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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의 영화비평] <곡성>이 벌이는 그럴듯한 거짓말과 자기기만의 굿판
송경원 2016-06-07

<곡성>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곡성>을 본 후 뇌리를 맴돌던 감흥은 그 정도였다. 나홍진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강렬한 에너지가 그 안에 꿈틀대는 것 같았지만 그 이상으로 파고들어 가 의미를 뒤적여보고 싶진 않았다.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그럴 필요가 없는 영화라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걸로 역할을 다한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도 명확해 더이상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다. 또 어떤 영화는 스크린 바깥까지 생명을 연장한다. 이런 영화들은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을 장면 속에 녹여낸다. 같은 장면을 두고도 서로 다른 감흥이 이어져 각자의 해석을 비교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혹은 불가능할) 의미를 언어로 다시 옮겨 담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가 발생하기도 한다. 대개 비평이 사랑하는 건 이 두 번째 범주의 영화들이다. 물론 스크린의 불이 꺼진 후에도 이야기가 이어지는 영화들은 또 있다. 플롯의 정교한 트릭을 활용해 이야기를 흩어놓았기 때문에 정리가 필요한 영화들이다. 관객과 치열한 심리게임을 하거나 중층적인 플롯을 활용하는 스릴러영화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여기에 속한 영화들은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빈칸이나 함정을 만들어 관객에게 게임을 제안하고, 장르 팬들은 영화 속 숨겨진 요소들을 찾아내 요리조리 조립하면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곡성>은 어디에 속하는 영화일까. 처음엔 세 번째 부류에 속할 거라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를 둘러싼 무수한 해석이 쏟아졌고 관객은 각 장면, 혹은 장면들의 연결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다. 진짜 악이 누구인지, 누가 누구와 같은 편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적어도 내가 들은 해석들은 하나같이 그럴듯했다. 자칭 <곡성>의 가이드가 되어 순서를 재조립한 장면들을 증거로 들이밀며 각자의 독해력을 자랑하는 이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감독은 이를 두고 열린 결말을 지지한다며 멀찍이서 관망 중이다. 여느 때라면 영화를 중심에 둔 이 설왕설래의 현장에 가슴이 두근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영화는 의미 있는 공백을 남기고 이 공백을 메우려는 관객 각자의 반응에서 또 다른 의미가 피어나기 마련이다. 전혀 다른 해석들이 동시에 성립하는 상태를 보고, 어쩌면 <곡성>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영화가 아닐까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나의 첫인상, 불쾌함과 끔찍함의 정체를 정확하게 설명한 글은 좀처럼 만나지 못했지만 들끓는 에너지를 이끌어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겠거니 하고 덮고 넘어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곡성>의 미로에 빠져들고 싶지 않아 무언가 말하기를 포기했다. 분명 삼킬 수 없는 것들이 목구멍에 걸려 있었지만 제대로 이야기할 자신이 없어 묵인했다 봐도 좋다.

뒤늦게 다 타버린 <곡성>의 흔적을 뒤적여보기로 결심한 건 나홍진의 인터뷰 때문이다.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씨네21> 1054호)는 그의 설명을 듣고 내 불쾌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진심일까? 진심이라 해도 이 발언이 진실일 수 있을까? <곡성>을 둘러싼 반응과 해석의 말들을 아무리 주워 모아봐도 공허함이 메워지지 않는 건 영화가 전파하는 감정이 애초부터 황폐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분란을 부추기는 듯한 나홍진의 방관자적 발언들은 이 미로가 애초에 어떤 악의를 가지고 지어졌는지 가늠케 하는 중요한 단서다. <곡성>은 스크린 바깥에서 해석과 반응을 끊임없이 자아내지만 앞서 언급한 두 번째, 세 번째 분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영화다. 이전엔 접해본 적 없는 형태라는 점에서는 독창적이랄 수도 있는데, 그 끝에 남겨진 것이 나홍진 본인이 설명하는 인간적인 감정은 아닌 것 같다. 아니, 특정 형태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끝없는 불신과 회의의 ‘과정 유도’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현혹되지 말라’는 경고는 이제부터 당신을 현혹시키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오프닝을 장식한 누가복음 24장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는 경고.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간극. <곡성>의 모든 트릭과 기만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트릭을 걷어내면 무엇이 남는가

긍정적인 해석이든 부정적인 지적이든 가릴 것 없이 동의하는 지점은 이 영화가 뚜렷한 설명 없이 모호한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열린 결말을 외치며 관객의 참여를 독려하는 영화는 대개 그렇다. ‘인간은 과학이든 종교든 소문이든 현혹의 틀이 없으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중 ‘<곡성> 카오스의 공포와 코스모스의 폭력’)는 이동진 평론가나 ‘<곡성>의 세계는 답이 없고 어떤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단서들만 있는 곳’ (‘듀나의 영화낙서판’ 중 <곡성> 리뷰)이라는 듀나는 공통적으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모호함이 긍정과 부정의 근거로 동시에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에선 모호하기 때문에 여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성찰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모호함 자체가 어떤 전략에 불과하다고 선을 긋는다.

