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비평
[이용철의 영화비평]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캐롤과 테레즈가 떠나는 여정의 시작과 끝을 생각하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토드 헤인즈는 <캐롤>(2015)의 도입부에서 데이비드 린의 1945년 작품 <밀회>의 도입부를 정확하게 재연한다. <밀회>를 떠올려보자. 기차역 카페 귀퉁이에 알렉(트레버 하워드)과 로라(셀리아 존슨),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우연히 지나가던 여성이 여주인공 로라를 발견하고 다가와 친숙하게 말을 건다. 로라와 남자가 약간 당황해 하지만 그런 그들의 표정에 숨은 절박함에는 무관심한 듯 여자는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그 여정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인 줄 알았더라면 여자는 차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을 깨달은 알렉은 자리를 먼저 뜨면서 로라의 어깨 위로 손을 지그시 얹는다. 그가 떠나고 정신을 잃었던 로라는 기운을 차려 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교외의 아담한 집에서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두 아이가 그녀를 반긴다. 로라는 “이곳은 내 집이고 당신은 내 남편이며 내 아이들은 2층에서 자고 있어”라고 다짐한다. 이어 로라의 내레이션으로 플래시백이 이어지지만, 관객은 그녀의 짧은 관계가 이미 끝났음을 눈치챈 후다. 그녀의 귀가는 심리적인 안정과 함께 출구가 막혔음을 의미한다. <밀회>의 엔딩에서 로라의 남편은 “멀리 간 것처럼 보였는데 돌아와줘 고마워요”라며 로라를 껴안는다.

집, 억압과 공포의 공간

토드 헤인즈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집은 문제적 공간이다. 장편 데뷔작 <포이즌>(1991)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히어로>에서 아버지의 폭행을 견디며 살던 소년은 창문 밖으로 훌쩍 뛰쳐나간다. 날아가는 걸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에피소드는 소년의 엄마가 아이의 벅찬 비행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후 헤인즈 영화에서 남자주인공과 집은 대개 그런 관계를 맺는다. 남편들은 이혼하거나 바람을 피우면서 집으로부터 벗어난다. 반면 (결혼한) 여성은 집에 묶여 지내며 집이 위치한 지역사회는 억압적인 공간으로 기능한다. <파 프롬 헤븐>(2002)에서 캐시(줄리언 무어)는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다. 남편은 정상적인 남성성을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로 하고, 캐시는 다행이라 여기며 가정이 유지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고백하며 이혼을 요구한다. 한편 캐시가 흑인 정원사 레이먼드와 친분을 맺으면서 지역사회와 남편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현실과 꿈의 괴리를 인정하게 된 레이먼드마저 떠나고 그녀는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헤인즈가 만든 멜로드라마의 정점인 <HBO> TV시리즈 <밀드레드 피어스>(2011, 마이클 커티즈의 1945년 버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의 여주인공 밀드레드(케이트 윈슬럿)는 <캐롤>의 여주인공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닮았다. 물론 두 작품은 원작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것이지만 헤인즈의 작품 세계 안에서 더욱 근사하게 연결된다. 대공황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시기에 남편과 결별한 밀드레드는 자신과 두딸의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어린 딸이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뒤 밀드레드는 상류층으로의 진입을 갈망하는 큰딸의 욕망에 맞춰 희생을 거듭한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자신의 행위가 덧없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각각 1950년대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두 작품과 달리 현대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세이프>(1995)에서 집은 아예 공포의 공간이다. 캐롤(또 한명의 캐롤!)은 상류층의 삶을 사는 주부다. 집을 꾸미고 몸매를 가꾸고 이웃과 교류하는 게 일상의 전부인(그녀는 자신을 ‘홈메이커’라 여긴다) 그녀가 갑자기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 두통과 어지러움, 호흡 곤란, 구토가 계속되자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보지만 그도 별다른 진단을 내리지 못한다. 급기야 집의 공기와 냄새까지 괴로워져 불면을 호소하던 그녀는 저택을 떠나 외딴 요양 시설에 몸을 맡긴다.

헤인즈의 (멜로)드라마가 다뤄온 집과 지역사회라는 골칫거리는 더글러스 서크가 이미 1950년대에 간파했던 주제다. 각별히 서크의 1955년 작품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은 <파 프롬 헤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망인 캐리는 젊은 정원사 론과 사랑에 빠진다. 계급과 나이가 다른 그들의 관계에 지역 상류층은 물론 그녀의 두 아이들도 거부감을 표시한다. 캐리가 그을린 피부와 근육질의 몸에 반했을 거라고, 론은 돈과 지위를 노렸을 거라고 그들은 단정한다. 장성한 아들은 죽은 아버지의 유산인 집을 더럽히는 행위라며 어머니에게 따진다. 현실에 굴복해 론과 잠시 헤어졌던 캐리는 마침내 진실한 사랑을 찾아 그와 결합한다. 캐리는 자기 집을 떠나 론의 집으로 옮긴다. 흥미로운 건 숲속에 있는 론의 집이 보여주는 비현실성이다. 물레방아가 놓인 공간을 개조한 두 사람의 거처는 너무 낭만적이어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랑을 맹세하는 두 사람 너머로 시선을 이동해 바깥 풍경을 전한다.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거대한 창을 통해 멀리 호수가 보이고 눈이 쌓인 정원으로 사슴이 찾아오는 곳. 서크는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관계임을 알기에 ‘천국’이라 제목을 붙였고, 헤인즈 또한 ‘천국에서 아주 멀리’ 위치한 현실에서 멜로드라마는 험난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길, 목적지 없이 떠나다

다시 <캐롤>의 도입부로 돌아가야 한다. <밀회>에서처럼 캐롤과 테레즈가 작별을 고하는 자리에 제삼자가 다가온다. 두 여성의 안타까운 심정을 알 리 없는 남자는 테레즈에게 저녁 약속을 일러준다. 캐롤이 먼저 떠나며 (<밀회>의 알렉처럼) 테레즈의 어깨 위로 살며시 손을 얹는다. 여기까지는 동일하다. <밀회>에서 로라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했다면, <캐롤>은 다음 장면을 생략한 채 택시에 탄 테레즈의 모습으로 문득 이동한다. 어디론가 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데,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적어도 집은 아니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길은 미래의 가능성이기에 <캐롤>은 결말을 열어둔 채 이야기를 진행한다(원작 소설의 구성과도 다른 부분이다).

