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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그들의 정치생활

<사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는 어떻게 다투었는가

<사도>

두편의 사극이 연이어 개봉했다. 박흥식은 못다 이룬 이상향에 대한 판타지로 사극을 대했다. 실패한 혁명의 여파에 관한 영화인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은 박흥식이 역사 앞에서 꾼 꿈이며 한편으로는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2007)의 사극 버전이다. 박흥식과 임상수는 혁명을 부르짖었으나 그것이 요원한 것임을 기어이 확인하고 말았던 세대다(둘 사이에 있는 내게 그들의 영화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임상수가 애가를 부를 때, 박흥식은 원수 같은 낭만성에 죽음을 고하기로 한다. 그에겐 그게 협이다.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지도자로 행세하는 시대에 박흥식은 나쁜 아비를 죽이는 딸과 비상한다. 아비는 군사혁명을 빌미로 자신의 권력이 영속하기를 탐한 자였다.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되는 영화였다. 그런 영화에 무협만을 운운한 결과일까, <협녀>는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수모에 가까운 외면을 당했다.

이준익도 한때 칼의 이상향을 그린 적이 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은 칼이 잘못된 길을 갈망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하는 영화였다. 그렇듯 이준익의 머리는 항상 민중을 향해 있는데, 이준익의 ‘좋은’ 사극은 그가 왕쪽으로 몸을 돌릴 때 나온다. 이상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그는 권력의 정치를 빌려 남자의 내면 풍경을 그리는 데 탁월한 감독이다. 왕은 그의 드라마를 강렬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신작 <사도>는 TV에서 그동안 무수히 극화된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로도 낯설지 않은 소재다. 꼭 10년 전에 나온 <왕의 남자>의 연산처럼 <사도>의 영조와 사도세자는 실패한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준익의 관심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단, <사도>는 왕으로서 영조의 정치에 대해 직접적인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 꽃을 피우지 못한 인물인 세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협녀>가 허구로 쓰인 사적 역사로 공적인 역사를 꼬집는다면, <사도>는 역사의 인물을 끌어와 사적인 이야기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협녀>가 아버지를 죽이는 딸의 이야기라면, <사도>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이야기다. <협녀>가 실패한 투쟁을 판타지로 채운다면, <사도>는 실패에서 무언가를 건져내기를 바란다. 교훈과는 다른 그것을 굳이 말하자면 정서적 반응이라 부를 성질의 것이다.

두 남자의 ‘헤드 게임’

<사도>는 각 인물로부터 기억과 진실을 끌어내는 척한다. 영조와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와 어린 정조가 플래시백의 형식으로 각자의 진실을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록에서 지워진 사건에 대해 그들의 기억과 그들이 남긴 기록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태도일까? 첫 문장에서 말했듯이 이준익은 ‘척할’ 뿐이다. <사도>는 숨겨진 사실들을 태양 아래로 드러내 검증하기를 의도한 영화가 아니다. 임오화변에 얽힌 수많은 해석과 음모들이 불려나와도 모르는 걸 진실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사도>는 결국 두 남자의 ‘헤드 게임’이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이준익의 사극에서 누군가는 덜 가지고 누군가는 더 가지게 돕는 균형타는 없다. 게임 속 적수가 왕이기 때문이다. 왕이 생명을 포함해 모든 것을 빼앗기까지 게임은 끝나지 않으며, 왕에게 부여된 권력의 힘으로 죽음도 그를 벌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왕의 상대역은 머릿속이 터지도록 게임에 임해야 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여덟날 사이로 플래시백을 삽입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사도>는 심리적 측면에서 3개의 막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어린 사도세자의 시기로서 당시의 부자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다. 두 번째는 사도가 십대 중반에 이른 시기다. 이후 영조의 억압적 태도는 사도세자가 반항하는 초석을 빚는다. 세 번째는 부자의 부조화가 극에 이르는 시기다.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쯤은 전초전이다. 두 남자는 점점 미쳐간다. 광기라는 말로만 왕과 세자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을 때 그들의 관계는 종말을 맞는다(두 인물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가상의 대화에서 왕은 “너는 미쳐서 아버지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왕으로 분한 송강호는 “미쳐서”라는 대사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기괴한 연기를 펼친다. 인물을 통찰한 배우만이 가능한 연기다).

<사도>는 두 남자의 관계가 벌어지면서 미쳐가는 과정을 ‘시선의 춤’으로 표현한다. TV사극이 오로지 얼굴 클로즈업으로만 연결돼 ‘얼굴의 춤’으로 구성된 것과 반대다. 이준익은 왕과 세자의 심리적 흐름을 시선의 교환으로 구성하는 묘를 선보인다. 장면 하나, 왕이 어린 세자의 영특함에 기뻐할 때 두 인물은 마주보고 있다. 두 인물의 시선 사이에는 감정적인 거리낌이 없다. 장면 둘, 혜경궁 홍씨가 궁에 들어온다. 왕이 세자비에게 훈시할 동안 세자는 장난치는 옹주를 보다 웃는다. 웃는 세자에게 왕은 왜 웃느냐고 묻는다. 둘의 시선이 슬슬 어긋나기 시작한다. 장면 셋, 왕은 세자를 종묘에 데려가 “왕가에서는 자식을 원수처럼 기른다”고 이른다. 가르치는 왕 곁에서 세자는 어느덧 어려워하는 기미를 보인다. 장면 넷, 대리청정에 임해 왕은 뒤에 앉아 대놓고 세자를 째려보고 왕의 눈치를 보는 세자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장면 다섯, 뒤주에 들어가기 전 세자는 왕의 노려보는 눈을 완전히 외면한다. 장면 여섯, 뒤주에 갇혀 죽은 세자는 눈을 감았고 왕은 그의 뺨을 만지며 눈물을 흘린다. 시선의 불편한 교차와 시선의 전쟁으로 흘러가는 방식이야말로 <사도>의 정수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떠올릴 법한 영화다. 미친 두 남자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악몽, 셰익스피어 희곡의 설정으로 그럴싸하다. 사실 <사도>의 사건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비하면 소박하다. <사도>는, 너무나 잔혹해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리처드 3세>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나 섬뜩함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맥베스>의 야만적인 폭력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사도>의 비극성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그것보다 크게 느껴진다. 야만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효와 예법이 국시인 나라의 이야기여서? 기본적으로 권력의 시스템 아래 맺어진 관계인, 그래서 기능적으로 연결된 셰익스피어의 인물과 달리, <사도>는 두 남자가 부자의 연으로 맺은 인간적인 관계에 매달린다. 그들의 비극에는 답이 없다. 그러니 셰익스피어 특유의 교훈적 결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비통한 시대의 가혹한 슬픔에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 마땅히 해야 할 말은 삼가고, 우리가 느끼는 것만을 말하기로 합시다”(<리어왕>) 같은 대사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도의 이름 그대로 나는 ‘슬픔만을 생각한다’. 비극의 유일한 교훈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둘의 광기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비등점을 뚫고 나갈 때 이 영화는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에 이른다. 거기에서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준익은 정조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인터뷰에서 그는 정반합을 언급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도중 정조는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이준익의 영화에서 부채는 균형, 즉 정반합을 뜻한다. <사도>의 정조는, <왕의 남자>에서 부채로 균형을 잡으며 줄타기하던 장생과 비교된다. 장생은 마침내 그 부채마저 던지고 자유를 얻는다. 나는 정조가 도달한 균형의 진리가 과연 그를 자유롭게 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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