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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영화비평]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

<협녀, 칼의 기억> 속 사극 우주와 무협 우주의 불완전한 결합

<협녀, 칼의 기억>

우리가 1세기 넘게 서부극에서 보아왔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고 해도 아주 잠시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이런 장르를 통해 접했던 전설적인 인물들, 그러니까 와이어트 어프, 애니 오클리, 버펄로 빌, 빌리 더 키드와 같은 인물들 역시 서부극 팬들의 상상 속에 거주하는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서부극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려는 시도는 허망하다. 그 순간부터 장르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존 포드의 영화들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안전하겠지만 심지어 그의 영화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수정주의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 그리고 그 밖의 온갖 변종들은 오래전에 장르가 먹어버렸다. <백 투 더 퓨처3>의 마티 맥플라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때 그가 모델로 삼았던 것이 존 웨인이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차피 다 거짓말인데 더 오래된 거짓말이라고 나을 게 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점은 존재한다. 역사와 경험과 전통이 어우러져 완벽하게 진짜 같은 가짜 역사. 이런 장르화된 허구 역사의 세계가 서부극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중세 기사 이야기가 그렇고 무협지의 세계가 그렇다. 은근슬쩍 제2차 세계대전도 여기에 편입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들 세계는 그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을 갖고 있다. 존 포드의 전성기 서부극이나 김용의 무협지가 갖고 있는 언어와 행동의 자연스러움을 떠올려보라. 그들의 세계는 실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만의 깊이와 무게를 갖고 있는 평행우주이다. 이런 종류의 장르물을 만들려면 당연히 실제 역사뿐만 아니라 그 평행우주의 역사에도 익숙해야 한다. 장르 독자들이나 관객이 국외자의 장르 참여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작가는 후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같은 세계

<협녀, 칼의 기억>(2014)은 두 종류의 평행우주를 하나로 합치려 한다. 하나는 한국 사극이고 다른 하나는 무협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그리려 하는 세계는 무협세계의 생물학과 물리학이 작동하는 고려 배경의 한국 사극 우주이다.

여기서 내가 늘 재미있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한국 사극 우주가 고증을 떠나(그러니까 사극 캐릭터에게 굳이 감자를 먹이려는 집요한 집착 같은 것을 말한다) 이상하게 불완전한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어로 쓰여진 시대물의 전통이 70, 80년을 넘어 가는데도 사극 캐릭터의 행동과 언어에서는 자연스러운 수렴점을 찾기 힘들다. 이들의 행동은 전통에서 일탈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부재 속에서 부유하는 것이다. 이건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자칭 전통사극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쓰는 고풍스러운 대사의 상당수는 뿌리가 없고(“경들은 들으세요!”), 일부는 노골적인 번역체이다. 물론 존칭이나 존대어의 상당수도 그냥 틀린다.

<협녀, 칼의 기억>의 캐릭터들도 이런 파편화된 행동과 말 속에서 존재한다. “…는 …을 만든다”와 같은 영어 번역체, 현대 청소년의 일상어, 고풍스럽고 사극적으로 들리지만 사극보다는 무협지 번역물에서 따온 것 같은(두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사들이 공존한다.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이게 나쁜가? 그렇지는 않다. 여러분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싫어하나? 싫어한다면 도대체 왜? 괴물은 재미있고 멋지다. 단지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려면 그 괴물을 살아 숨쉬게 하는 일관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사극영화의 경우 그 무언가는 세계에 대한 자기확신이다. 적어도 자신이 어떤 전통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이런 파편화는 이 사극 우주가 무협 우주와 결합하면서 더 심각해진다. 무협물을 이루는 판타지는 한자문화권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고려 말기와 결합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무협소설이나 영화는 현대의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급속성장한 장르로, 그냥 생각 없이 고려 역사와 끼워맞추는 건 심장이식수술만큼 어렵다. 당연히 묻게 된다. 그런 이식이 필요했나? 주인공 홍이(김고은)의 사명은 무엇인가. 원수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임무를 수행할 때 과연 경공술이 필요한가?

실제로 반영된 결과물을 보면 더 어리둥절해진다. 시퀀스마다 레퍼런스로 삼은 전혀 다른 영화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나무 숲 장면은 <와호장룡>에서 따온 것 같다. 복수 장면에는 <킬 빌>도 보이고 <형사 Duelist>도 보인다. 몇몇 장면들은 로마 검투사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이들 일부는 잘 찍었지만 굳이 하나의 영화여야 할 이유는 없다. 심지어 동일한 캐릭터의 액션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레퍼런스가 있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장르란 것 자체가 누적된 레퍼런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다른 장르에서 레퍼런스를 따오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각각의 레퍼런스가 하나로 녹아들지 않고 따로 논다면 그건 만든 사람들이 장르에 대한 확신이나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냥 장면마다 죽어라 열심히만 한 것이다.

괴물을 구성하는 조각난 몸의 일부는 살아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것은 <협녀, 칼의 기억>이라는 영화의 매력이 장르의 본류에서 살짝 벗어난 비전형성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서부극 비유로 돌아가는데, 60, 7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수정주의 서부극이 유행이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의의 긴 의자에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은’ 카우보이 주인공들에 대해 불평했다. 하긴 그들은 과도하게 예민해서 그들이 속해 있는 단순명쾌한 장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장르 세계란 의도적으로 실제 세계의 복잡함을 떨어뜨린 곳이고 실제 세계에서는, 아니 장르 세계에도 카우보이들이 얼마든지 신경쇠약에 걸릴 수 있다. 카우보이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 빼버리면 어떻게 <브로크백 마운틴>이 나오겠는가.

<협녀, 칼의 기억>은 장르 틀 안에 바로 그런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이 장르에서 금지된 인물형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장르는 자체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금지할 능력이 없고 굳이 그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대나무 숲보다 정신분석의의 긴 의자에 더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는 건 도저히 감출 수가 없다. 특히 월소(전도연)의 경우는 욕망과 동기가 극단적으로 뒤틀려 있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행동 역시 복수와 정의실현, 협, 의와 같은 한 글자 한자로 정의되는 장르 공식 안에서 움직이지만, 이들은 사실 사극 복장을 한 현대인에 더 가깝고 막판엔 심지어 그도 넘어선다. 특히 이 영화 결말에서 벌어지는 일은 장르 내에서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심지어 현대 한국 관객 상당수가 “아무리 그래도”라고 멈추는 부분에서 더 나아간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구성하는 조각난 몸의 일부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부만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기왕 장르를 택했다면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도 역시 장르에서 찾아야 한다.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이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난 경우는 오히려 더 치밀한 장르 지식과 테크닉이 요구된다. 배경을 이루는 세계가 완성되지 않는다면 영화는 가장무도회에서 멈추고 만다. 캐릭터가 반항하고 맞서고 배반해야 할 상대로서 세계가 불완전하다면 영화가 어떻게 온전히 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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