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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영화비평] <크로닉>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

<크로닉> 무엇이 충돌하는가

※결말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크로닉>

<크로닉>은 무시무시한 충돌 이미지로 끝나는 영화다. 결말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크로닉>은 결말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결말의 충격적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곧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팀 로스)의 조깅 장면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끝맺는다. 데이비드를 마주 본 자리에서 그가 다가오는 만큼 후진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난 차에 치여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멈춘다. 그와 함께 관객의 사유 역시 그 순간에 붙박인다. 이것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의 흐름을 일거에 무너뜨린 뒤 결말 그 자체에 모든 것을 수렴시켜버리는 무책임한 마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강렬한 결말이라고 해도 그 강렬함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왜 그런 충돌 이미지가 필요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그것만이 이 단순해 보이는 결말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꼼꼼히 들여다보자. 이 장면에서 데이비드의 충돌은 그의 선택인가 사고인가. 조깅 장면에서 데이비드의 시선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집중해보면 데이비드는 차가 오는 쪽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차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자동차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시선을 돌리는 것인지, 부딪히기 위한 정확한 타이밍을 보고 있는 건지는 다른 문제다. 차에 부딪히기 직전 데이비드의 시선이 차가 오는 쪽을 향해 있었던 바, 충돌은 그의 선택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그러나 사고인가, 선택인가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결말이 충격적인 것은 데이비드의 사라짐(죽음)이라는 서사의 맥락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강렬한 충돌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때 충돌은 서사적 맥락을 벗어나 충돌 그 자체를 감각하게 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서사적 맥락이 아니라 충돌 그 자체에 두어야 한다.

충돌의 몽타주

결말의 충돌을 기점으로 삼아 다시 극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충돌 이미지는 단지 결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연결하는 방식 속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숏과 숏을 충돌시키는 충돌의 몽타주는 데이비드가 첫 번째 환자인 새라(레이첼 피컵)를 돌보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의자에 가만히 앉은 새라의 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숏 사이에 운동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끼워넣는다. 숏의 배치로 인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데이비드의 운동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음향은 대립을 더욱 강조한다. 소리가 거의 없는 정적인 숏으로부터 기계음, 투박한 발소리, 숨소리가 뒤섞인 숏으로의 점프는 공포영화에서 갑자기 나타난 귀신처럼 관객을 각성시킨다. 그러나 단순히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이 이 충돌 몽타주의 목적은 아니다. 영화는 달리는 데이비드의 몸을 오랫동안 전시하면서 몸에 대한 사유를 강요한다. 이때 데이비드의 몸은 새라의 몸과 대조적인 동시에 어딘가 비슷한 연결점을 지닌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몸을 가눌 수 없는 새라의 몸과 마찬가지로 러닝머신 위에서 데이비드의 몸은 기계의 흐름에 의지한 무력한 몸으로 드러난다. 데이비드의 몸은 마치 재활 훈련을 하는 또 다른 환자처럼 보인다. 이렇듯 충돌의 몽타주는 서로 대립하는 몸을 부딪치게 하는 동시에 그 둘을 연계시킨다.

<크로닉>의 충돌 몽타주는 정확히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을 가리킨다. ‘A+B=C’라는 공식으로 요약되곤 하는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은 풀어 말하면 대조적인 이미지를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일 텐데 이 공식은 중요한 지점 하나를 생략하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은 단순히 대조적인 숏을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돌을 통해 대조적인 숏이 공유한 기반을 드러낸다. 에이젠슈테인은 그것이 변화하고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숏을 하나의 세포로 인식한다. 연결된 숏은 대립과 충돌을 통해 서로를 변화시키는 두항이다. <크로닉>은 충돌되는 것이 공유한 기반과, 충돌된 숏이 어떻게 서로를 재인식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환한다. 정적과 움직임은 피로감이라는 기반을 공유하며, 이 둘의 충돌은 서로에게 움직임과 부동성을 각각 선사한다.

충돌은 같은 대상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 다른 방식을 거치며 분화한다. 영화는 환자의 몸과 데이비드의 몸을 만나게 할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심리를 충돌시킨다. 두 번째 환자인 건축가 존(마이클 크리스토퍼)의 가장 큰 특징은 포르노에 탐닉한다는 것이다. 존의 성적 욕망은 생(生)의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반면 뒤늦게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 세 번째 환자 마사(로빈 바틀릿)는 오랜 치료 기간을 견디는 대신 죽음을 원한다. 이들의 대조적인 반응은 죽음에 맞선 신체와 정신의 분리된 욕망을 그려보게 한다. 사람을 서서히 죽여가는 불치병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던 신체와 정신을 돌연 충돌시킨다. 신체는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정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존은 신체와 정신이 서로 화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공존을 선택한 경우다. 신체는 자신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성욕을 정신이 여전히 갈망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정신 역시 신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욕망을 살게 한다. 반면 마사는 신체에 맞춰 정신 역시 죽음을 욕망하는 것으로 급격히 변해간다. 충돌한 신체와 정신은 하나가 다른 쪽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공존하거나 공멸한다.

충돌은 숏과 숏, 인물과 인물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충돌의 흔적은 이를테면 데이비드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마사가 구역질 소리와 함께 입에서 뿜어낸 토사물 같은 것이다. 인물 내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외부의 충돌만큼이나 강력한 내부의 충돌을 가리킨다. 배변 활동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작용했던 내부 기관들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그 순간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이비드의 존재는 순간의 충격을 흡수하는 동시에 강화한다. 그러니까 충돌의 강렬함은 강렬한 이미지가 아닌, 무력한 이미지와 다른 무력한 이미지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다. 죽음은 부동의 정적이 아니라 뒤흔드는 충돌이다. 숏이 다른 숏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세포분열 방식이 이 충돌 몽타주에 깃든다.

멕시코식 삶과 죽음의 논의

말년을 멕시코에서 보낸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에 대한 찬가인 다큐멘터리 <퀘 비바 멕시코>(1979)를 만들었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미지의 장소인 멕시코를 신비화하는 경향이 다분한 <퀘 비바 멕시코>는 명백한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 대한 통찰을 지닌 다큐멘터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에이젠슈테인은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을 죽음으로 장식하며 멕시코인에게 죽음과 삶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한다. 내겐 <크로닉>이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비밀스러운 답가라고 여겨진다. 미셸 프랑코는 에이젠슈테인이 지적한 멕시코식 삶과 죽음의 논의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에 되돌려준다. 영화에서 부딪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삶과 삶, 즉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삶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존재해야지만 지탱 가능한 피로한 삶이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부재를 드러내는 삭막한 풍경을 헤아리기보다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음을 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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