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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의 영화비평] 서사를 잃고 헛돌다
송경원 2016-01-28

과잉된 카메라 액션이 불러오는 죽음을 향한 충동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한 때 그의 현란한 기교에 매료됐다. 의심은 <바벨> 때부터 싹텄고, <버드맨>을 보고 불안해졌다. 그리고 <레버넌트>를 통해 확신했다. 이제 다음이 궁금하지 않다.

1.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무덤에서 일어난 순간 헛된 기대인걸 알면서도 그의 걸음이 복수를 향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피츠제럴드(톰 하디)에게 살해당하는 아들 호크의 참상을 목격한 장면부터 이미 내정된 걸음이었지만 그럼에도, 글래스의 처절한 걸음이 종국에는 복수 이외의 다른 곳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 같다. 복수극이 끔찍하다거나 식상해서가 아니다. 영화 중간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어느 지점부터 주의가 흩어졌다고 해도 좋겠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한 줄로 정리한다면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복수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게 정말 복수심일까. 그 계기가 되는 사건, 아들의 죽음은 거의 45분이 지나야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냐리투가 40분이 넘게 보여준 것은 무언인가. 그 장황하고 긴 시간에 <레버넌트>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영화의 뼈대는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액션을 찍기 이전에 카메라가 액션을 한다. 카메라의 움직임, 롱테이크로 연결되어 공간을 훑는 행위는 언젠가부터 그의 영화 미학 중심에 서 있다. 핸드 핼드 카메라와 스태디 캠을 활용한, 현란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카메라 무브먼트가 지향하는 것은 얼핏 봐도 강렬한 현장감과 리얼리티일 것이다. <레버넌트>에서도 여지없이, 그리고 자랑스럽게 그 관능의 카메라가 등장한다. 그것도 보란 듯이 초반 오프닝 시퀀스에 두 번 크게 도장을 찍고 간다. 초반 아내, 아들이 나오는 꿈의 영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생존에 대한 명제들)이 지나가고 나면 바로 엘크 사냥 중인 헨리 대령의 캠프 장면이 이어진다. 곧바로 인디언부족이 습격해 전투가 벌어지고 부대는 소수의 생존자와 함께 배를 타고 강으로 도주한다. 장장 10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카메라는 한 두 차례 끊어질 뿐 긴 호흡으로 강가의 혈투를 훑는다. <버드맨>(2014)에서 영화 내내 시도했던 것과 같이 전지전능한 카메라가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말해 이 롱테이크는 여전히 놀랍다. 하지만 단절 없는 동선의 효과가 진정 현장에 있는 듯한 리얼리티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아니라고 답하겠다.

이 장면의 롱테이크와 카메라 무브먼트는 현란함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서사적 기획에서의 목적은 찾기 어렵다. 움직임을 위해 렌즈의 왜곡도 마다 않는 이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버드맨>에서도 그랬지만 카메라는 완벽하게 사건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특정 시점이 아니라 움직임이 주인공이며, 시점의 연결점은 액션에서 액션으로, 학살에서 학살로 붙어있다. 누군가가 죽으면 다음 죽음의 대상으로 초점을 옮겨 다니며 액션을 하나의 선으로 꿰뚫는다. 어지럽다 해도 좋을 이 같은 카메라가 남기는 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관찰자의 부재다. ‘리얼함’에는 반드시 시선이 필요하다. FPS 게임의 리얼리티가 가능한 것은 그 모든 공간이 조작자의 1인칭 시점을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버넌트>의 이 시퀀스에는 시선이 부재한다. 비인칭적인 시점도 아니고 1인칭도 아니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카메라다.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전장이라는 공간을 탐한다. 물론 그는 <그래비티>(2013)에서도 루베즈키의 카메라는 비인칭적 카메라 시점과 1인칭 시점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래비티>가 시도한 이 같은 시각적 기획은 남발되진 않았다. 감독의 통제 하에 소박한 서사를 메우고 우주의 공간감을 복권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버드맨>에 이르면 카메라는 완전히 해방되어 인물을 물리적으로 잇는 가공의 연속선 역할을 맡는다. 카메라가 아예 편집과 봉합의 도구가 되어 사건과 인물의 연쇄를 이어 붙인다. 그 결과 우리 앞에 자라나는 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카메라의 권능이다.

