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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영화비평] 우주와 맞선 인간의 숭고

참혹한 세계를 버텨나가는 영화적 지혜에 대하여

<마션>

리들리 스콧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션>(2015)은 참으로 희한한 작품이다. <마션>의 기이함은 (역설적이게도)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모험극의 정석을 철저히 따르는 ‘평범성’에 있다. 이 작품의 방점은 화성에 홀로 남겨져 살아남고자 온갖 노력과 지혜를 짜내는 마크 월트니(맷 데이먼)의 분투, 그를 살리고자 방책을 강구하는 나머지 대원들과 나사(NASA)의 인력들,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각각 나뉘어 찍혀 있다. <필사의 도전>(1983)이나 <아폴로 13호>(1995),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 등 우주 비행사들의 모험과 역경을 다룬 여러 SF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장르의 컨벤션을 <마션>은 충실히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미션 투 마스>(2002)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캐스트 어웨이>(2000)의 생존담. 우주복과 우주선, 나사의 관제탑은 어김없이 등장하며, 고난과 역경을 거친 끝에 주인공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만인의 환대를 받으며 지구로 귀환한다. 요컨대 <마션>은 시각적 스타일이나 서사 방식에서 여타의 우주 SF 드라마와 동일한 반열에서 논해야 할 작품이지 리들리 스콧만의 미학적 스타일 내지 독자적인 비전의 발전선상에 두고 보기엔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대규모 예산의 스펙터클 안에서 오롯이 자신의 독자적인 인장을 남겨온 리들리 스콧은 무슨 이유에서 이같이 평범한 서사와 플롯의 영화를 자처한 것일까? 아니, 리들리 스콧은 왜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을 영화에 적합한 소재로 보고 선택한 것일까?

인간과 세계의 대결, 그리스 비극의 숭고

<마션>의 촬영 로케이션으로 극중에서 화성으로 보이는 곳은 CGI에 의한 변형과 색보정이 가해지긴 했지만 실제 지구상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요르단의 와디럼 사막. 바로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T. E. 로렌스가 활약했던 무대였던 이곳은 <프로메테우스>(2012)의 외계 행성 풍경,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에서는 오프닝의 카데시 전투와 모세가 추방되어 유배지로 향하는 도중에 지나는 사막으로 다시 영화 속에 등장한 바 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사막의 광활함. 이 지형의 선택은 현재 리들리 스콧이 달려가는 작가적 지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영웅의 길을 걷던 로렌스가 종국에는 한 인간의 역량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고 마는 것처럼, 리들리 스콧의 인물들 또한 사막으로 표상되는 세계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고난의 길을 걷는다.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마션>은 평범한 SF 모험극의 범주에 안착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 이래 근 3년간 리들리 스콧의 필모그래피가 진행되는 흐름 속에 <마션>을 넣어보면 이 작품 또한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주제적 일관성에 속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구원의 창조주를 찾아간 인간들은 정반대의 외계인과 괴물이 기다리는 행성에 도착해 파멸을 맞고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의 모세는 히브리 신의 계략과 잔혹함에 절망한다. 인간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불가해함을 극한으로 몰아붙인 영화는 바로 <카운슬러>(2013)였다. 비인격적이고 잔인한 세계에 던져진 개인이 그에 맞서 몸부림치며 좌절하거나 다시 일어나는 이야기 구도의 반복. SF호러, 스릴러, 대형 서사극 등 작품간의 장르적 성격은 다 다르지만 비정한 세계 속에 내던져져 그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연계성을 지닌다. <마션>의 마크 월트니는 생존을 위협하는 화성의 가혹한 환경에 놓여져 다시 한번 인간과 세계를 대결시키는 리들리 스콧의 시험장에 오른다.

그리스 비극에서 인간 비극성의 본질이란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 즉 인간 자신이 세상 속의 자신을 비극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일리아드>나 <오디세이>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러하듯 신적 존재의 비열함과 무자비함, 숙명의 불가해함에 맞서 대항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인간형이 등장한 것이다. 리들리 스콧의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루카치의 <비극의 형이상학>이 지적한 바와 같은 그리스 비극의 고전적 실존주의와 맥이 닿아 있다. 세계는 결코 우리 인간의 상상과 같지 않고, 의지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인간 존재는 시시포스의 딜레마처럼 자기의지를 가지고 숙명에 저항할 수 있다. 마크 월트니가 화성의 토양에서 감자 재배에 성공하고 나사와의 교신을 시도하며 점차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내는 것처럼. 우주와 자연으로 표상되는 세계의 가혹함, 그리고 그 앞에 선 인간을 대비시키면서 배어나오는 ‘숭고’(sublime)의 감정. <프로메테우스>와 <카운슬러>의 처절한 비극성과 <마션>의 생기발랄한 유쾌함은 사실 같은 사상적 뿌리를 공유하는 일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마션>의 궁극적인 주제는 소설과는 다르게 처리된 결말에서 밝혀진다(원작에서는 수십억 사람들이 자신의 편이 되어준 데에 대한 소감을 말한 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라는 말을 던지는 걸로 끝난다). 교관이 된 마크 월트니가 훈련생들에게 던지는 ‘이 세계는 최악일 수 있고 매 순간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노력하라’는 내용의 말은 리들리 스콧이 <마션>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주제인 동시에 감독 자신의 영화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감동적인 일리(一理)이다.

개인에서 공동체, ‘홀로-존재’에서 ‘서로-존재’로

<마션>의 카메라는 살아남기 위한 마크의 분투 못지않게 구조작전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그의 무사생환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은 그들이 없었더라면 마크는 분명 고립무원의 화성에서 외로이 죽어갔을 것임이 분명하다. 한 사람의 위기를 가벼이 넘기지 않고 분연히 단결하는 이 전 지구적 연대는 <마션>에 깔린 낙관주의적 정서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 삶의 존재 조건에 대한 리들리 스콧의 관점을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모세는 입법자(立法者)의 사명을 다해 십계명을 완성함으로써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고, <로빈후드>의 로빈과 그 일당은 국가의 착취와 폭압을 피해 숲에 새로운 마을을, ‘자유인들의 대안 공동체’를 꾸린다. 리들리 스콧은 항상 개인적 영웅주의를 넘어 상호평등한 공동체로부터 (정치권력에서 자연과 우주에 이르기까지) 초월적 힘에 맞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 있도록 하는 휴머니즘적 희망과 가능성을 보아왔다. <글래디에이터>(2000)에서부터 드러난 민주주의적 이상에의 추구는 <로빈후드>의 무정부적 공동체를 거쳐 마침내 <마션>의 전 지구적 연대라는 위대한 희망으로 승화하고 있다. 세계는 참혹하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기댈 공동체의 형식이 있다면 그나마 이 세계를 긍정하고 버티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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