헤인즈는 <포이즌>의 세 에피소드가 띠는 성격에 맞춰 각각 다르게 촬영을 진행했다. 그런 태도는 <파 프롬 헤븐> 이후 촬영감독 에드워드 라크만과 연달아 작업해 오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매 작품의 시대 배경에 따라 적절하게 시도된 촬영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캐롤>은 이상하다. 작품별로 35mm와 16mm 필름 사용을 병행해온 헤인즈는 <캐롤>을 16mm로 먼저 찍은 후 35mm로 블로업했다. 그렇게 작업된 <캐롤>의 톤은 시대 배경을 공유하는 다른 1950년대 영화들의 그것과 적잖은 차이를 보인다. 헤인즈의 영화와 비교해도 이상하다. 예를 들어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파 프롬 헤븐>의 아름답고 인위적인 색감과 비교해 느낌 자체가 다르다. <캐롤>의 사실적인 톤은 이 영화를 1970년대 할리우드영화와 연결짓도록 만든다. <캐롤>을 보다 마이클 채프먼, 라즐로 코박스, 빌모스 지그몬드가 촬영한 영화와 재회하는 것 같았다면 그건 나의 착각일까. 더욱이 캐롤과 테레즈가 길을 떠나면서 진행되는 버디무비의 형태는, 1970년대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특히 남성 버디무비를 연상하게 한다. 현실의 무게를 버티다 못한 캐롤은 테레즈에게 서부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그들이 가는 길은 1970년대 남성 버디무비에서 남자들이 걸었던 길을 뒤집는다. <이지 라이더>(1969), <미드나이트 카우보이>(1969), <허수아비>(1973), <마지막 지령>(1973), <대도적>(1974), <개 같은 날의 오후>(1975)에서 잭 니콜슨, 헨리 폰다, 데니스 호퍼, 더스틴 호프먼, 존 보이트, 알 파치노, 진 해크먼, 오티스 영, 랜디 퀘이드,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프 브리지스는 둘셋씩 짝을 지어 세상을 떠돈다. 평론가 몰리 하스켈이 썼던 바 이들 영화의 출현은 어쩌면 1960년대 여성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읽힌다. 여성이 이야기에서 거의 제거된 영화는 남성의 우정에 집중했다. 단, 이들 영화는 비겁했다. 위에 열거한 영화의 대다수에서 동성애의 약호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성에게 흥미를 잃은 이성애자인 양 행세한다. 스스로를 속인 그들이 결국 도착하는 곳이 ‘거대한 공허’인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들의 비겁한 태도는 가족과 여성 관계에 무책임한, 그래서 항상 비참한 상황에 빠지는 헤인즈 영화 속 남성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1950년대 여성인 캐롤과 테레즈가 서쪽으로 떠나는 여정은 1960년대의 여성운동에 허무하게 맞섰던 남성 버디무비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캐롤>을 포함한 대부분의 헤인즈 영화를 제작해온 사람이 크리스틴 바숑임을 기억해보면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다.

천국,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순간

멜로드라마와 보통의 러브스토리가 다른 건 장애와 그 장애를 넘어설 길을 찾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계급과 인종의 장벽을 넘어온 연인들은 이제 동성애라는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선다. 기억하라, 이건 1950년대의 이야기다. 그들은 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길을 떠났던 캐롤과 테레즈는 여정 도중 돌아온다. 그리고 헤어진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의 대사를 따르자면, 그들은 연애(love affair)할 준비는 되었지만 사랑(love)할 준비가 덜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과 상대방에게 진실한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주변 상황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내몬다. 길을 떠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어디로 돌아올지 결정하는 것이다. 길의 한 끝에는 그들이 돌아갈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 집은 결혼 같은 사회적 제도에 의해 주어진 집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원작 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두 사람은 ‘광기 서린 폭군처럼 내달리지만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장난감 기차 신세였다. 벗어날 수 없기에 미쳐버린, 이미 숨이 끊겼기에 지칠 수도 없는 신세였다.’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게 쉽다면 진정으로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캐롤은 마침내 집을 떠나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고 테레즈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테레즈가 거절한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도입부를 다시 떠올려보자. 캐롤과 테레즈는 그들 곁으로 다가가는 제삼자의 시선 아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시선을 빌려 두 여성을 처음 보았다. 대화를 나누고 캐롤이 테레즈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에도 그들은 타인의 시선 아래 움직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았다. 그들을 억압한 건 바로 그 시선이다.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가 땅에서 발을 뗀 듯 갑자기 울렁거린다. 그것은 곧 캐롤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테레즈의 마음이자 시선의 표현이다. 이윽고 캐롤이 미소를 지으며 테레즈를 바라본다. 그 순간 캐롤과 테레즈는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온전히 그들만의 눈으로 테레즈가 캐롤을 바라보고 캐롤이 테레즈를 본다. 소설은 캐롤과 테레즈의 미래를 그리기를 ‘두 사람은 천개의 도시, 천개의 집, 천개의 외국 땅에서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같이 갈 것이다’라고 했다. 하긴, 축복받은 광기인 사랑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지옥에 간들 무엇이 두렵겠나.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