<레버넌트>는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카메라가 얼마나 전지전능한지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해버린다. 우리는 사건의 목격, 인물의 관찰 이전에 카메라의 존재, 움직임, 기술적 성취부터 마주하고 인지할 수밖에 없다. 이 짧지 않은 초반 시퀀스에서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건 휴 글래스와 그 일행이 겪은 끔찍한 전투의 서막이 아니라 카메라가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움직인다는 사실, 오직 그것이다.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얼마나 현장감이 있는지 등은 오히려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효과에 가깝다. (1인칭 게임시점에 익숙해져 일으킨 일종의 착시라 생각한다.) 요컨대 <레버넌트> 역시 카메라 무브먼트 그 자체를 사건화 한다. 이런 시퀀스를 영화 전면에 배치한 건 우리가 얼마나 잘 찍을 수 있는지에 대한 자기과시적 노출증이나 다름없다. 이냐리투는 이제 카메라의 통제를 포기한 채 해당 시퀀스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술적 성취에 경도되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릇 감독의 권능이란 시선의 제한과 시점의 통제에서 비롯된다. 그 고삐를 카메라에 맡겨버렸을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날뛰는 카메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레버넌트>의 오프닝은 앞으로 펼쳐질 장면들에 대한 선언을 하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신이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을 찍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그것을 ‘잘’ 찍어왔는지 감상하는 일이라고. 결정적 사건이자 영화의 출발인 아들의 살해가 등장하기 전 40분 가량 <레버넌트>는 내내 그 사실을 과시한다.

2.

카메라 무브먼트 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애초에 카메라의 운동성은 비서사적이고 언어가 담지 못하는 순간들까지 포착하는 힘이 있다. 카메라의 아름다움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다만 그래서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무엇을 찍느냐 만큼 중요한 것이 어떻게 찍느냐, 언제 카메라를 움직일 것인가에 달렸다. 왜냐하면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자의적인 것, 일종의 장식이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트래블링은 도덕의 문제다.” 단지 트래블링 뿐 아니라 트래킹, 클로즈업, 줌 모든 카메라 기술이 마찬가지다. 카메라가 움직일 때 세계도 함께 움직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적어도 서사적 기획이나 감독의 비전과 일치해야 한다. <레버넌트>의 초반부 닥쳐오는 피로감은 초반부 자기 과시의 카메라와 “포기하면 안 돼. 숨이 붙어있는 한 싸워야 해”라는 휴 글래스의 반복되는 비전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액션의 연결에 그토록 예민한 이냐리투는 두 가지 각기 다른 성질의 시퀀스들을 그저 덩그러니 옆자리에 배치했을 뿐, 서로 다른 카메라의 속도와 정서를 봉합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하긴 한다. 웅대한 산맥, 숲의 정적, 높은 하늘, 구름의 흩어짐 등 자연의 풍광을 서로 다른 톤의 시퀀스 사이 완충재로 제시한다. 일견 이 선택은 영리해 보인다. 미국 영화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 광활한 자연 풍경의 익스트림 롱숏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서사의 일부다. 끝없는 황야, 산맥의 위용, 아득하고 우거진 밀림의 풍경을 마주할 때 인물 중심의 서사는 왜소해지고 서사가 담을 수 없는 어떤 초월성이 그곳에 깃든다. 흔히 ‘거대한 자연 앞에 왜소한 인간’이라고 일컫는 관습적인 표현은 이를 담아낸 몇몇 영화들에게 허용되는 묘사다. 예를 들자면 위대한 서부극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같은 영화들 말이다. 그저 광활한 자연을 찍어 놓았다고 웅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서사 안으로 수렴될 때, 혹은 그 과정에서 미처 수렴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발생한다면 그 거대한 영감, 체험, 시청각적 충격이 바로 걸작에 깃든 자연의 숭고함이다. 얼핏 시청각적 충격의 효과가 유사해보여도 이 간극은 크다. <레버넌트>가 담아낸 혹독한 설원과 거친 물살, 아찔한 산맥도 기본적으론 이런 속성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기술은 중립적이다. 문제는 이 화면들을 어느 시점에 어떻게 붙여나가는가에 달렸다. 이 점에서 <레버넌트>는 또 다시 과잉의 수사에 빠져든다.

