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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미의 영화비평] 사랑이라니 맙소사

살 만한 구조로서의 관계에 대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생각에 대하여

<더 랍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억압적인 세계의 뒤틀린 구조와 그러한 구조에 예속된 개인을 초현실주의적인 우화로 풍자해왔다. 그런 란티모스가 사랑을 다룬다고 했을 때 기대와 의심이 동시에 들었다. 영화의 알고리즘에 따라 1g의 감정도 오차 없이 느끼도록 설계된 란티모스의 인물들은 사랑의 파토스와 같은 날것의 감정과 가장 거리가 먼 유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송곳니>에서 중요한 장면은 모두 노란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를 그어놓은 것처럼 연출되어 오히려 감흥이 없었다는 평(스콧 파운더스)은 이와 일정 부분 맥이 닿아 있는 지적일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란티모스는 멜로드라마를 비틀어 지독한 사랑의 우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더 랍스터>에서 연인-부부 관계는 철저하게 시스템을 통해 통제된다. 세개로 구획된 공간(호텔, 도시, 숲)은 곧 시스템의 질서를 의미한다. 호텔에서 짝을 찾는 데 성공하면 도시로 갈 수 있고 실패하면 동물로 변하게 되며 짝 찾기를 거부한 반역자들은 숲에 모여 산다. 도시-호텔에서는 짝이 없는 자가, 숲에서는 짝을 만난 자가 처벌받는다. 이 지점에서 얼핏 대립된 공간처럼 보이는 도시-호텔과 숲이 실은 공모 관계를 형성함을 알 수 있다. 상호배타적인 두 집합을 통해 사랑의 자유를 통제하는 시스템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금지된 것은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전자는 도시- 호텔에서 후자는 숲에서 허용된다)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할 수 있는 자유다.

그러므로 호텔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이해해줄 상대를 찾는 게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결점이 있는 상대를 찾는다. 코피 흘리는 여자는 코피 흘리는 남자를, 근시인 남자는 근시인 여자를 만난다. 이별의 대가가 가혹한 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에 도박을 거는 대신 애초에 공감이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상대에게 안착하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는 “안착하려는 사람은 다만 하나의 구조를 원할 뿐이다. 물론 구조의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구조는 살 만한 것이며, 바로 거기에 구조의 가장 적절한 정의가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더 랍스터>는 사랑 대신 살 만한 구조를 택하게 된 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영화의 시큼한 유머는 구조에 안착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데서 발생한다(란티모스의 시니컬한 유머에서 거리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바로 그 거리 때문에 가장 비극적인 순간조차 감정이입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의 영화를 보고 웃을 수는 있어도 울 수는 없다).

란티모스의 인물은 항상 극단적이어서 비현실적인데 오히려 그 비현실성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마치 실험실에서 스포이트로 인간이라는 종의 특질 중 하나를 축출한 뒤 순수하게 그러한 성분만으로 이루어진 인물을 제조해내기 때문이다. 가령 절름발이 존과 냉정한 여자는 관계 맺기라는 스펙트럼의 끝과 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자신과 동일한 결점을 지닌 사람이 드물다고 판단될 때, 존은 상대와 유사한 결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꾸며내기 위해 자해하는 반면 냉정한 여자는 상대방이 존처럼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자해한다.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존처럼 기만적이지 못하고 냉정한 여자처럼 냉정하지 못하며 나이 든 여자처럼 자살할 용기도 없다. 그래서 그는 숲으로 떠난다.

데이비드는 숲에서 곧바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혼자가 아니다. 숲에는 사랑을 나누다 발각되어 신체형을 받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역설적이지만 이들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은 사랑을 금지하는 가혹한 운명 그 자체다. 호텔에서 사랑을 억제하게 만드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별의 위험을 기피하도록 훈련된 합리적인 이성, 즉 자기 자신이었다면 숲에서는 철저하게 외부적인 힘만이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텔에서 사랑 타령을 하는 자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덜떨어진 로맨티시스트 취급을 받겠지만 숲에서 사랑에 빠진 자는 명백한 불행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내던진 숭고하고 애처로운 사연의 주인공으로 기억될 것이다(일반적으로 멜로드라마에서 사랑에 갈등을 일으키는 외부적인 힘이 악한 개인, 계급, 사회규범 등의 양식으로 제시된다면 <더 랍스터>의 숲에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을 금지하는 순수 명령의 형태로 등장한다). 따라서 도시-호텔에서 억압되었던 사랑의 충동이 숲에서 부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물들이 사랑에 빠지면서 멜로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멜로드라마적인 상황이 인물들을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을 냉소하는 란티모스가 건네는 또 하나의 모진 농담이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여자(레이첼 바이스)는 데이비드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금지하는 숲의 명령에 따라 두눈을 잃는 신체형을 받고 둘의 사랑은 불가피하게 깊어진다. 남은 일은 하나. 두 사람은 멜로드라마적 환상, 즉 둘을 갈라놓는 외부의 장애물을 제거하면 사랑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믿음에 따라 숲을 탈출하기로 한다. 탈출 직전은, 그러므로, 두 사람이 가장 멜로드라마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이다. 데이비드가 말한다. “왼발을 든다. 팔꿈치로 무릎을 두번 두드린다. 발로 무릎을 세번 건드린다. 엎드린다. 무릎을 꿇는다. 왼쪽 뺨을 만진다.” 번역 불가능한 이 낭만적인 대화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멜로드라마 특유의 과잉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터 브룩스(<멜로드라마적 상상력>)에 따르면 “기존 언어에 대한 깊은 의심 속에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행해지는 재현 수단의 변형과 왜곡, 몸짓 등이 과잉의 양식에 해당한다”. 두 사람은 기존의 언어로는 금지된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지극히 사적인 몸짓언어를 만들었고, 운명에 맞서고자 하는 결단을 바로 그 은밀한 과잉의 언어로 공표한다.

하지만 숲을 떠나 반멜로드라마적인 도시-호텔의 세계로 돌아오는 순간 사랑의 맹세가 얼마나 허약한 언어로 이루어진 것인지 드러나는 일은 필연적이다(숲에서의 은밀했던 몸짓이 반복되더라도 도시-호텔에서는 무관심의 영역에 방치되어 아무도, 카메라조차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제 카메라의 관심사는 데이비드가 도시-호텔의 논리에 따라 장님이 된 여자와 같아지기 위해 칼로 자신의 눈을 찌를 수 있을지 여부다). 그런데 그 허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고 테이블에는 칼이 놓여 있다. 데이비드가 칼로 눈을 찌르기 전 여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화면 밖으로 잘려나간다. 반면 여자가 칼을 들고 자리를 비운 그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그의 빈자리는 의도적으로 화면 내에 포함된다. 전자에서 여자의 존재는 부인되고 후자에서 남자의 부재는 강조된다. 시간이 흐르고 웨이터가 여자의 빈 유리잔에, 아직도 밖에서 눈을 찌를지 망설이고 있는 데이비드의 가득 찬 잔과 대조되는 그녀의 빈 잔에 물을 가득 부어주면서 영화가 끝난다. 엔딩 시퀀스는 관계의 권력이 한쪽으로 비대칭하게 기울어져 있는 모습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란티모스는 절절했던 한때의 로맨스가 사그라지는 광경을 응시하며 살 만한 구조로서의 관계 혹은 지속적으로 견딜 만한 연인 관계란 결국 동일한 결핍, 동일한 상처, 동일한 결함을 지닌 두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냉소적으로 읊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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