선 존재다. 다르게 말해 김중산이나 박두만은 신화적인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 것인데, ‘신화는 후에 발생한 종교와 거리가 멀다. 아무리 환상적인 상황을 상상하고 있을 때라 할지라도 현실 세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현실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상실한 적이 없다. 현실 세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관념이나 환상의 세계에 몰두하거나 비현실성에 빠지는 경우가 신화에는 절대로 없다¹’. 신화가 뛰어놀아야 할 공간은 바로 땅 위다.

초월적 인물의 부재 이유

한국 사회가 근대로 이동하면서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신화적 세계다. 다수의 사람들이 운명을 읽고 복을 찾기 위해 점쟁이 집을 찾아가는 게 현실이지만, 점쟁이나 무당이 기거하는 곳은 비합리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런 까닭에 적어도 표면 위에서는 순기능을 인정받지 못한다. 현실 사회의 편견 섞인 선입관은 영화 같은 문화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몇편의 영화를 제외하면 극중 인물이 현실에 뿌리를 둔 신화나 전설의 존재를 찾거나 의지하는 예는 드물다(정확하게 말해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우스운 꼴을 당한다). 한국영화에서 불가능한 일에 면한 인물이 찾아가는 대상은 종교다. 인물은 신 앞에 나가 기도를 올리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신의 무응답에 고통은 배가된다. 지상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 신에게서 공공연한 연결점을 찾으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과 신화를 허황하거나 유치하다고 취급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또한 할리우드영화의 슈퍼히어로, 즉 신화적인 인물에 열광하는 상황과 비교해, 한국영화에서 초인적 영웅은 어색하고 낯설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SF영화의 토양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문제에 대립하는 신화적 영웅을 일찌감치 포기한 결과에 가까워 보인다. 현실을 뒤집어엎을 신화적인 존재를 은연중에 지우고 사는 건 아닐까.

내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 <초능력자>(2010), <늑대소년>(20 12),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을 각별히 평가했던 건 아무래도 초인적 영웅의 반역을 갈망하는 마음과 관계가 있지 싶다. 리얼리즘을 선호하는 한국영화의 경향을 감안하면 이런 영화가 뜨문뜨문 등장하는 것에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물론 장르의 측면에서 한계도 발견된다. <돌아이>(1985), <바이오맨>(1988)의 정신 나간 인물, 황당한 설정을 극복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자신을 슈퍼맨이라 주장하는 현석(황정민)은 과거의 상처를 지닌 남자인데, 그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슈퍼맨조차 숨 쉴 수 없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초능력자>에서 초능력을 지닌 규남(고수)은 자신과 똑같이 하층민 출신인 초능력자(강동원)와 대결한다. 그들 각자는 정말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모른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와 <초능력자>의 인물은 공히 소시민의 곁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늑대소년>에서 비밀스럽게 탄생한 소년(송중기)은 역사적 의미 아래 파악되어야 한다. 위의 두 사람에 비해 남다른 특성을 품고 있음에도 문제는, 이야기의 낭만성이 소년의 가치를 덮어버린다는 데 있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서는 초인에 대한 불편한 의식이 드러난다. 어차피 가공의 이야기라면 초인적인 인물이 일제에 저항하도록 그렸음직한데, 초능력이 배양된 아이들은 일제가 기도한 괴물로 묘사된다. 꿈쩍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네 영화의 영웅들은 슬프다.

<손님>

가짜 영웅을 의심하는 존재

뛰어난 만듦새의 영화가 아님에도 <손님>(2015)을 지지한다. 이유는 한국영화에서 지워질 신세인 신화적 인물을 근사하게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흥미롭게도, 그 인물 우룡(류승룡)은 극중 또 한명의 신화적 존재(로 추대되는 인물)인 촌장(이성민)의 맞은편에 선다. 신화의 상징성을 띤 우룡과 달리 촌장은 한국 사회와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신화적 인물로 숭배되는 박정희라는 인간을 모방한다. 경상도 말투의 촌장은 (한반도를 닮아) 세로로 길쭉하고 좁은 마을을 지배하는데, 각양각색의 사투리를 쓰는 마을 사람들은 그의 손아귀에 잡혀 숨통을 트지 못한다. 전쟁이 여전히 벌어지는 중이라고 사람들을 세뇌해 지속적인 불안감을 조성하고, 자기편이 아닌 사람은 북의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꾸며 공포심을 심으며, 외부와의 소통을 통해 자각하지 못하게끔 막는다. 측근인 미숙(천우희)에게 아무 능력이 없음에도 만신이 될 인재라 치켜세워 종교적인 지배마저 꿈꾸고, 천하의 말썽꾼인 인간에게 아들의 지위를 부여해 공포 정치를 일삼는 데 이용한다. 게다가 마을을 지켜온 병든 자, 소외된 자, 힘없는 자들에게 허물을 뒤집어씌워 죽음으로 내몬다. 무엇보다 ‘먹고살기 위해 지은 죄는 죄가 아니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온갖 죄를 가리던 그는 최후의 순간에 일본군 장교의 이력을 드러낸다. 촌장은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다시 도착한 박정희다.

