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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영화비평] 실현되지 못한 시대정신

<차이나타운> <암살> <협녀, 칼의 기억>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총칼을 든 여주인공이 등장한 이유는

<암살>

<차이나타운> <암살>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최근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약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총칼을 든 여주인공의 등장이다.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간주됐던 누아르, 액션, 무협, 잔혹극 등에서 최근 여성주인공이 잇따라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동안 무장한 여성 전사의 등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쉬리>(1999)나 <고지전>(2011)에서도 여성 저격수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반동인물들이었다. <쉬리>의 그녀(김윤진)는 북한의 간첩이자 암살범으로, 남한의 국정원 요원과 연인이었다. 즉 ‘두 얼굴의 괴물’로, 우리가 북한에 대해 품는 이미지를 대변한다. 사랑하고 통일하고 싶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존재라는 뜻이다. <고지전>의 그녀(김옥빈)도 북한군 저격수로, 감정이 거의 없는 기계적인 존재다. 남한 병사인 주인공이 그녀에게 복잡한 감정을 품지만,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냉담하다. 그녀들은 ‘위험한 타자’들로, 감정이입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차이나타운> <암살> <협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여성 전사들은 주동인물이며, 감정이입이 일어난다.

심지어 <암살>과 <협녀>의 주인공들은 ‘여성 영웅’의 면모를 지닌다. 영웅은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다. 전통적인 영웅 서사에서 주인공들은 출생의 비밀이나 비극적인 가족사를 통해 공동체의 운명과 맞물린 개인의 운명을 지닌다. 영웅은 고뇌와 결단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는데, <암살>과 <협녀>의 여주인공들은 공적 대의를 위해 친아버지를 죽이는 결단을 내린다.

아버지를 죽이는 딸

‘아버지를 죽이는 딸’의 서사는 흔치 않다. 아버지를 죽이는 건 주로 아들이지 딸이 아니다. 그리스신화의 첫장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와 제우스로 이어지는 살부의 연쇄를 담는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도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의 이야기다. 반면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추방된 아버지를 보살피고, 국법을 어겨가며 오빠의 시신을 거두는 자이다. 일찍이 헤겔은 국가의 법이 아닌 혈연을 따르는 사적 존재인 안티고네의 여성성을 비판했다. 가령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자명고를 찢고 국가를 망하게 한 낙랑공주를 비난할 수 있듯이 안티고네를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의 젠더 이분법을 논박하며, 안티고네가 국법은 물론 친족법도 거부하는 존재임을 지적했다. 실제로 소포클레스의 희곡에는 권력을 사사화하여 차지하려는 아들보다 진실과 정의를 좇는 딸이 더 ‘남성적’이라고 칭찬하는 오이디푸스의 말이 나온다. 안티고네는 국법에 순종하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윤리적 주체성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해 딸은 아버지를 죽이는 존재가 아니다. 오랫동안 아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한다. 가령 19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1998)의 주인공처럼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아버지를 승계하는 딸이 되고자 한다. 흔히 ‘아버지의 딸’은 여성성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해 억압하고, 남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유사남성이 된다. 그녀들은 엄마를 부인하고 아버지를 닮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버지의 딸’은 아버지의 왕국이 붕괴됐을 때, 왕국을 재건하려는 ‘망국의 공주’와 같은 이미지로 변주된다. 정리하자면 딸은 오이디푸스적인 살부의 욕망과도 거리가 멀고, 오히려 ‘아버지의 딸’이 되어 아버지를 승계하려는 욕망을 지닌다.

‘아버지를 죽이는 딸’의 서사는 극히 예외적으로 존재해왔다. 가령 <원초적 본능>(1992)에서 악녀의 첫 살인은 부모를 죽인 거였다. 또는 <귀향>(2006)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던 딸이 아버지를 죽인다. 한국영화에서도 양상은 비슷하다. <텔미썸딩>(1999)이나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부모를 죽이는데, 이후 그녀는 반복살인범이 된다. <예의없는 것들>(2006), <용의자 X>(2012), <검은 땅의 소녀와>(2007)에서 딸은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죽였다. 요컨대 딸이 부모를 죽이는 서사는 주로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거나, 악녀 탄생의 신호탄으로 묘사된다.

<차이나타운> <암살> <협녀>에서 나타나는 부모살해의 모티브는 위의 사례들과 전혀 다르다. 이들의 부모살해는 사적 복수나 탈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권력을 얻거나 대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오이디푸스의 여성판본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김혜수)는 범죄조직의 보스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조직원으로 키운다. 일영(김고은)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녀를 ‘엄마’로 부르지만, 모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쓸모가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냉혹한 원칙하에 밥상과 노동의 공동체인 유사가족을 꾸린다. 일영은 해맑은 남자로 인해 다른 세계를 접하고 흔들린다. 일영이 남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어기자, ‘엄마’는 일영을 죽이지 않고 빼돌린다. 하지만 일영은 돌아와 ‘엄마’를 죽인다. ‘엄마’는 아무런 저항 없이 칼을 맞는데, 이는 ‘쓸모’와 ‘생존’의 철학을 스스로에게 적용한 결과다. ‘엄마’는 언젠가 자신이 엄마를 죽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영은 ‘엄마’를 죽이고 차지한 보스 자리에서 ‘엄마’와 똑같은 방식으로 ‘엄마’를 추모한다. 영화는 살부의 방식으로 권력이 승계되는 구도를 완결적으로 보여준다. <차이나타운>은 남성의 방식으로 여겨졌던 오이디푸스적인 관계, 즉 ‘살부를 통한 권력의 승계’를 여성들의 관계에 적용시킨 희귀한 판본이다.

