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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혜경의 영화비평] <곡성>의 ‘게임의 규칙’과 그것이 은폐하는 것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곡성>

<곡성>의 줄거리를 명쾌하게 정리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에게 실망을 안겨줄 예정이다. 아니, 지금 당신이 무명(천우희)이 누군지, 일광(황정민)과 일본인(구니무라 준)이 정말 한패인지, 일광이 날린 굿판의 살이 어디로 향하는지, 일본인은 정말 악마인지, 사람들은 결국 왜 죽어나가는 건지 친구와 논쟁을 벌이며 인터넷을 전전하고 있다면 그 노력도 잠시만 내려놓아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에 말려들어 영화 속 파편적 상징들을 (나홍진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끼워맞추기 시작하면 당신은 나홍진이 던진 미끼를 물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미끼를 삼켜버리면 되지’라고 큰소리칠지 모르지만 관객의 자리는 생각보다 그리 자유롭지 않다. 이 불공평한 게임에서 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곡성>이 거는 ‘게임의 규칙’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아야 한다.

종구의 두 번째 꿈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곡성>에서 종구(곽도원)는 세번의 악몽을 꾼다. 그런데 이 꿈들은 좀 이상하다. 첫 번째 꿈은 정전된 파출소에서 근무를 하던 종구가 경찰서 앞에 찾아온 ‘미친 여자’를 목격한 날 밤에 일어난다. ‘쌍년’이라고 소리를 치며 잠에서 깨는 종구의 모습뿐인 이 꿈에서 영화는 이 ‘쌍년’이 누구인지, 그리고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직전 신에서 그가 ‘미친 여자’를 보고 자지러지듯 놀란 장면과 연결해놓음으로써 어렵지 않게 종구의 꿈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꿈부터다. 정육점을 하는 친구가 일본인에 대한 소문을 늘어놓는 장면이 끝나면 사건 현장 앞에 종구와 동료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화면 오른쪽에서 무명이 계속 돌을 던지고 있다. 동료가 자리를 뜨자 무명은 종구에게 그 ‘미친 여자’가 어떻게 가족들을 살해했는지 이야기해준다. 잠시 종구가 전화를 받는 사이 무명은 사라지고, 뒤를 잇듯 악마의 형상을 한 일본인이 등장해 종구를 덮친다. 이때 종구가 지르는 비명은 다음 숏, 그러니까 그가 악몽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두 번째 꿈에서 영화는 종구의 꿈이 시작되는 지점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무명을 만나는 신 전체가 모두 꿈인지, 아니면 일본인을 만나는 것만 꿈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지점은 <곡성>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다. 이전까지 종구의 시선을 고스란히 따라오던 영화가 이 지점에서 관객과 종구 사이에 틈을 만들어내며 ‘게임’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출근한 종구를 향해 소장은 ‘있지도 않은 목격자 타령’을 했다며 시말서를 쓰라고 다그친다. 종구가 봤다고 주장했을 ‘목격자’ 무명은 꿈에서 본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만난 것일까? 꿈의 주인인 종구는 알 테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세 번째 꿈으로 넘어가면 사태는 더 복잡해진다. 일본인을 찾아가 곡성을 떠나라고 엄포를 놓고 온 종구는 병원에 다녀온 딸 효진(김환희)의 상태가 어떤지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 밤이 찾아오면 일본인이 자신의 집에서 주문을 외우는 장면이 등장하고, 뒤이어 온몸을 비틀며 가위에 눌린 채 꿈에서 겨우 깨어나는 종구의 모습이 보여진다. 두 번째 꿈과는 정반대로 이 꿈에서 영화는 (종구 몰래) 우리에게만 종구의 악몽이 일본인의 주문에 의한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말하자면 나홍진은 서로 다른 세번의 꿈을 반복하면서 종구는 알고 우리는 모르는, 반대로 종구는 모르지만 우리는 아는 상황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장르영화에서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알고-모르고 게임’은 중요하다. 긴장과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기본 구조가 바로 관객과 벌이는 이 게임이기 때문이다.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나홍진이니 이와 같은 다이내믹을 등장시킨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안 것’의 자리에 ‘안다고 착각한 것’을 슬쩍 바꿔치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꿈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안다고 믿는’ 우리는 정말 종구의 고통스러운 악몽이 일본인의 주문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주문을 외우는 일본인의 모습이 종구가 잔인하게 죽인 개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 ‘가설’을 반박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곡성>은 관객이 이러한 착각에서 깰세라 이때부터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어지럽게 하여 홀린다는 뜻의 ‘현혹’(眩惑)은 나홍진이 관객을 향해 던지는 경고가 아니라 사실 그가 이 영화에서 쓰고 있는 반칙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이때 ‘현혹’의 정점에 놓인 것이 바로 모든 이들이 지적하는 두번의 교차편집 장면이다.

일광의 굿과 고통스러워하는 효진, 의식을 행하는 일본인, 그리고 죽어 있다가 스멀스멀 살아나는 시체가 어지럽게 교차되는 이 장면의 의미는 많은 이들이 납득할 만한 해석을 내놓았으니 따로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여기서 종구가 자신의 집에서 행해지는 굿 이외의 다른 사건들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이 교차편집에서 일본인과 박춘배의 숏들이 다 사라지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가 종구가 아는 만큼만 알고 있다면? 일광의 굿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것이 딸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혹적 교차편집을 통해 두 개의 이야기를 엮어놓음으로써 관객은 (종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일광의 숨은 진의를 의심하고, 일본인의 뜻밖의 선의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제까지 이 장면의 의아함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흔적들 말고) 논리적 증거도 명확히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관객의 혼란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나홍진은 인터뷰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게 일부러 만들었으며, 이것이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장르적 쾌감이 아니라 말초적 허영을 자극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실제로 이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희미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상(殘像)들만 붙잡고 뭔가 안다고 착각하는 허영을 즐기기 시작한다. 여기에 한몫하는 것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은유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장치들(세번의 닭 울음소리, 악마가 영혼을 빼앗기 위해 사용하는 카메라 등)이다. 한 인터뷰에서 나홍진은 이러한 장치들에 대해 묻는 관객의 질문에 “네, 그런 거 맞습니다. 짜치죠. 인정합니다”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는데, 이때 우리는 은유의 ‘퍼즐 조각’을 맞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 이러한 적당한 재밋거리를 던져줌으로써 영화가 무엇을 은폐하려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곡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

이러한 맥락에서 <곡성>의 엔딩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해도 영화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일본인이 악마로 환생 혹은 현현(顯現)한 것인지 (소설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8km밖에 남지 않은 곡성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오던 일광이 왜 동이 터서야 종구의 집에, 마치 딴사람처럼 등장하는 것인지 (소설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영화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이 모든 사건의 가해자(들)가 ‘원하는 대로 보라’는 무책임한 태도로 침묵하니, 오롯이 남는 건 (결과적으로) 잘 알지 못한 탓에 어리석은 선택을 해 가족을 모두 잃은 피해자 종구뿐이다. 정신을 놓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괜찮여. 우리 효진이, 아빠 경찰인 거 알제? 아빠가 다 해결할 겨”라고 되뇌는 종구를 보며 종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기기만에 빠진 관객은 ‘나는 종구 같은 피해자는 되지 않을 것’이라며 안전하게 극장을 빠져나온다. 악의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엔딩에 나는 어떻게 해도 동의할 수가 없다. 이것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주목하고 싶다고 했던 연출 의도의 발현이라면 더더구나 그렇다.

영화의 시작에 사용된 누가복음 24장 바로 앞, 23장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장34절) 지금 이 시점, <곡성>을 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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