박정희는 어떤 지역, 어떤 세대에 ‘근대화의 신화’를 일군 인물로 치부되어왔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현대화된 시간과 공간을 산다고 착각하는 작금의 한국인들이 우선 답해야 하는 질문은 ‘한국이 과연 근대화된 공간이냐?’라는 것이며, 그 질문의 시작점 중 하나는 박정희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근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어온 까닭이다. 박정희란 인간이 애쓴 근대의 개념이 산업화와 관련되어 있다면, <손님>은 산업화 바깥의 풍경에서 과연 근대가 일어났는지 질문하는 쪽이다. 근대가 ‘의심과 비판’에서 시작되는 개념임에 반해 한국 근대사에서 의심과 비판을 가장 억누른 독재의 시간이 박정희의 통치 시기라는 것, 그것을 인정해야만 한국은 진정한 근대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때 그사람들>(2004)이 조롱과 비판의 자세로 신화적 인물에 의문을 표했던 것처럼, <손님> 또한 촌장이란 이름의 박정희를 의심하는 태도로 가득한 작품이다. 단, 판타지로서 <손님>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그때 그사람들>에서 더 나아가는 게 가능하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다. <손님>은 또 한명의 신화적 인물을 빚어 의심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다. <손님>의 태도는 그것이다. 실제 역사에 엄연한 신화적 인물은 기실 가짜 영웅이기에, 비록 허구일지라도 신화적 영웅으로 하여금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기게 한다는 것.

우룡은 신화적 인물일까

우룡은 아들과 함께 떠도는 남자다. 그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길에 낯선 마을에 도착한다. 그는 피리를 부는 재주로 약장수들과 어울렸던 절름발이 떠돌이지만, 영화는 섬세한 터치로 그에게 신화적 특성들을 입힌다. 그는 인간의 언어보다 감각의 언어, 논리에 더 능한 사람이다. 바람의 속도와 방향과 세기를 읽고, 해와 달이 뜨고 기우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대화보다 표정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접촉하는 사람이다. 그중 으뜸은 그가 짐승이라 불리는 것들과 통한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사라진 세계인데, 우룡이 스스로 말하기를 “귀때기가 달린 것들은 내 피리 소리에 움직인다”고 했다. 그런 그가 산골 마을의 허물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다. 억눌린 마을 사람들이 입과 정신을 막고 사는 것과 반대로, 자유롭고 깨어 있는 우룡은 내면에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애초 바람대로 하루이틀 묵고 떠났다면 그는 촌장과 충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픈 아들을 쉬게 해줘 고마운 마음에 그는 마을의 골칫거리인 쥐를 쫓아내주겠다고 말했고, 촌장은 쥐가 퇴치된다면 우룡 아들의 치료비 명목으로 소 한 마리 살 값을 내놓겠다고 약속한다.

우룡은 말을 지켰으나 촌장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촌장은 우룡 부자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우룡의 분노와 복수는 거기에서 기인한다. 이제껏 이성의 끈을 유지해오던 그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야생의 존재로 폭발한다. 그의 손이 승천하는 아들의 발을 놓치자마자 그 일이 벌어진다. 비밀스럽고 신비한 신화의 성격상 영화가 호러 장르를 취한 건 자연스러우나 이야기가 뜨내기의 복수극이라는 외피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 마을 사람들을 돕기 원했고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몸짓을 숨기지 않았던 우룡은 분노에 휩싸이면서 끝내 타자에 머물고 만다. 그가 돈을 구걸하는 장면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미숙이나 철수 아버지도 등을 돌린다. 머물렀다 떠나는 손님 이상의 태도를 취했음에도 그는 마을의 민중으로 화하지 못했고, 눈먼 마을 사람들이 자각하도록 이끄는 데도 실패한다. 어쩌면 애초부터 우룡은 재난을 내리는 귀신이나 손이 아니었을까. 지도상에 없는 산골 마을은 문자 그대로 사라진다. 마지막 남은 아이 하나까지 암흑 속에서 먹고 먹히는 상황이 벌어지는 터이니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손님>은 혁명이 부재하는 땅에 내린 저주의 시다. 나는 그 이상의 작품이었기를 꿈꾼다.

오늘 오멸의 신작 <눈꺼풀>의 최신 버전을 보았다. 파이널 컷이 나오지 않았기에 작품의 평가는 유보하겠으나, 쥐가 중요한 메타포로 기능한다는 점과 신화적인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손님>과 연결해 읽을 만하다. 신화적 존재가 나오는 두편의 영화가 같은 해에 나란히 만들어진 건 우연이 아니다. 모든 신화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¹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동아시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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