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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환의 영화비평] 사랑과 영화

영화가 필름에 담겼을 때의 질감과 디지털 이미지 사이에 놓인 의미작용

<필름시대사랑>

<필름시대사랑>이라는 제목은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필름시대’와 ‘사랑’ 사이에 어떤 조사가 들어가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름시대‘의’ 사랑이라면,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그 시절에나 가능했던 사랑 이야기라는 의미가 될 것이고, 필름시대‘를’ 사랑이라고 한다면,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이나 필름으로 찍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률은 그 이상을 원한다. 필름과 사랑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필름시대사랑>이다.

다시 쓰기의 묘기

장률은 서울노인영화제의 개막작 의뢰를 받고 <동행>이라는 단편영화를 연출한다. 하지만 그는 이 단편영화를 다 찍고 난 후에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몇명의 스탭과 함께 <동행>의 공간 중심으로 보충 촬영을 진행한다. 그러니까 <필름시대사랑>은 단편영화 <동행>에 추가 촬영 장면을 덧붙여 완성된 작품이다. 아직 <동행>을 못 본 상태라 확신할 수 없지만, 장률의 인터뷰를 통해 유추하자면 <동행>은 <필름시대사랑>의 1장인 ‘사랑’에 해당하고, 나머지 2장 ‘필름’, 3장 ‘그들’, 4장 ‘또 사랑’은 <동행>을 보완하여 완성된 장면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률은 <동행>에서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꼈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그 부족함을 채우려 한 걸까?

1장은 손녀딸(한예리)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안성기)를 병문안하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흠모하는 병원 청소부 아줌마(문소리)에게 사과를 건네지만 아줌마가 이를 사양하며 옥신각신한다. 할아버지는 칼을 들어 아줌마를 위협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쫓고 쫓기는 경주를 벌이다가 갑자기 아줌마가 할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때 ‘컷’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지금까지의 상황이 모두 영화의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상황이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조명부 퍼스트(박해일)가 감독에게 대들고 나선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영화를 찍는 건 “사랑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는 감독에게 묻는다. “감독님은 사랑을 믿으세요?”라고. 그러자 감독은 그를 디렉터스 체어에 앉히며 이렇게 응답한다. “사랑? 찍어봐”라고. 조명 퍼스트는 필름통을 훔쳐 현장에서 달아나고 잠실 언저리를 배회하다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필름시대사랑>과 <동행>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줄거리다. 하지만 장편으로 확장된 <필름시대사랑>에도 이외에 별도로 추가된 스토리는 없다. 1장만 놓고 보면, 우리는 이 작품이 왜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에 몇몇 주요한 이미지를 덧붙여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는 할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는 시늉을 하는 장면이다. 그는 손녀딸에게 음악이 들리는지 묻는다. 손녀는 마지못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로 한복판에서 책들이 불타는 장면이다(이 이미지의 함의에 관해서는 장률의 인터뷰를 보라). 이것이 1장 ‘사랑’, 또는 (추측건대) 단편영화 <동행>의 전부다. 그런데 만약 <필름시대사랑> 없이 별도로 <동행>만 보았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아마도 호의적인 평가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백건대, 나는 1장을 보면서 장률이 왜 이 영화를 연출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필름시대사랑>은 <동행>에 덧붙여진 2장, 3장, 그리고 무엇보다 4장인 ‘또 사랑’을 경유하며 ‘질적으로’ 다른 영화로 도약한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필름시대사랑>에서 1장이 가장 부족하고 무의미하며 매력 없어 보이지만, 이후 등장하는 나머지 세장 모두가 1장의 부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1장이 본서라면, 나머지 세장은 이에 대한 주석서다. <필름시대사랑>은 진기한 방식으로 ‘다시 쓰기’의 묘기를 부린다.

