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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영화비평] 시대극으로서는 아쉬운

최동훈 감독의 야심과 망설임에 대하여

<암살>

<범죄의 재구성>(2004)과 <타짜>(2006), <도둑들>(2012)은 프로페셔널 범죄자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목표를 탈취하는 강탈영화(Caper Film)의 틀 안에서 인물간의 치정과 배신을 펼쳐놓은 작품들이다. 돌이켜보면 이점은 사뭇 의아함을 자아낸다. 능숙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기를 인정받아왔지만 정작 최동훈의 필모그래피 면면을 들여다보면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는 고전적인 필름누아르, 하드보일드 문학의 자장을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 자체를 독창적으로 만들어내는 작가라기보다는 전통적인 틀 안에 머물면서 그 안의 인간 군상으로부터 재미를 이끌어내는 연출가에 가깝다.

관계-사이(間)의 영화 - 최동훈, 혹은 하워드 혹스

독립군 요원의 암약을 그린 <암살>(2015)에서도 이러한 최동훈 영화의 특징은 반복된다. 소집된 독립군 일원은 친일파 사업가 강인국(이경영)을 표적으로 삼아 연대하나, 내부 배신자에 의해 위기에 처한 그들의 계획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표류한다. <암살>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 시대극이지만 그 안에서 최동훈식 강탈영화의 요소들을 반복 재생산한다. 각기 다른 개성과 내막을 지닌 인물 다중을 엮어내며 정해진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내는 것. 이 점에서 최동훈 영화는 체스게임을 닮아 있다. 규칙과 장기 말의 특징을 미리 설명하지만 정작 게임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한치 앞을 살필 수 없는 한판의 정교한 영화적 체스. 그리고 여기에 신파적 멜로드라마의 감성이 가해지면 최동훈 영화의 세팅은 완성되는 것이다.

줄스 다신의 <리피피>(1955)나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1956), 더 나아가 마이클 만의 <비정의 거리>(1981)에 이르기까지 여타의 강탈영화들은 범죄 계획 착수에서 실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차분하고 무미건조한 톤으로 조명해왔다. 그러나 최동훈은 범죄 행위 자체의 스릴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간의 관계에서 발화하는 대화와 드라마적 양상에 주목한다. 각자의 사연과 욕망을 품은 이들의 만남과 엇갈림. 범죄 계획은 일종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으며 스토리에 대한 인상은 엷어지지만 캐릭터마다 인간성은 관객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된다. 그의 영화는 엄격한 장르적 정의에서의 강탈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표면을 뒤집어쓴 범장르적 멜로드라마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는 최동훈 감독 자신이 종종 언급하는 하워드 혹스의 영화세계와도 만나는 지점이다.

갱스터 필름의 시효 격인 <스카페이스>(1932), 서부영화의 걸작인 <붉은 강>(1948)과 <리오 브라보>(1959) 등 하워드 혹스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오간 장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이 양육>(1938)이나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1940)와 같은 스크루볼 코미디의 바탕을 떠나지 않았다. 다수의 액션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정작 혹스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들은 시각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자기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의 만남과 충돌, 그 사이에서 오가는 우정과 연애 관계의 형성 과정이었다. 그는 영화의 장면들 대부분을 극히 평이한 앵글의 투숏이나 풀숏으로 잡는데, 이는 캐릭터들의 관계-사이(間)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으로부터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가는 혹스의 작업 스타일과 연관이 깊다. 관계-사이의 미학. 하워드 혹스의 영화세계를 이루는 이런 특징은 <암살>에서도 공통되게 드러난다.

<암살>에 이르는 최동훈 필모그래피의 발전선상에서 흥미로운 건 제작예산과 동시에 극에서 액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구경거리로서의 시각적 스펙터클에 대한 요청. 판타지 영웅 활극 <전우치>(2009)는 익숙해진 장르의 영토를 떠나 액션의 가능성을 실험한 일대 도전이었으며(<암살>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전우치>를 준비할 당시 이미 있었다), <도둑들>은 강탈영화의 이야기와 인물의 심도를 유지하면서 액션 스릴러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겸할 수 있는가를 타진한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 그런 의미에서 <암살>은 시대극으로 변주된 <도둑들>의 확장된 버전이며, 본격적인 액션 블록버스터 감독으로서의 최동훈의 야심이 십분 투여된 필모그래피의 한 분기점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르의 결합과 이행은 아직까진 원활해 보이진 않는다. <암살>의 액션 시퀀스에는 동선을 명료히 표현하고 인물의 배치를 체크해 액션의 흐름을 짜맞추는 세공력이 부족하다.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숏을 차곡차곡 쌓으며 서스펜스를 축적하는 밀도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로케이션-세트 공간의 규모감을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미진한 감을 지울 수 없다. <암살>의 카메라는 관객으로 하여금 상황 속에 뛰어든 인물의 시점으로 몰입하게 하는 게 아니라 관조자의 위치에 머물게 만든다. (하워드 혹스와 마찬가지로) 최동훈 연출의 장기는 배우의 연기와 재치 있는 대사의 합에서 캐릭터를 끌어내는 멜로드라마에는 능수능란히 발휘되지만, 촬영과 편집의 기교를 통해 스케일과 감정을 만들어가야 하는 액션의 시각적 연출에서는 빛이 바래고 만다.

시대극으로서의 <암살>

<암살>의 악역으로 제시되는 인물은 친일파 강인국과 이중간첩 염석진(이정재)이다. 이상한 점은 안옥윤(전지현)을 비롯한 독립군의 인물들이 강인국을 처단한다는 목적하에 모이지만, 정작 악역으로서의 주된 비중은 염석진에게 집중된다는 점이다. 극중 염석진의 행보는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친일 군경들이 건국 당시 군과 경찰의 토대가 된 한국 근현대사의 불우함을 상기시키는 데는 주효했다. 그러나 정작 독립군의 타깃이 되는 강인국의 악행, 그로써 대변되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부각하는 대목이 거의 없다는 점이 영화의 카타르시스를 상당히 깎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이런 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이 도입부에서부터 나치의 악마성을 부각하고 들어간 건 영리한 전략이었다).

<암살>의 시대상에 대한 묘사는 대구의 미나카이 백화점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던 소설 <북성로의 밤>을 연상케 한다. 미쓰코시 백화점을 중심축으로 한 경성의 풍경들에선 모더니즘의 화려함은 포착되지만, 여학생을 즉각 총살하는 장교 외에는 식민지 시대상의 실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만주에서는 일제의 학살, 상하이에선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조선 안은 근대화의 축복과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식의 공간 대비. <청연>(2005)이나 <모던보이>(2008)가 그러했듯 일제강점기의 조선 사회상을 다루는 순간, 한국영화는 역사에 대한 사실주의적 접근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장르와 개인의 이야기로 도망한다. 역사의 화농을 건드리지 못하고 활극의 배경으로 소모하려는, 친일파를 처단하려 하지만 정작 친일파의 구체적인 반민족 행위에 대해선 피상적으로 그리는 이런 망설임은 일종의 시대적 징후로 보아야 할 것인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이 실내극 호러의 자장 안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상을 갈파했던 바를 상기하자면, 시대극으로서의 <암살>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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