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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의 영화비평] 날개옷을 빼앗긴 여자

<이민자>가 그린 시대의 공기, 그리고 속죄와 구원에 대하여

※ <이민자>와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민자>

멱 감는 틈을 타 의복을 절취하는 수법으로 선녀를 약취•유인한 뒤 강제로 성관계를 맺고 아이까지 낳게 한 나무꾼의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만주족 기원설화 중 하나로 출발해 시베리아, 일본 등 동북아 지역에서 여러 형태의 민담으로 변이, 전승돼왔다. 선녀의 날개옷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도구이기에 앞서 지상의 인간과 다른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나무꾼은 이를 훔침으로써 천상의 여인을 자신과 동등한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동시에 욕망을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한다. 이같은 이야기의 원형은 주로 나쁜 남자가 여성을 착취하는 얼개를 공유하며 무수히 활용됐는데 가까운 예로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2001)가 있다. 사창가의 폭력배가 길에서 본 여대생에게 반해 돈을 훔치도록 유도한 다음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시킨다는 이야기. 그 와중에 두 사람 사이에 스톡홀름 증후군과 비슷한 감정이 생겨나면서 점액질의 끈으로 서로를 결박하는 이야기. <이민자>의 내러티브가 <나쁜 남자>의 그것과 이상할 만큼 여러 군데에서 겹치는 까닭은 이 이야기가 욕망, 속죄, 구원 등등 원형(原型)적 주제를 품고 있는 데다 인간의 원형(元型)적 본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의 ‘얼굴의 영화’

아메리칸드림의 표상인 자유의 여신상으로 출발하는가 싶던 <이민자>의 첫 장면이 이내 줌아웃된다. 곧 뉴욕으로 입항하는 배 한척과 이를 바라보는 사내의 뒷모습이 담긴다. 렌즈가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배는 좌에서 우로 들어오고 남자는 배가 향하는 방향 귀퉁이에 서 있다. 이 미장센에 대해서는 조금 뒤 엔딩 숏과 더불어 다시 얘기하자. 1921년 1월, 배에는 전쟁을 피해 폴란드로부터 대서양을 건너온 에바(마리옹 코티야르)가 타고 있고 아까 그 사내는 뉴욕의 3류 극장에 무희를 공급하는 브루노(호아킨 피닉스)다. 난민이나 다름없는 이민자들 가운데 노동력을 빼먹을 만한 여자를 찾고 있었을 브루노는 아름다운 에바에게 반한다. 입국심사에 불합격하도록 수를 쓰고, 은혜를 베푸는 척 그녀를 빼내 거처를 제공한 뒤, 돈을 훔치도록 유도한 다음 무희로 만들어 성매매까지 시킨다. 에바의 볼모는 입국심사 때 폐질환이 빌미가 돼 치료소에 갇힌 동생이다. 에바는 브루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즉 자신의 신분을 전락시키지 않으면 동생을 찾지 못한 채 추방될 처지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오프닝 숏의 줌아웃은 전쟁을 피해 아메리칸드림을 찾아온 에바와 그녀에게 덫을 놓은 브루노를 순서대로, 그리고 한눈에 담는 압축이다.

엔딩 숏으로 건너가보자. 브루노를 떠난 에바 자매의 배가 창밖으로 멀어져가고 안쪽 거울에 비친 브루노는 반대편 출입문을 통해 걸어나간다. 오프닝 숏과 대비되며 화면의 전방과 후방으로 인물 동선이 설정된 이 숏은, 에바의 배와 브루노의 걸음이 서로 반대 방향인데도 불구하고 한 화면 안에서 함께 관객으로부터 멀어지는 기묘한 마술을 보여준다. 서로를 결박했던 두 사람의 이별이 프레임에 포박된다. 정착을 원했지만 탈출하고 싶었고 떠나고 싶었지만 헤어지지 못한 인물을 카메라가 묶는다. ‘올해의 엔딩’으로 첫손에 꼽아도 손색이 없을 이 장면이 3D였다면 어땠을지 떠올려보는 것은 행복한 상상이다.