1장에서 조명부 퍼스트의 “사랑을 믿느냐”라는 질문과 할아버지가 연주 시늉을 하는 기타 소리가 들리는지 묻던 질문을 결합해보자. 당신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랑의 존재를 믿습니까, 라는 질문. 물론 믿는다, 라고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감독이라는 사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랑을 카메라로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해일의 반항에 대해 “사랑? 찍어봐”라는 감독의 응답을 기억할 것이다. 1장(또는 <동행>)만 놓고 본다면, 장률이 그것을 찍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2장부터 4장은 “사랑? 찍어봐”라고 말했던 감독의 질타에 대한 조명부 퍼스트의 영화적 응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률은 스스로를 질책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단편영화를 장편영화로 확장했는지도 모른다. 1장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그저 관념의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장을 거쳐 4장에 이르면 사랑은 감각적으로 경험 가능한 대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질적 도약의 과정에 필름(또는 영화)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필름시대사랑>은 시간의 흔적이 깊이 남아 있는 낡은 16mm 필름으로 촬영된 2장 ‘필름’과 함께 극영화에서 실험영화로 급선회한다. 2장 ‘필름’은 1장에 등장했던 장소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소와 사물을 카메라에 담는다. 장률이 원하는 것은 관객이 ‘필름 그 자체’를 경험하는 일이다. 다양한 실험영화가 필름의 물질성을 경험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었지만, 일반적인 극영화에서 우리는 필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필름에 기록된 대상을 볼 뿐, 필름 자체를 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필름 시대의 소멸 이후 필름을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필름과 노년의 공통점이 아닐까?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젊었을 때 굳이 그들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분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필름의 스크래치처럼 그들의 몸에 어떤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이다. 늙고 병들었을 때, 심지어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오히려 그들을 더 느끼고 싶어 한다. 필름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렇지 않을까?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 우리는 필름을 굳이 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제야 필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필름시대사랑>은 어떤 대상이 필름에 담겼을 때의 질감과 디지털 이미지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의 차이’를 느낄 것을 권한다. 가령, 2장에는 다양한 색의 알약이 뭉텅이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알약의 의미가 아니라 필름에 담긴 색감의 경험이다. 마찬가지로 장률은 빛(특히 자연광)이 투사된 다양한 사물과 필름이 만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색과 빛이 새겨진 필름의 경험. ‘사라진 것’ 또는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장률의 애도는 단지 필름에 머물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레코드판을 보여주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빈 병이나 바퀴 달린 의자 등의 회전하는 사물을 통해 필름카메라(또는 영사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영화사에서 사라진 무성영화(3장)와 흑백영화(1장)까지 끌어들인다. <필름시대사랑>에서 장률의 관심은 영화사의 변화를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사적(史的) 대상을 향한 사적(私的) 초혼. 1장에서 할아버지는 자신은 정신병이 아니라 우울증에 걸린 것이라 말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우울증은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 할아버지는 장률의 또 다른 분신이다. 상실한 것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여전히 곁에 붙들고 있는 우울증 환자. 결국, 이 우울증이야말로 필름을 향한 장률의 애정 고백인 셈이다.

믿음, 또는 영화의 힘

3장 ‘그들’에서는 <살인의 추억>을 시작으로,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처럼 1장의 배우들이 과거에 출연했던 영화의 일부를 무성영화 형식으로 차용한다. 박해일은 할아버지를 죽여 경찰의 취조를 받고, 청소부 문소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한예리는 문고리를 잡고 아이를 낳는다. 장률의 말마따나 “필름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건너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꼭 이러한 표현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을 지우기 힘들다. 반면에 4장 ‘또 사랑’은 <동행>이 <필름시대사랑>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4장은 1장의 반복인데, 흥미로운 것은 인물의 형상을 화면에서 지우고 카메라 움직임과 대사만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인물이라는 중심에서 해방된 카메라는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 같고, 육체에서 벗어난 목소리는 신비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화 사운드 연구가인 미셸 시옹은 <필름시대사랑>의 반대 경우, 그러니까 육체 없이 등장했던 목소리가 이내 그 기원인 육체를 만나는 사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몸이라는 한정된 경계 안에 갇히는 일종의 음성의 구속이며, 몸이 이 ‘육체 없는 목소리의 신비함’을 길들이고 그 힘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미셸 시옹의 말을 응용한다면, 장률은 육체에 구속되었던 음성과 카메라를 해방시킴으로써 자신이 영화에 매혹되었던 영화의 그 신비한 힘을 고백한다.

화면에서 육체의 형상을 지웠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1장을 보았기 때문에 부재하는 인물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빈 공간을 채워넣는다. 그렇게 <필름시대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해도 볼 수 있고, 들리지 않는다 해도 들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을 영화적으로 번역한다. 4장은 1장에서 말하고자 했던 사랑, 노년, 그리고 영화의 유사성에 대한 가장 훌륭한 주석이다. 1장과 4장이 대체로 동일하다 해도, 몇몇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대표적인 순간이 영화의 엔딩이다. 4장에서 조명부 퍼스트는 정신병원의 할아버지처럼 연주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장률은 이 장면에서 (1장과 달리) 그의 손놀림에 맞춰 음악을 삽입한다. 들리지 않는 것마저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라면, 그것은 오직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경험, 또는 (질 들뢰즈의 말을 빌린다면) 영화가 갖는 ‘창조하는 힘으로서의 거짓의 역량’과 다르지 않다. 사실, 영화적 쾌락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다. 우리는 영화가 허구(거짓)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지식), 영화관에 있는 동안만큼은 화면에 펼쳐지는 것들을 진짜라고 ‘믿으며’ 영화적 쾌락을 얻는다. 들리지 않는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환각의 경험이 사랑의 힘이라면, 이는 믿음 속에 이뤄지는 영화적 쾌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게 장률은 사랑과 영화를 하나의 지점에 겹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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