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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영화비평] 차이 받아들이기

장애가 아닌 정체성으로서의 농문화를 그리다

<미라클 벨리에>

<미라클 벨리에>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Children of Deaf Adult), 일명 ‘코다’(CODA)인 폴라(루안 에머라)가 노래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면서 가족과 겪는 갈등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혹자는 농인들의 삶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혹자는 농인들을 자녀에게 의존하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농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빚어진 오해이다. <미라클 벨리에>는 농문화의 관점에서, 부모-자식간의 관계나 사춘기의 고민 등을 잘 풀어낸 영화이다.

흔히 농인을 ‘청각장애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규정은 비장애인 중심의 의학적 사고이다. 청인들은 농인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답답할 거라 생각하지만, 농인들은 소리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에 결핍도 없다고 한다. 마치 무성영화가 그 자체로 완벽하듯이 그들의 고요한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하며, 수어(手語)를 통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를 느끼지도 않는다.

농인들은 자신들이 구어를 사용하는 청인들과 다른 언어체계를 가진 소수어족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회에서 한국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들은 수어라는 모국어로 완벽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지만 주류사회와 통하지 않는 언어장벽을 느낀다. 따라서 농인들은 청인들이 주류인 세상에서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자신들이 소외를 당하는 것이지 본질적인 의미에서 장애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농인들을 ‘청각장애인’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아니라 ‘농인과 (건)청인’으로 부르는 게 옳다.

농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장애가 아닌 정체성으로 사고하며,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다. 이를 ‘농문화’라고 하는데, 서구와 일본에선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한국에서는 인식이 희박하다. 지난 4월 개봉한 이길보라 감독의 자전적인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소리>와 영화 <미라클 벨리에>는 농인 부모와 코다의 일상을 통해 농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인다.

이중 언어와 통역자

<미라클 벨리에>는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아침을 준비하는 부모님과, 화장실 문을 닫지 않고 민망한 소리를 내는 남동생을 익숙하게 지나치는 소녀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농인들은 소음에 둔감하기 때문에, 때로 큰 소음을 낼 수 있다. 폴라의 가족들은 수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함께 농장 일을 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바깥세상과 만나는 곳에선 언어장벽에 부딪힌다. <반짝이는 박수소리>에도 나왔듯이, 코다들은 일찍 철이 든다. 모국어인 수어와 학교에서 배운 구어를 이중 언어로 구사하면서, 어릴 때부터 부모의 통역사 역할을 한다.

폴라는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나이에, 성병에 걸린 부모의 성생활을 의사에게 통역하는 역할을 한다. <반짝이는 박수소리>에는 9살 때 은행에 전화를 걸어 집안의 빚이 얼마인지를 물었다는 사연도 나온다. 폴라는 치즈를 내다파는 장터에서 부모의 장애를 말하지 않기 위해 재치 있게 둘러댄다. <반짝이는 박수소리>에는 부모의 장애를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래서 청소년이 되었을 때, 감독은 부모로부터 멀리 떠난다.

<미라클 벨리에>는 폴라가 초경을 하고, 소년에게 연정을 품고,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고, 부모로부터 떠날 기회를 얻는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배치한다. 폴라는 음악교사로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고민한다. 가족들과 소통할 수 없는 재능이기 때문이다. 마침 아버지가 선거에 출마하여 통역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폴라가 통역을 거부함으로써 가족들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가족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술에 취한 엄마가 막말을 퍼붓는 장면이다. 엄마는 폴라가 농인이 아님을 알고 슬펐다고 말한다. 농인을 장애로 사고하는 청인의 입장에선 이상하겠지만, 실제로 농인들은 농인과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고 싶고, 자녀도 농인이길 원하는 경우가 많다. 농인을 장애가 아닌 소수자 공동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청인인 폴라에게 이질감을 느껴왔으며, 청인들을 미워해왔다고 토로한다. 장애인은 착해야 한다는 편견에 빠진 사람들은 거북하겠지만, 이는 농인의 장애정체감 중 하나인 ‘몰입 정체성’에 의한 감정이다. 어떤 농인은 농인집단에 강한 애착을 갖는 반면, 청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나 분노를 갖는다.

영화는 폴라의 부모가 처음으로 폴라가 노래하는 것을 보는 장면을 무음으로 처리한다. 농인 부모가 느끼는 감각을 관객에게 체험시키기 위해서이다. 마침내 폴라의 부모는 이질감을 딛고 딸의 꿈을 응원하며 떠나보낸다. 오디션 장면에서 폴라가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사랑하지만 가야만 해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날개를 편 것일 뿐”이라 노래하며 수화로 날갯짓하는 모습은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2011)에서 청둥오리의 비상처럼 아름답다.

농문화의 부재

수어는 농인들의 모국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1880년대에 농인들에게 수어를 금지시키고, 구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정책이 세워졌다. 하지만 농인들에게 구어를 강요하는 것은 청인 중심의 비인도적 교육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1970~80년대에는 수어와 구어의 동시사용이 허용되었다. 일본의 경우 1930년대에 구어 교육의 원칙이 세워진 후, 1990년대 이르러 수어를 의사소통수단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에 구화교육이 확대되었으며, 90년대 이후 중•고등부에서 수어 사용이 허용되었다. 현재 수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인정하여 통역서비스 등을 제공하라는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농학교의 농인교사 비율은 8%에 불과하며, 심지어 수어를 모르는 청인 교사가 농인들을 가르친다.

농문화의 부재는 <도가니>(2011)나 <글러브>(2011)를 봐도 알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도가니>에서 수어를 모르는 청인 교사가 농아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의사전달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이용해 성적 착취가 일어났다. <글러브>는 농아들을 “제 몸 챙기는 것조차 어려운 아이들”로 묘사하며, ‘장애인을 불쌍하게 보는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청인들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투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세계농아인올림픽 등 농인들을 위한 스포츠 행사가 수십년째 운영되고 있음을 백안시하는 태도이다.

한국에서 농문화는 인정되기도 전에 인공와우수술의 증가로 더 위축받고 있다. 비싼 수술비로 보급이 쉽지 않았으나, 2005년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면서 인공와우수술이 급증했다. 혹자는 인공와우수술로 농인들이 점차 사라질 것이며, 따라서 농문화에 대한 논의도 불필요하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는 수술 보급을 반기는 의료계 등에 의해 부풀려진 평가이다. 인공와우수술이 모든 농인에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요,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에서 보듯이 부작용의 가능성은 물론 수술 후 재활치료도 계속 받아야 한다. 장애를 의학적으로 접근하여 없앨 수 있다고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정체성으로 인정하여 소수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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