속박받는 여성을 그리지만 도구로 삼지 않는다. <나쁜 남자>가 이 문제로 숱한 논쟁을 부른 데 비해 <이민자>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 한편의 ‘얼굴의 영화’로 불릴 만한 <이민자>가 여성을 도구화한다는 의심을 깔끔히 물리칠 수 있는 건 무엇보다 마리옹 코티야르의 눈, 코, 입, 뺨 그리고 눈물 덕이다. 입국심사에서 거부당한 뒤 브루노가 다가왔을 때, 바나나를 생전 처음 보고 껍질째 씹다가 주변 여자들과 눈이 마주칠 때, 수용소에서 추방될 폴란드 동포를 볼 때, 그리고 상황 따라 변화하는 감정으로 브루노를 대할 때, 이 가련한 이방인을 담는 카메라는 더없이 정직하고 그녀의 얼굴은 필요에 따라 정확하다. 화면은 브루노의 욕망을 가시화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인물들의 마음을 부지런히 좇는다. 대서양 한가운데서 성폭행을 당해도 되레 저속한 여자로 취급당하는 시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에바의 표정에 두말 없이 몰입한다.

미국의 20세기를 출발시키는 기원설화

아메리칸 원주민을 제외한 모든 미국인은 이민자의 후손이다. <이민자>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미국의 20세기를 출발시키는 일종의 기원설화다. 이방인들이 세운 나라 미국에서 선배 이방인은 신입 이방인을 맞아들이고 나름의 질서를 만든다. 실물경제보다 금융자본이 비대해지는 구조, 생산자보다 유통업자가 돈을 버는 현실, 배우보다 매니지먼트가 흥하는 쇼비즈니스의 세계, 성매매 여성보다 포주가 이익을 가져가는 지하경제의 생태. 이는 영화를 이루는 또 다른 축인 동시에 에바를 불행의 나락으로 몰락시키는 형틀이다. 몰락은 구원의 모티브에서 필수적이거니와 에바와 브루노는 꼬리 물 듯 나락으로 떨어진다. 브루노가 몰락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올란도(제레미 레너)를 죽인 일이다. (올란도는 무대에서 공중에 떠오르고 결박을 풀어 탈출하는 마술을 선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에바를 떠나 먼 길을 가려다 말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는 죽는다. 머무름과 떠남 사이에서 스스로 결박을 풀지 못한 자에게 구원은 없었다.) 브루노가 에바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은 올란도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뒤부터일까. 아니면 성당에서 에바의 고해성사를 훔쳐 듣고부터일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에바의 고해를 들은 사제가 브루노를 떠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하자 에바는 “그러면 저는 지옥에 갈 거예요”라며 눈물 흘린다. 브루노는 이를 몰래 듣고 있다. 떠나야 한다고, 브루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극 종반 브루노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교통편까지 마련해놓고 에바를 떠나보내면서 일종의 고해성사를 한다. 경찰에게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는 구원을 바란다. 모든 게 내가 꾸민 짓이었다고. 이 불행의 처음과 끝이 나였다고. 날개옷을 훔쳐 당신을 가둔 게 바로 나라고. 속죄가 그들의 결박을 풀어헤친다.

잠깐. 다수의 어린이 동화책에서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선녀가 아이 둘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이후 나무꾼이 두레박을 타고 뒤따라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 똘똘한 어린이 독자는 호시탐탐 집으로 돌아갈 기회만을 기다리던 선녀가 고향으로 쫓아온 나무꾼을 반겼을지 의문이다. 원래 이야기에 따르면 지상의 어머니를 걱정한 나무꾼이 선녀가 내준 천마를 타고 내려갔다가 어머니가 끓여준 팥죽을 먹기 위해 말에서 내려 땅을 딛었고, 천마는 날아가버려 영원히 선녀와 이별하게 됐으며 그 후로 나무꾼은 수탉이 돼 매일 아침 목 놓아 울게 됐다고 한다. 해피엔딩 버전이 더 여성을 도구화한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구원의 진실은 조금 더 먼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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