이는 <곡성>이 특정 장면을 놓고 각기 다른 해석의 근거로 끌어들이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호함은 그 말 그대로 중립적인 요소다. 만약 그것이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을 지칭한다면 이미지와 소리의 조합으로 또 다른 표현을 시도하는 형식(여기서는 영화)은 곧 말해질 수 없는 감흥과 순간을 표현하는 형이상학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대체로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형식들은 필연적으로 관객에 의해 주도되는 해석, 모호함을 각자의 감흥과 연결시키는 과정을 동반한다. 여기에는 대전제가 하나 있다. 모호함이란 어디까지나 표현의 한계로서 모호함(은유법을 동원하는 것과 같은)이지 감흥 자체의 모호함은 아니란 점이다. 창작자가 느낀 감흥이 있고, 그것이 언어를 넘어선 형태로 발현되며, 그때 모호한 지점은 관객 각자의 인식 틀을 기준으로 해석된다. 해석은 다양할 수 있어도 본질은 하나다. 이야기 자체가 형편에 따라 모습을 바꿔선 안 된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분류를 기준으로 한다면, 적어도 두 번째 분류에 속하는 영화들은 그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은 감독의 인식을 구현한 영화라기보다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종의 게임처럼 보인다. ‘관객은 실제로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희미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상들만 붙잡고 뭔가 안다고 착각하는 허영을 즐기기 시작한다’(<씨네21> 1056호 영화비평 ‘곡성의 게임의 규칙과 그것이 은폐하는 것’)는 우혜경 평론가의 견해에 십분 공감한다. 다만 나는 <곡성>이 세 번째 분류, 그러니까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장르영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보의 격차와 반전 등의 트릭을 활용해 관객과 줄다리기하는 영화들도 플롯의 제일 마지막 순간에 가선 스스로의 패를 밝힌다. 적어도 이것이 트릭이었다는 것을 알려줄 때 내러티브적 마술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것이 최소한의 룰이다. 하지만 <곡성>의 개별 장면은 소름끼칠 정도로 매끄러우면서도 정작 시퀀스끼리의 인과관계는 배척한다. 우연 또는 운명이라는 변명 아래 무작위로 생략하거나 연결고리 없이 갑자기 들이밀며 당신이 속았음을 강조할 뿐이다.

영화가 플롯을 구성하는 것은 모든 장면, 모든 순간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별을 구성하며 특정 장면들을 점찍어 보여주면 관객은 각자의 인식론에 근거한 인과관계를 구성하며 점과 점 사이를 메운다. 우리는 이것을 ‘플롯’이라고 부르며 영화 내러티브의 방식으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곡성>은 시퀀스 내부로의 플롯은 매우 정교하되,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를 통해 이를 부정하고 조각조각 해체해버린다. 모두의 관심을 모았던 일광(황정민)과 외지인(구니무라 준)의 굿판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장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나름 흥미롭다. 굿판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두고 몇 가지 이견이 오갔지만 최종적으로는 일광과 외지인이 맞서는 장면이 아니라 합심하여 소녀를 괴롭히는 장면으로 정리된다. 팽팽한 교차편집은 그것만으로 어떤 위태로운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엔딩에 이르면 갑자기 당신이 목격한 진실과 감흥들은 실은 모두 트릭이었다며 기억에서 지우라 명령한다.

관객은 정말 이 장면에서 깜박 속아 넘어간 걸까. 당신이 본 것을 진정 내러티브적 트릭이라고 할 수 있나. 이 시퀀스만 놓고 본다면 일본인과 일광의 대결이야말로 실체적인 진실이며 서로에게 칼끝을 향한 편집 속에서 격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대뜸 엔딩에서 이 장면을 다시 조각내어 다른 시퀀스와 이어 붙여버리는 것이다. 내가 본 것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 목격한 것을 부정하고 들은 것(소문)에 휘둘리게 하는 것, 말하자면 ‘자기기만’의 과정이야말로 <곡성>을 관통하는 작동 원리다.

이것을 모호함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모호함은 설명되지 않지만 거기에 무언가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일련의 트릭들을 걷어내고 난 <곡성>에 무엇이 남겨져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니 내가 보고 조응한 것들은 이야기 말미에 갑작스럽게 주어진 설정과 결과에 의해 부정당해버렸다. 목격한 장면보다 들려주는 (심지어 어떤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던) 결말이 최종적인 내러티브를 지배한다. 관객의 혼란, 혹은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게임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결국 영화는 사라지고 장르영화라는 룰 바깥에 선 (일련의 기만행위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독창적인 게임만이 남는 것이다.

