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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영화비평] 의협(義俠)의 정신이 없다

한국형 무협을 꿈꾼 <협녀, 칼의 기억>이 놓친 지점

<협녀, 칼의 기억>

<협녀, 칼의 기억>은 서로 다른 운명을 향해가는 세 검객의 칼처럼 각기 다른 플롯이 얽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사명으로 품고 세상에 뛰어든 홍이(김고은)의 성장담, 검 한 자루를 쥐고 천출에서 무인정권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 덕기/유백(이병헌)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암투, 대의와 연정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두고 흔들리는 설랑/월소(전도연)와 덕기/유백간의 멜로드라마가 고려 말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타고서 흘러간다. 보다 다층적이고 현대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한 각본상에서의 야심은 엿보이지만 일일이 뜯어보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무협영화의 전형적인 서사와 장치를 여러 겹으로 포개놓고 있다. 풍천삼협의 과거사와 유백의 권력욕은 형제의 의를 맺은 협객들이 배신으로 인해 원수가 되는 장철의 <자마>(1973)를 연상케 하며, 설랑과 덕기 사이의 엇갈리는 애증 관계는 장이모의 <영웅: 천하의 시작>(2002)에서 비설(장만옥)과 파검(양조위)의 관계에 대한 변주처럼 보인다.

미장센과 장면 연출에서도 기존 무협영화 내지 대형 서사극과의 유사성이 여럿 발견된다. 홍이와 설랑의 의상은 각각 <연인>(2004)과 <>(1985)에서 선보였던 와다 에미의 디자인과 매우 흡사하며, 큰 스승(이경영)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홍이가 대나무 밭에서 수련하는 장면의 미장센은 <와호장룡>(2000)과 <킬빌 Vol.2>(2004), 그림자 속에 검광이 번뜩이는 홍이와 유백의 마지막 결투는 이명세의 <형사 Duelist>(2005)에 대한 명백한 인용이다. 이처럼 <협녀, 칼의 기억>의 근간에는 한국형 무협장르에서 무협의 구도를 재현하고자 하는 미메시스(Mimesis)의 욕망이 깔려 있다.

한국형 무협 만들기의 전략들

정창화의 <황혼의 검객>(1967)과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1968), 임권택의 <십오야>(1969) 이래 한국에서 만들어진 무협영화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해왔다. 한국의 지정학적-역사적 공간 안에서 홍콩 무협의 컨벤션(convention)을 펼칠 수 있는 무대와 알리바이를 찾아야 한다는 것. 중국이나 홍콩 같은 무협의 전통이 없는 밑바닥에서 그에 필적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고민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조선시대를 배경 삼아 갓을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는 검객을 등장시킨 한국형 검객영화의 맥은 단명하고 끊어졌지만, 무협의 외양을 갖추고자 하는 한국영화들은 이같은 발상에서 출발에 색다른 발전상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김성수의 <무사>(2001), 류승완의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이명세의 <형사 Duelist>는 각기 다른 발상으로 이전에는 없었던 한국형 무협의 스타일을 만들고자 한 일대 실험이었다. <무사>는 사막이라는 이국적인 공간으로 탈주해 무협에 필요한 신화적 공간을 얻은 동시에 리얼리즘에 입각한 연출로 홍콩 무협과는 차별화된 액션 설계를 보여주었다. ‘도시 무협’을 표방한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홍콩 특유의 와이어 테크닉과 무술 안무를 현대 한국의 도시 공간에 접목하면서 판타지와 리얼리즘의 기묘한 모순병치를 선보였고, <형사 Duelist>는 시대극에 따르는 고증을 완전히 벗어나,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모더니즘이 가미된 탈역사적 시공간으로 새롭게 디자인하면서 자유분방한 미술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비약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무협영화의 컨벤션을 한국이란 시공간 안에 녹여내려는 다양한 노력과 실험들이 있어왔고 <협녀, 칼의 기억> 또한 이 장르적 도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협녀, 칼의 기억>이 무협을 접목하는 전략은 <무사>와 <아라한 장풍대작전> <형사 Duelist>가 취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다. 이전의 영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시대적 배경과 의상, 세팅, 정치적 함의의 측면에서 한국적인 색채를 잃지 않고 장르의 변형과 절충을 도모했다면, <협녀, 칼의 기억>은 기존의 표현양식을 그대로 ‘이식’하는 편을 선택한다. 다양한 오마주의 목록들, 기시감 넘치는 시뮬라크르의 연속. <무사>와 같이 고려말기를 표방하지만 <협녀, 칼의 기억>의 공간 세팅과 의상, 소품 등의 미장센은 한국사의 시대 고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중화권 무협, 장이모의 <영웅: 천하의 시작>과 <연인>의 복제에 가깝다. 시대극과 무협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치열히 고민하지 않은 결과, <협녀, 칼의 기억>의 영화적 정체성은 결국 중화권 무협영화의 조악한 패스티시(pastiche: 모방 혹은 여러 스타일을 혼합한 작품) 내지 패치워크(patchwork: 이어 붙이기)에 그치고 만다.

무(武)와 협(俠)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무협영화가 중화권 영화의 주류라는 위상을 차지한 데에는 춘추전국시대에서부터 이어져온 문화적-역사적 맥락이 크게 작용했다. 몸뚱이 외엔 가진 것이 없는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무(武)에 호소하는 것이었고, 자유분방한 무인들로 하여금 사사로움을 떨치고 부당한 거대 권력에 맞서게 한 협(俠)의 윤리는 고통받는 백성들의 염원과 합쳐져 협객(俠客)이라는 영웅상과 강호(江湖)라는 상상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사기> 중 ‘자객열전’을 원전으로 한 장철의 <대자객>(1967)과 장이모의 <영웅: 천하의 시작>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의협(義俠)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일 것이다. 멀리는 ‘자객열전’ , 가깝게는 <수호전>과 <삼협오의>에서 발원하는 무협물의 문학적 원류와 역사, 경극으로 다져진 신체적 기예의 전통이 20세기 영화 기술과 만나면서 독자적인 장르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풍천삼협의 과거사와 무신정권에 맞선 백성들의 봉기를 다루면서 <협녀, 칼의 기억>은 무협영화에 따르는 의협의 정신에 호소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놓는다. 그러나 영화는 유백이 지닌 악역으로서의 면모나 홍이의 복수를 통한 의협의 실천을 부각시키지 않고 월소와 유백의 연정, 유백의 인간성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면서 사적 감정과 대의명분간의 딜레마라는 무협영화의 큰 주제의식을 놓치고 만다. 무신정권의 부패, 왕을 비롯한 위정자의 무능, 야심가의 등장이라는 소재를 깔아놓으면서도 정작 홍이와 월소가 보이는 행동의 동기에는 협객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구심점이 되지 못하는 악역과 시대상, 멜로드라마의 과도한 비중. 서투른 홍이의 검이나 눈이 먼 월소의 검처럼 무협영화으로서의 <협녀, 칼의 기억>이 겨냥하는 지점은 모호하기만 하다. 액션 시퀀스의 기술적 완성도를 떠나서 <협녀, 칼의 기억>이 가장 크게 실패하는 지점은 바로 무협의 정신적 근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서사에 있는 게 아닐까? <협녀, 칼의 기억>은 무협영화 본연의 모습을 살리는 데도, 한국형 무협의 한 전형을 만드는 데도 실패한 결과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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