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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영화비평] 2인자의 위대한 비극
강헌(음악평론가) 2015-08-20

음악 청년의 예술가적 자의식이 빚어내는 인생의 고단한 행로

<러브 앤 머시>

화요일 자정을 넘긴 시간, 변두리 멀티플렉스의 아주 작은 관에서 <러브 앤 머시>를 보았다. 두 시간 동안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하지만 나의 망각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한명의 뮤지션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잔잔한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가졌다.

대서양을 처음 비행한 사람이 린드버그인 것은 초등학생도 알지만 두 번째로 비행한 사람에 대해선 인간의 역사는 냉담하다. 시장과 역사는 언제나 첫 번째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권력을 부과한다. 우리 모두가 아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에게 희롱당하고 분을 못 이겨 죽는 오나라의 영웅 주유의 탄식이 아니더라도(물론 2인자도 못되는 거개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불평도 사치스러운 것이겠지만) 2인자의 지위만큼 안타까운 경우도 없을 것이다. 비치 보이스는, 아무리 이 밴드의 광팬이라고 하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대중음악사상 가장 많은 군웅들이 할거한 1960년대 서구 록음악계의 어쩔 수 없는 2인자다. 바로 비틀스가 있기 때문이다(그럼 2인자는 롤링 스톤스가 아닌가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는데 그건 아마도 나를 비롯한 스톤스 팬들은 영원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60년대를 넘어 결국은 스톤스가 비틀스를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톤스 자신들이 비틀스에 대한 열등감이 전혀 없었다. 이들에게 비틀스는 픽 하고 웃어넘기는 대상에 불과했다).

1인자를 넘어서기 위한 불면의 밤

자신이 2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고뇌 어린 2인자의 운명이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그대로 나온다. 1965년 비틀스 회심의 역작 《Rubber Soul》이 나왔을 때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비치 보이스 사운드의 함장인 브라이언 윌슨(폴 다노가 훌륭하게 연기했다)의 감탄과 절망감이 그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마도 이런 당혹감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앨범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역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비치 보이스에게 비틀스는 그저 십대 여자애들을 홀리는 아이돌 그룹, 다만 우리보다 쪼금 인기가 더 많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라도 운때만 맞으면 따라잡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라이벌 밴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I Want to Hold Your Hand> 같은 ‘달콤한’ 로큰롤 넘버들 때문에 비틀스는 미국의 일부 비판적인 비평가들에게 ‘십대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오예(O-Ye) 밴드’라는 혹평을 듣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안렌즈로 비스듬하게 잡힌 무표정한 밴드 멤버들의 초상이 사이키델릭하게 펼쳐진 이 ‘고무로 된 영혼’의 소리는 믿을 수 없는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을 일거에 보여주었고, 이미 비등점에 도달했다고 여겨졌던 비틀스의 팬층은 거기서 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Rubber Soul》에서 각각의 트랙은 개성으로 충만하면서도 앨범 전체는 철학적으로 원대한 울림을 분만하고 있었다. 이 앨범의 재킷엔 앨범의 타이틀만 있을 뿐 밴드의 이름이 아예 없다. 이 방약무인의 자신감이라니!

2인자의 비극은 1인자의 위대함을 관통할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데서 시작된다. 브라이언 윌슨이 다른 멤버들처럼(그중 2명은 친동생들이고 한명은 사촌, 나머지 한명은 그의 친구이다) ‘걔들은 걔들이고 우린 우리다’ 정도의 낙천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면 그의 삶은 중년이 된 이후의 브라이언 윌슨을 연기하는 존 쿠색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린 것처럼, 그렇게 슬프도록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틀스의 사운드는 이 불운한 또 하나의 천재의 귓가를 내내 맴돌았다. 브라이언 윌슨은 당시 록밴드의 가장 중요한 활동인 투어를 포기하면서까지 홀로 스튜디오에 칩거하며 그들을(여기엔 비틀스와 당시의 톱 프로듀서 필 스펙터까지 포괄한다) 넘어서기 위해 고독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스런 불면의 밤을 계속한다.

그 고통은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명앨범 500에서 당당히 2위에 오른 《Pet Sounds》라는 위대한 걸작 앨범으로 보상받았지만, 이 보상은 대중의 외면과 흥행의 실패라는 상처뿐인 영광으로 끝났다. 다시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인 서프 사운드로 돌아가자는 친구의 불만과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1인자의 벽 앞에서 브라이언 윌슨의 멘털은 결국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1966년의 《Pet Sounds》는 경쟁 뮤지션들과 비평가 및 마니아들에게는 앞의 그 모든 것보다 충격적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폴 매카트니는 이 앨범 속의 <God Only Knows>를 듣고 자신 인생 최고의 노래라는 립서비스를 남겼지만, 비틀스는 이듬해 런던에서 녹음한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앨범을 통해 평단의 찬사와 시장의 대성공을 동시에 이끌어냄으로써 2인자의 안간힘을 간단하게 묵살해버린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브라이언은 ‘망상적 정신분열’에 구금당한 한정치산자가 되었고 나머지 멤버들은 여전히 어제의 영광을 팔며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았다. 나머지 멤버들의 활동은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머지 멤버들이 영화 <칵테일>의 삽입곡 <Kokomo>로 1988년 빌보드 1위로 복귀하는 노익장을 발휘하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는 실로 22년 만의 차트 1위 복귀로 셰어에 의해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최장기 복귀 기록이었다.

예술가의 운명

영화는 2인자의 약한 내면에 서서히 초점을 맞춘다. 무기력한 중년이 된 그의 귓속엔 계속 소음이 울린다. 악랄한 정신과 주치의의 약물에만 의존하며 자식들도 만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그를 구원한 것은 결국 한 여인의 사랑이었다. 어쩌면 너무나 통속적인 드라마투르기로 영화는 느리게 진행되지만 귓속을 울리는 소음에서 그가 해방되어 다시 뮤지션으로 복귀하는 감동적인 엔딩 신은(그것은 실제 브라이언 윌슨의 공연 실황이다) 우리에게 잔잔하지만 사무치는 삶의 환희를 다시 깨우쳐준다.

거의 모든 음악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는 비치 보이스의 지나간 음악 속에 숨은 명석한 가치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이들을, 여름 시즌에 FM 라디오를 울리는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의 미국 버전인 <Surfin’ USA>의 흥겨운 젊음의 추억 정도로만 인식한다. 우리가 이 영화를 통해 발견하는 새로운 즐거움은 ‘사랑이 모두를 구원하리라’ 식의 뻔한 플롯이 아니라, 그저 소녀들의 열광에 취하는 것으로 끝나고 싶지 않은 한 진지한 음악 청년의 예술가적 자의식이 빚어내는 인생의 고단한 행로다.

브라이언 윌슨의 욕망이 그저 인기와 부를 얻는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모든 영광을 약속할 것 같은 스타덤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질주 속에서 스타가 아니라 아티스트로서의 자존심에 포획되는 순간, 이 저주받은 욕망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기록한 섬세한 비망록이며, 동시에 2인자의 숙명을 그린 매우 친절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운명이란 이렇게 달콤하고 씁쓰레한 유혹의 여운을 남기는 한잔의 와인 같은 것인지!

60년대에 미완성으로 남았던 그의 과제를 2004년에 이르러서 결국 완성한 브라이언 윌슨의 《Smile》 앨범을 오랜만에 다시 듣는다.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은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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