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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필성의 영화비평] 장르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는 데 성공한 <클로버필드 10번지>
임필성(영화감독) 2016-04-26

<클로버필드 10번지>

<클로버필드 10번지>와 혈연관계라고 제작진이 주장하는 <클로버필드>(2008)는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준 새로운 스타일의 장르영화였다. 주로 저예산 호러나 오컬트영화에 활영되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을 대규모 괴물 SF물에 접목한 시도는 꽤 영리했고 효과적이었던 것. 특히 괴물의 존재를 영화 내내 간접적으로 묘사하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관객이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처리한 순간은, 제작진의 장르영화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나를 포함한 <클로버필드> 팬들은 그 후속편을 열심히 기다렸지만 5년, 7년이 지나도 <클로버필드2>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8년 만에 등장한 <클로버필드 10번지>. 전작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이나 무명배우 캐스팅, 대규모 재난영화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진 예고편은 역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나 존 굿맨 같은 멋진 배우들의 존재, 외부의 무시무시한 위협을 피해 방공호에서 진행되는 얘기라는 정보는 장르팬들을 흥미롭게 하기에 충분한 조건으로 보였다. 하지만 감독인 댄 트라첸버그는 단편 몇편의 필모그래피가 전부인 신인감독이며 각본가들 역시 <위플래쉬>의 데이미언 셔젤을 제외하면 편집 어시스턴트와 제작 보조의 경력을 가진 무명 작가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왠지 불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21세기 블록버스터 속편들의 흥행사이자 장르물의 마스터인 제작자 J. J. 에이브럼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식의 조 편성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과 우려는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깨지기 시작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나아가다

히치콕풍의 서스펜스 가득한 음악이 들려오며 주인공 미셸(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이 급하게 짐을 챙기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연다. 대재난의 불길한 전조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풀어가는 전반부. 그녀의 방엔 패션 디자인한 스케치들이 보이고 커플 사진과 몰트 위스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커플링을 빼버린 채 불안한 표정으로 무작정 집을 떠나는 여주인공. 우연히 들른 주유소에서 백미러로 보이는 낯선 운전자의 존재 등 납치호러영화의 익숙한 클리셰들이 펼쳐지며 갑작스런 차 사고와 함께 커다랗게 뜨는 타이틀. 미셸이 눈을 뜨는 곳은 한 지하 방공호 안이다. 이 장소의 주인인 예민한 인상의 중년 비만남, 하워드(존 굿맨)의 등장. 에밋(존 갤러거 주니어)이라는 미국 시골의 평범한 젊은이도 이 미스터리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이건 장르팬들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설정이다.

<클로버필드>의 파운드 푸티지 외피에서 지극히 레트로적인 고전 장르영화의 스타일로, 대형 재난영화의 묘사에서 둠스데이 벙커라는 폐쇄 공포증적인 협소한 공간으로, 파티에서 만난 일군의 인간들이 특별한 주인공 없이 다중으로 끌고 가던 이야기를 단 세명의 주요 캐릭터가 등장하는 실내극 혹은 밀도 높은 연극 같은 세팅으로 뒤바꿔버린 속편이라니. 제작진이 주장하는 같은 혈연의 영화라는 떡밥도 전작의 시간대나 세계관을 공유할 뿐 개별적인 영화라고 해도 크게 상관없는 팩트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가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와 상관없는 제목의 영화로 나왔다면 장르팬들이 이토록 열광적인 관심을 보이며 기다리는 영화가 되지는 않았을 것. 배드 로봇과 J. J. 에이브럼스는 장르영화를 어떻게 마케팅해야 하며 브랜딩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간악한 흥행술사들이다.

그렇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전작의 외피와 내용을 순식간에 리부트하며 관객을 방공호 안의 세명에게 몰입하게 만든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는 <더 씽> 후속편의 히로인, <데쓰 프루프>(2007)의 위험한 치어리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2006)의 스크림걸답게 건강한 몸매와 영민한 두뇌, 순진무구한 마스크로 훨씬 섹시하고 매력적인 21세기의 시고니 위버로 탄생했으며 존 굿맨은 특유의 다층적인 연기로 <바톤 핑크>(1991)의 사이코 살인마적인 예민한 섬뜩함과 <몬스터 주식회사>(2001)의 설리반의 푸근함으로 양공작전을 펼친다. 그 결과 <캐빈 인 더 우즈>(2012)가 전형적인 미국 시골 조난 호러의 외피를 쓰고 장르영화의 미지의 영역까지 탐험을 떠난 것처럼 <클로버필드 10번지> 역시 납치 호러에서 실내 심리 스릴러로, 재난 극복 매뉴얼 영화에서 외계인 침공 SF와 성장영화로까지 박진감 넘치게 나아간 것이다. 영화제에 출품했다면 왠지 선댄스와 시체스에서 동시에 화제작이 될 법한 이 절묘한 하이브리드 전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탐험이 필요한 한국 장르영화

21세기 초의 어느 시점에 영화광과 감독, 제작자는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나 장르 혼합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꼈으며 고문 포르노 장르나 파운드 푸티지물을 그 대안으로 생각했던 시점이 있었다. 하지만 <환상특급> <닥터 후> 시리즈와 1980~90년대의 온갖 장르물의 홍수 속에서 자랐던 새로운 영화 세대는 기존의 공식을 전복시키고 해체하며 새롭게 발명해내는 단계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메인 메뉴로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를 쏟아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엔 <스포트라이트>나 <룸> 같은 정통 드라마를, 또 한편엔 <클로버필드 10번지>나 <캐빈 인 더 우즈> 같은 독창적인 하이브리드 장르영화의 탐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영화의 불모지로 함부로 매도됐던 인도네시아에서조차 캐나다 제작자와 웨일스 출신 감독, 인도네시아 액션 스타와 제작진으로 <레이드> 시리즈를 근사하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 장르영화의 요즘 상태가 꽤나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걱정은 아닐 것이다.

<클로버필드 10번지>를 두 번째 관람하고 극장을 나올 때, 일군의 관객은 영화의 엔딩에 아연실색하며 이런 식의 말들을 했다. “도대체 이 영화 정체가 뭐야? 스릴러야? SF야?” 파격적이고 신선한 장르영화에 대한 매혹은 여전히 이곳에서는 소수의 취향인 것일까. 미국과 여타 시장에서의 흥행 성공과 극찬에 가까운 평가와 달리, 한국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가 성공적인 아트하우스영화 정도의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장르영화 팬 입장에선 꽤 안타깝다. 조금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아 보이는 스토리와 하이브리드 장르의 작품이라 해도 영화 제작자들은 탐험을 떠나야만 한다.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무명 작가들과 감독이 미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제작자와 함께 이루어낸 무척 신선하고 파괴력 넘치는 도전이다. 그 도전은 통쾌하게 성공했으며 배드 로봇과 댄 트라첸버그는 또다시 미지의 어느 곳으로 위험한 여행을 떠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정체를 쉽게 가늠할 수는 없지만, 새롭고 도발적인 매력이 넘치는 한국영화를 기다리고 또 꿈꿔본다. 바로 <클로버필드 10번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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