<레버넌트>는 장엄한 자연의 풍광을 그저 풍경으로 전락시킨다. 앞뒤의 이질적인 시퀀스들을 이어붙이는 완충재, 도구로 한정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냐리투 감독은 원래 유사 몽타쥬를 빈번하게 활용한다. 붙지 않아야 할 숏들마저 롱테이크로 붙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아들의 시체 앞에서 숨을 몰아쉬는 글래스의 입김은 클로즈업한 카메라 앞에 뿌연 성에를 만들고, 다음 장면에 거대한 산맥을 휘감고 지나가는 구름의 움직임이 이어지며, 곧이어 피츠제랄드가 내뿜는 담배연기로 바뀐다. 얼핏 보면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몽타주다. 하지만 여기에 영화를 관통하는 리듬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기계적인 연결은 카메라의 존재를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 외에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세르주 다네가 쓴 <카포의 트레블링>이란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예쁜 트레블링(여기서는 몽타주) 하나를 ‘추가로’ 새겨 넣었”을 뿐이다.

<레버넌트>에 죽음과 생존을 관찰하는 어떤 윤리가 있다고, 혹은 있어야 한다고 까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훌륭한 (카메라에 대한) 액션영화이며 관습적인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온통 장식투성이, 아니 장식이 본질보다 과하다면 그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다른 차원에서가 아니라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피로감(혹은 지루함)은 150분에 달하는 상영시간 때문도, 휴 글래스의 지난하고 악착스러운 여정 때문도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하는 카메라, 그리고 그 강박적인 움직임 때문이다.

3.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실질적인 절정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래스와 회색 곰의 사투다. 실존 인물 휴 글래스가 회색곰으로부터 치명상을 받고도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자부심의 근거다. 이냐리투는 이것이 진짜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장면은 종전에 보지 못한 방식으로 곰의 습격을 그린다. 진짜 곰의 습격 방식을 알 길이 없으니 롱테이크로 담아낸 이 격투 장면이 실제와 얼마나 유사할진 모르겠다. 하지만 철저히 고증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 장면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관능적으로 탐닉하는 쪽에 가깝다. “휴 글래스가 곰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이상하게도 성적 학대의 순간처럼 그려졌다”(1038호 <레버넌트> 기획 “운명을 거슬러 살아남아라” 중)는 정지혜 기자의 평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 장면이 그저 끔찍하고 무섭다고만 말하는 건 솔직하지 않다. 곰이 땅에 엎드린 그래스를 때리고 핥고 냄새를 맡는 동작은 실제로 곰의 사냥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에로틱하게 다가온다. 단지 행위의 유사함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를 관찰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포르노그라피의 그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포르노그라피의 핵심은 노골적인 탐닉이다. 어떤 가림도 없이 모든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 순간 카메라는 모든 걸 보여주겠다는 서커스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사실성을 쌓아올리기 위한 재현이라기보다는 이 진귀한 눈요깃거리를 전시. 곰의 습격이 끔찍함이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로 다가오는 이유다.