‘엄마’와 일영은 유사남성으로, 여성성을 찾기 힘들다. 일영은 어린 시절부터 남장에 가까운 차림이었고, 조직 안의 역할도 남성적이다.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희롱이나 무시를 당할 때만 드러나는데, 일영은 이에 맞서기 위해 더 거친 ‘깡다구’를 키운다. 일영이 여성임을 자각한 것은 외부 남성을 만나면서다. 그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은 날, 남자를 도주시킨 죄로 조직에서 쫓겨난다. 그가 치마 차림으로 조직의 바깥을 배회하는 모습은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조직 내 그의 역할이 얼마나 불일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가 ‘엄마’를 죽이고 보스 자리를 승계했을 때, 그의 여성성은 탈각된다. 영화는 여성성을 탈각한 유사남성들의 세계에서 남성 중심적 권력의 질서와 속성이 그대로 재현된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협녀, 칼의 기억>

대의를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딸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은 만주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군으로, 조선총독과 친일자본가를 암살하러 경성에 온다. 만주참변으로 어머니를 잃은 그는 항일의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최정예 저격수이자 암살 작전의 리더로서, 돌발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한다. 그는 특별히 여성성을 드러내지도 않지만 부인하지도 않는다. 때때로 여성성을 활용해 위기에서 빠져나간다. 그는 암살표적인 강인국(이경영)이 자신의 친부임을 알게 된다. 만주에서 죽은 어머니는 유모였다. 안옥윤은 미츠코를 처음 본 순간 총상을 입는데, 이는 미츠코라는 존재가 안옥윤에게 ‘출생의 비밀’과 ‘전혀 다른 삶’이라는 심리적 충격을 안겼음을 암시한다. 안옥윤은 자신의 운명과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령 ‘내가 독립군으로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혈연을 중심으로 사고하자면 안옥윤은 독립군일 필요가 없다. 강인국의 딸로서 미츠코처럼 살아도 된다. 미츠코는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며 집에 가자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 미츠코가 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는 매국노 강인국이 궁극적으로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안옥윤은 신념을 다잡고 미츠코로 위장하여 친부를 죽이려 하지만,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강인국이 아내와 딸을 죽인 패륜적인 아버지이고, 먼저 안옥윤에게 “난 모르는 년”이라며 총을 쏘았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옥윤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한다. 친구의 아버지를 대신 죽여주는 ‘살부계’ 회원이었다는 하와이 피스톨이 대신 방아쇠를 당긴다. 어찌됐든 <암살>은 공적 대의를 위해 나쁜 아버지를 죽이며 자기 운명을 결정짓는 여성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협녀>는 대의를 위한 살부의 모티브를 더욱 급진적으로 보여준다. 흔히 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술을 익힌다. 그러나 <협녀>는 이를 뒤집는다. 홍이(김고은)는 풍천의 딸이다. 수년전 풍천, 설랑(전도연), 유백(이병헌)은 백성들과 함께 민란을 일으켰으나, 유백의 배신으로 진압되었다. 설랑은 유백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풍천을 죽이지만, 이후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대의를 그르쳤다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설랑은 홍이에게 검술을 가르쳐, 후일 자신과 유백을 응징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속죄의 과정이자 과거청산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이는 양어머니이자 스승인 설랑이 원수임을 알고 놀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홍이가 풍천의 딸이 아니라, 설랑과 유백의 딸이라는 것이다. 칼을 들고 설랑과 유백을 마주한 홍이는 갈등한다. 혈연에 따른다면 그가 설랑과 유백을 죽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홍이는 “협은 사사로운 것을 끊어내는 것”이라는 설랑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그는 “나는 풍천의 딸 홍이다”라고 외치며, 유백과 설랑을 한칼에 죽인다. 그것은 설랑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를 사사로운 혈연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청산의 대의와 사명을 부여받은 공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친부모라 할지라도 역사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 결연함이 돋보인다.

<협녀>가 보여주는 살부의 정신은 <화이>가 제시한 살부의 정신보다 근원적이다. <화이>에서 범죄자들에게 납치되어 그들을 아버지로 부르며 자란 화이(여진구)는 그들에게 배운 범죄기술을 활용하여 아버지들을 모두 죽인다. 화이는 자신이 선한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 그때까지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였던 나쁜 아버지들을 모조리 죽인다. <화이>는 나쁜 아버지, 즉 우리에게 악한 세계를 물려준 기성세대를 모두 죽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던지기 위해, ‘선한 진짜 아버지’의 존재를 상정한다. 즉 내가 ‘선한 아버지(신)’의 아들임을 깨닫고, 이 세계를 지배하는 ‘나쁜 아버지(권력자)’를 죽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협녀>는 ‘선한 진짜 아버지’라는 외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쁜 아버지가 내 친아버지라 할지라도 그들을 가차 없이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친딸이자, 정치적인 유산을 상속받은 후계자이다.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필리핀의 글로리아 아로요, 그리고 박근혜는 ‘아버지의 딸’로 아버지를 승계한다. 그는 유신독재 말기에 아버지로부터 정치를 배웠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후 ‘망국의 공주’처럼 청와대를 나왔다. 그는 유신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배신감을 느꼈으며, ‘아버지의 왕국’을 복원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하였다. 환궁한 그는 지금 아버지의 유신왕국을 복원 중이다.

최근 한국영화에 오이디푸스의 여성판본과 ‘대의를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여성영웅’ 이야기가 잇달아 나오는 건 무슨 연유일까. 첫째는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통해 생물학적 여성이라 할지라도 유사남성의 권력적 욕망과 속성은 남성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이 널리 알려진 까닭이고, 둘째는 아버지를 승계할 뿐 청산하지 못하는 박근혜 시대의 실현되지 못한 시대정신이 스크린에 역상으로 비춰진 까닭이 아니겠는가. 스크린은 때로 휘어진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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