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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영화비평] 디지털 유토피아의 가능성과 한계

해피엔딩 뒤에 도사린 무력감을 응시하는 자코 반 도마엘의 시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반대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왔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는 신을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그리는 정도가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끌어내린다. 그런데 그 수단이 첨단의 장비(컴퓨터)를 신에게 선사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장비는 업그레이드됐지만 위엄은 다운그레이드되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진다. 베냐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물을 가장 가까이 끌어오려는 대중의 욕망이, 거리감을 전제하는 아우라와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물이다. 수많은 재현물에서 인간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신비화된 신의 창조과정을, 자코 반 도마엘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간단하게 누설해버린다.

감각의 언어를 긍정하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신에 대한 재현방식 자체는 따지고 보면 그리 도발적인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해 구약성서에 묘사된 신에 대해 “잔인하고 복수심이 많고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라고 적었다. 이에 100% 동의하긴 힘들지라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각각 신과 예수를 중심으로 쓰여 있으며 신을 경외시해야 하는 두려운 존재로, 예수를 인간의 죄를 대신해 희생하는 유약한 존재로 그리면서 신에 대한 두 가지 판본을 제시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제퍼슨의 말에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영화의 독창성은 신에 대한 묘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명명 행위에 있다. 극중 신의 모습은 포악한 가부장, 폭군 등 어쩌면 전형적인 남성성에 대한 재현처럼 보인다. 가장 전형화된 모습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오는 새로움이 도발성의 정체다. 마치 뒤샹이 기성품인 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전시했을 때와 같은 도치가 새로움의 이유다.

영화의 가장 주요한 도발은 신에게 숨겨둔 딸이 있다고 설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에아(필리 그로인)는 종교에서 신과 사도들이 남성으로 상상되어, 상대적으로 여성의 존재감은 미비함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폭압적인 주체와 여성 캐릭터의 탈주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와 통하나 그 해결방식이나 과정은 서로 다르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중요했던 건 바깥으로 내달리는 속도감이다. 정권의 교체는 마치 고무줄이 끊어지기 직전에 튕겨 들어오듯, 내달리는 힘의 반작용을 통해 이뤄진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질주할 때,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기어간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 내달리는 속도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에아가 아버지의 나라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은 드럼세탁기에 난 구멍 속을 기어나오는 것이다. 마치 탄생의 과정을 은유하는 듯한 장면 이후 에아는 사도를 찾아 걷고 또 걷는다.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탈출구와 연결된 코인 세탁소의 문을 열고 나온 에아의 머리 위로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떨어진다. 에아는 처음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몸을 적시는 빗방울을 잠시 느낀다. 그 순간 신의 나라에서 결여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생의 감각이다. 에아가 끌어모은 여섯 사도는 소수자가 아니라 각자의 이유로 삶의 감각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오렐리는 어린 시절 춤을 추던 중 열차에 팔이 잘리는 사고를 당해 한쪽 팔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었고, 모험가를 꿈꿨던 장 클로드는 작게 쪼그라들어 워커홀릭이 되었으며, 프랑수아는 미물일지라도 무언가를 죽이는 데 더 쾌락을 느낀다. 마크와 윌리는 자신의 도착적 욕망을 숨기고 산다. 이들은 외톨이처럼 고립되어 있고, 마르틴처럼 결혼한 경우에도 배우자와의 관계가 무감각하다. 에아와의 만남 이후 이들은 각자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존재의 감각을 찾아간다. 그러니까 에아는 지옥처럼 사는 자들에게 세상은 적어도 감각의 천국임을 말해주기 위해 온 사자다.

에아는 오빠인 예수가 모은 12명의 사도에 6명을 덧붙여 18인의 사도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야구광인 여신이 18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에아가 18명의 사도를 새로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있는 12명의 사도에 6명의 사도를 추가하는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다. 대체가 아닌 첨가는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에아가 여섯 사도를 차례로 만날 때 신의 집에 걸린 성화 <최후의 만찬>에는 사도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삽입된다. 에아의 존재가 원래 있던 것이 삭제된 것이라 가정할 때, 어쩌면 사도들의 얼굴 역시 새롭게 첨가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근법에 의해 화면의 정중앙에 놓인 예수의 얼굴이 에아의 얼굴로 대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영화의 한계인 동시에 선택이다. 만약 에아가 새로운 사도들 18명을 찾는다면 아마 에아가 예수를 대신해 중심에 앉아야 했을 것이다. 영화는 중심성을 대체하는 또 다른 중심성을 세우기보다는 여전히 주변화된 것의 힘을 믿는 것 같다. 주변성은 새로운 신약성서의 집필 방식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에아는 신이라는 유일자의 전능함을 전파하는 대신 개인적인 일화에서 나오는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신약성서가 하느님의 이야기를 사도들이 대신 증언하는 성격의 기록물이었다면 에아가 쓴 새로운 신약성서는 하나로 모아지지 않은 개별자들의 이야기가 적힌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 시대의 포교란 누군가에게 기적을 행하거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것임을 말한다. 완성된 신약성서에는 글자 대신 그림들이 듬성듬성 그려져 있다. 기록자 빅터를 글이 서툰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아마 이성의 언어 대신 감각의 언어를 긍정한 것이리라.

혁명적 결말의 한계점

영화는 신과 여신으로 대변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으로 나눈 뒤, 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손쉽게 유토피아를 그린다. 집에 혼자 남아 <최후의 만찬>의 사도 수를 헤아리던 여신은 마침내 18인의 사도가 완성되자 들뜬 마음에 집안을 단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신의 방 컴퓨터와 연결된 플러그를 실수로 뽑아서 모든 데이터를 리셋하고 만다. 여신은 자신이 마음에 드는 핑크빛으로 하늘을 디자인하고 이 결과는 세상에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이런 결말을 유토피아라고 볼 수 있을까. 일상에 젖어 있던 사람들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컴퓨터 프로그램을 매개한 디지털 유토피아다. 그러나 비록 결정자와 피결정자가 서로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분명할지라고 시스템 결정권자의 선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혁명적인 결말은 분명한 한계점을 지닌다.

영화는 원인에 있어서의 작은 변화가 결과에 있어서 큰 변혁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한다. 변화는 쉬워졌지만, 그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여기에서 오는 무력감이 해피엔딩 뒤에 여전히 도사린다. 자코 반 도마엘은 디지털의 세계에서 아날로그에 대한 감각적 열망을 상기시키며 망설이다가 결국 디지털의 세계를 긍정하는 것으로 돌아선다. 그가 시각화한 핑크빛 유토피아는 디지털이, 그리고 디지털의 최대 수혜자일지 모르는 영화가 그래도 우리의 상상을 손쉽게 실현해주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이 성급한 유토피아를 긍정하기보다는 <홀리모터스>(2012)에서 너무나 작아진 카메라와 이로 인해 쉬워진 영화 만들기에 대한 불평을 제기하며 거대한 리무진을 몰고 도시를 떠도는 레오스 카락스의 투덜거림을 좀더 경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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