<레버넌트>는 카메라의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외설적’이다. 서사 바깥에서 기교를 뽐내는 카메라는 경외의 대상이어야 할 19세기 미국의 혹독한 풍광까지 그저 경치 감상쯤으로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체험 시키지 않고 관광 상품처럼 매끈하게 포장해 보여준다. 영화 속 끔찍한 장면들, 온 몸이 찢기고 부러져도 다음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휴 그래스의 모진 여정은 가혹하다기 보단 생경해 신기한 볼거리로 다가온다. 그의 처절한 심정에 동화 되는 대신, 뭘 저렇게까지 고생하나 싶어 일말의 동정마저 이는 것이다. 이는 단지 스크린 저편 안전한 자리에서 관람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레버넌트>는 생존을 위한 모든 몸부림을 대상화 시킨다. 아무리 자연광을 빌려 찍고 생생하게 재현해낸다고 해도 여기엔 베르너 헤어초크가 <아귀레, 신의 분노>(1972)에서 쏟아냈던 육체적인 질감, 피로, 가혹함이 없다. 없다기보다는 내 것이 아니다. 악조건 속에서 자연과 싸우고 살에는 바람 소리를 담은, 어쩌면 잔혹하다고 부를 만한 사실주의는 이 영화에도 있다. 그 기적 같은 감흥과 조우할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도취된 카메라 무브먼트로 모든 생생함을 흩어버린다.

<레버넌트>에서 인디언의 추적을 피해 살아남고자 강물에 몸을 던져 떠내려가는 그래스의 몸부림과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뗏목 위를 뛰어다니는 원숭이 떼와 함께 물살에 밀려가는 엔딩 장면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아귀레, 신의 분노>의 최후를 장식하는 거침없는 패닝 숏은 훨씬 역동적이지만 어디까지나 아귀레로 상징되는 인간의 광기에 초점을 맞춘다. 비현실적인 패닝 숏을 통해 세계와 분리, 정지 되어버린 시공간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시적인 언어의 압축이라 할만하다. 반면 <레버넌트>에서 그래스가 격류에 몸을 숨기는 장면은 그래스의 불안과 공포, 생존욕구보다 격류의 격렬함이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물살이 얼마나 가혹하고 거친지에 초점을 맞춰 흥미롭게 전시하는 것이다. 바로 뒤이어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어 붙는 겨울강의 싸늘한 풍광이 그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한 장면처럼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담아내야 할 것은 서사가 미처 품지 못한 자연의 웅장함, 숭고함들 이었건만 매끈하고 습관적으로 이어붙인 기계적 연결 탓에 편편한 자연 다큐의 자료화면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레버넌트>에는 조형적인 영상미는 있을지언정 현장감이 없다. 카메라가 기교를 부릴수록 우리는 포근하고 안전한 스크린 의자에 몸을 파묻고, 진기한 쇼를 감상한다.

4.

1036호 영화비평에서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를 긍정하기 위한 근거로 이 영화가 마련한 관객의 자리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오독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시카리오>가 스스로 영화라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고 관객의 자리를 마련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거리두기’가 반드시 윤리를 담보하는 건 아니다. 관객을 몰입시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다. 거리의 정도보다 중요한 것은 마련된 빈 공간에 무엇을 채워 넣을까 하는, 태도의 문제다. <시카리오> 역시 일정 부분 그 공간을 윤리적인 책임의 방기나 은폐로 재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레버넌트>만큼 직접적이고 심각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레버넌트>는 분명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그 매끈하고 매끈한 솜씨에 경도되어 순수한 운동이 주는 최상급의 아름다움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언젠가부터 이냐리투는 과장과 과시를 위한 수사들을 작품의 중심에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장식이 본질을 압도할 때 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장면의 순수성은 쉽게 왜곡된다. 특히 실화 또는 도덕적으로 민감한 사안일수록 이는 분명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때론 문제적 행위조차 아름다운 장식들로 미화되어 예술적 권위를 얻을 우려가 있다.

솔직히 <레버넌트>가 그 정도로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는 영화라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초반 강가 전투 시퀀스의 과장된 카메라와 곰과의 사투에서 보여주는 외설적인 방식을 동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레버넌트>의 서사는 곰의 습격을 받은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거꾸로 이냐리투의 영화는 그 순간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인다. 보여주고 싶을 걸 다 보여주고 한껏 달아오른 몸이 식은 후 남은 건 처절하지만 지루한 여정의 연장이다. 환상 속에서 그래스가, 아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무리 “숨을 쉬어라”고 반복해 강조해도 영화의 숨은 이미 진즉에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그리고 남겨진 건 생존 본능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충동. 어쩌면 영화가 빨리 끝나길 바랐던 나의 충동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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