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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영화비평] 딱 명절 덕담 정도의

아버지로서의 영조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사도세자의 죽음’

<사도>

오랫동안 ‘사도세자의 죽음’은 광기로 인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임오화변이 영조의 성격이상과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빚어진 사건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규정은 1990년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나오면서 흔들린다. 즉 임오화변은 단순한 광기나 부자 갈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이라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한중록>으로 회귀

<사도세자의 고백>을 쓴 이덕일은 <한중록>이 사건 후 수십년이 지나서 쓰인 책이란 점에 주목한다. 임오화변 당시 혜경궁은 사도세자를 적극 구명하지 않았고, 장인 홍봉한은 사위의 죽음을 방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경궁의 가문은 승승장구했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홍봉한이 유배를 당하고, 정조가 죽은 뒤 정순왕후에 의해 몰락하였다. 혜경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혜경궁에게 환갑잔치를 열어준 때에 <한중록>을 집필하였다. 이덕일은 <한중록>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추숭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죽음에 동참했던 친정의 몰락을 두려워한 혜경궁이 사건의 본질은 광기와 부자불화에 있을 뿐 친정가문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쓴 책이라고 논변한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기록되지 않은 패자의 역사에 상상을 가미하여 쓴 책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 한 궁중 여인이 아니라 친정의 당파를 중시한 권력지향적인 정치인에 가깝다. <역린>의 혜경궁에 대한 묘사는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임오화변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인 <한중록>의 진정성이 의심받자, 다양한 해석의 문이 열렸다. 이후 사도세자는 당쟁의 희생양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중문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나아가 집권세력이던 노론에 맞서 소론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 개혁을 시도하다 참살당한 미완의 개혁군주로 격상되기도 하였다. 자생적 근대화의 기회로 여겨지던 영•정조 시대의 연결고리이자, 기이한 죽임을 당한 국본이니 역사적 아쉬움이 판타지로 투사되는 건 당연하다. 드라마 <비밀의 문> 등은 이러한 투사의 반영물이다.

<사도>는 이러한 흐름에 선을 긋는다. 사도세자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으며, 영조를 죽이려 한 이유로 죽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한중록>으로 돌아가 사도세자의 부자관계에 주목한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라는 영조의 일성으로 시작된 영화는 혜경궁의 회갑연으로 끝난다. 에필로그 같은 회갑연 장면은 영화가 <한중록>을 원본으로 삼는다는 표식이다. <한중록>은 정조 19년, 회갑연 이후 집필되었으며, 회고록의 마지막은 회갑연으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무시로 현재에서 과거 회상 장면으로 넘나드는 것을 감안하면, <사도>는 에필로그 장면을 기점으로 사건을 회고하는 혜경궁의 서술을 따르는 셈이다.

세대 갈등에 대한 유비

<사도>는 <한중록>을 복기하며 부자 갈등에 주목한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영화는 영조의 천출 콤플렉스, 어린 사도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는 과정, 공부에 대한 강요, 대리청정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 등을 사료에 충실하게 꼼꼼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가 영조와 사도의 입장을 두루 이해시키려는 듯 보이지만, 다 보고나도 이들의 입장이 이해되지는 않는다. 특히 뒤로 갈수록 사도세자의 입장은 축소된다. 단지 뇌리에 남는 것은 송강호 특유의 생활감 넘치는 억양으로 처리된 “다 너 잘되라고…”, “내가 네 나이 땐…” 등의 말들이다. 사극이 아니라 각자 부모로부터 무수히 들어보았음직한 그 말들. <사도>가 임오화변의 정치성을 탈각시키며 겨냥하는 것은 현재의 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유비다. 즉 영조는 현재의 50대 부모 세대를, 사도는 현재의 20, 30대 자식 세대를 유비한다.

영조는 무수리의 자식이자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 등 정통성 시비를 안은 채 왕이 되었다. 반면 사도는 두살도 되기 전 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는 자신에 비해 너무도 순탄하게 세자가 된 사도가 점차 기대에서 벗어나자 쓴소리를 해댄다. “내가 네 나이 때에는….” 사도는 점점 주눅이 든다. 특히 다섯번에 걸친 양위파동과 15살 때 시작된 대리청정은 사도를 이중구속의 상태에 몰아넣는다. 실질권력은 하나도 주지 않으면서 허울뿐인 대리청정을 시켜놓고,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영조로 인해 사도는 점차 자제력을 잃고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50대 부모 세대 중에는 ‘개천에서 난 용’이 많다. 빈농의 자식들도 교육을 통해 중산층에 진입하는 게 가능했다. 특히 아들의 경우 가족의 지원을 독점하여 대학 교육을 받고 중산층 여성과 결혼하여 주류사회에 진입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들은 ‘촌놈 콤플렉스’를 지니며, 무수리의 자식인 영조의 자의식을 공유한다. 이들은 운이 좋은 세대라는 생각보다 자기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능력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동일 세대와의 경쟁에서 줄을 잘 섰고, 민주화 운동을 통해 세대간 경쟁에서 승리하였다. 또 현실주의적인 선택을 하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해온 능력도 있다. 영조는 노론의 도움으로 왕이 된 후 겉으론 탕평을 내세웠지만 노론의 기득권을 보장하고 공존하였다. 사도가 이를 지적하자 영조는 현실감각이 없다고 꾸짖는다. 50대 부모 세대 역시, 즉 민주화 세대임을 자부하지만 경제 민주화를 요구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개혁에 편승함으로써 자본 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며 중간계급의 위치를 보장받았다. 이들이 자식 세대에게 쓴소리를 퍼붓는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해라.” 자식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데, 부모 세대는 인턴 같은 허접한 일자리를 알량한 기회랍시고 줘놓고는 실력이 없다고 비난한다. 멘토니 뭐니 잘난 척하지만, 정작 다음 세대를 키우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영조가 ‘집안일’ 운운하며 사도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것은 국법에 의해 역적으로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도가 역적으로 죽지 않음으로써 혜경궁과 정조의 신분은 유지될 수 있었다. 영조는 사도가 죽은 뒤 ‘애달프게 생각한다’는 뜻의 시호를 내려 ‘유감’을 표명하고 세자의 지위를 복원해주었다. 영화는 영조가 사건을 개인의 죽음으로 봉합하고 정치 문제로 확산되지 못하도록 막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의 죽음으로 봉합하더라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 나라의 왕이 ‘부자유친’의 강령을 스스로 파괴했다는 오명은 씻을 수 없다. 50대 부모 세대 역시 민주화의 기본가치인 개방, 공유, 소통, 협력을 깨부수며 자식 세대를 압살하고 있다는 비판은 면할 수 없다.

영화는 세대간의 갈등을 유비하고 있지만, 이준익 감독이 50대 부모 세대를 비판하기 위해 <사도>를 찍었다고 볼 수는 없다. 감독은 그들을 비판하기엔, 그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너무 잘 이해한다. 감독은 그 세대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감정은 뒤로 갈수록 영조에게 실리고, 사도세자의 입장은 끝내 해명되지 않는다. 그 결과 영화의 교훈은 “이들 부자를 반면교사 삼아, 자식들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물론 돈 들여 키워놨더니 취직도 못하는 자식들이 한심하겠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자식들은 ‘오타쿠’가 되고, 그러다 이런 참변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자식 죽일 생각 아니면 막말과 꼰대 질을 삼가라” 정도의 명절 덕담이 되는 것이다. 작품성과 무관하게, 딱 그 정도의 의미에서 추석 가족영화로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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