일광과 외지인이 한편이라는 서사적 결말과 무명(천우희)과 종구(곽도원)의 무기력함을 목격한 관객은 소문(혹은 운명)에 휩쓸린 종구처럼 무기력해진다. 그게 싫다면, 그러니까 이 영화를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하고 싶다면, 다시금 앞으로 돌아가 그에 합당한 근거들을 모아와야 한다. 관객이 뒤늦은 해석의 게임에 열렬히 참여하는 동력은 거기에 있다. 이 게임엔 사후적인 이야기의 조각이 있을지언정 우리가 목격한 것들은 없다. 혹은 무시된다. 나홍진의 내러티브는 목격한 것과 제시된 것 사이에서 장면의 진실보다 소문의 힘에 따르며 급기야 그 과정 자체를 형상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목적 아래에선 아무리 촘촘한 상징과 그럴듯한 해석이 제시될지라도 의미로 연결될 수 없는 텅 빈 움직임에 불과하다.

영화 안팎, 닮은꼴의 묵인과 외면

더 끔찍한 일은 영화 바깥에서 일어났다. <곡성>이 재현한 소문의 작동 원리는 영화 바깥에서 한층 뚜렷한 실체를 획득했다. 우리는 <곡성>이 개봉하기 전부터 무언가 대단한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소문을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시나리오가 나왔다는 증언들, 현장이 엄청나게 혹독했다는 이야기, 실제 안개를 찍기 위해 깊은 산속까지 행군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며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찍은 영상들이 얼마나 대단할까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적어도 언론과 평단에는 그와 같은 기대가 일종의 믿음처럼 퍼져나갔다.

<곡성>의 화면 너머 무언가를 본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정상이다. 하지만 그 제각각의 감흥이 서로 다른 반응으로 터져나오지 못한 건 다른 힘이 작용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한) 상당수 비평 영역에서 실제로 보기도 전에 영화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자신이 실제로 목격한 것을 정리하기 전에 소문의 무게가 우리를 덮쳤고,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판단을 뒤흔들었다. 스스로의 감흥에 대해 확신이 없을 때 가장 손쉬운 선택은 바로 묵인이다. <곡성>의 플롯이 응당 전해야 할 정보를 생략하고 보여주지도 않은 인과를 믿도록 관객을 기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본 것을 믿지 못하고 그간 들어왔던 정보들을 믿어버렸다. 소문에 현혹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저 내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만 뒤늦게라도 이를 밝히고 싶은 건 일련의 소극적인 비평 내지는 침묵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곡성>의 자기기만적인 플롯은 껍데기의 조립, 비유하자면 허주(虛主)에 불과한 이 영화에 왜곡된 생명력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평론가로서 나의 원죄는 이 영화를 보자마자 내가 무엇을 보았고 보지 못했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같은 묵인과 외면이 소문을 대면하는 종구의 모습과 닮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나를 경악시켰다.

한 가지 변명하자면 <곡성>의 매 시퀀스에는 분명 어떤 물성이 깃들어 있다. 공간의 물성을 옮겨 담는 데 있어 나홍진의 연출은 대체로 힘을 발휘해왔다. <곡성>에도 각 장면들을 떼어놓고 보면 충돌의 에너지라고 해도 좋을 어떤 진득한 기운들이 깃들어 있다. 굿판의 격렬함이 그렇고, 쫓기던 일본인이 절벽 밑에서 드러낸 절박한 표정이 그렇다. 그토록 상찬을 들었던 새벽안개에 맺힌 어스름한 빛깔에도 그런 기운이 묻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장면들의 리얼리티는 끝내 영화적 진실로 연결되진 않는다. 실제 안개가 내려앉을 때를 기다려 촬영한 고집, 공간을 통째로 잘라 옮기는 사실적인 재현 속에 담긴 그 ‘진짜 같은’ 기운은 뜬금없이 제시되는 속임수의 플롯, 그러니까 이제까지 당신이 목격한 모든 에너지가 당신의 오해라는 결말의 선언에 의해 무력화된다. 평단의 눈을 쉽게 가린 건 미처 연결되진 않았을지언정 분명 물질적으로는 담아낸 그 순간의 기운들의 도움도 있을 것이다. 다만 빛날 수도 있었을 그 순간들은 나홍진의 한판굿을 거쳐 끝내 영화가 아닌 허주가 되고 만다.

열린 결말이라는 의도된 현혹

믿음이란 정보의 공백이 발생했을 때 이를 메우려는 태도다. 누군가는 개인의 체험을 동원하고, 누군가는 철학적 명제를 빌려온다. 때로는 사회적인 현상, 집단의 분위기가 믿음의 틀로 기능하기도 한다. <곡성>이 의심과 악의 탐구에 대한 영화라면 나홍진이 정보의 공백을 메우는 방식은 실은 매우 단순하다. 뒤늦게 사족처럼 달린 설명들, 그러니까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통해 내가(관객이) 본 장면들을 불신하게 만들고, 소문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다. 불신을 전염시킨다고 봐도 좋겠다.

이 영화 속 모든 불행한 사건들은 인물들이 의심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찾아온다. 종구가 외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외지인이 제거되었다고 믿었을 때 딸이 낫는다. 일광으로부터 악마가 무명이었다는 설명을 들은 후부터 다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자신이 눈으로 본 것보다 귀로 전해들은 것에 확신을 가진 순간 파멸에 이른다. 누가 누구와 같은 편인지 하는 플롯상의 속임수를 제거하고 단순히 행동과 결과로만 이어 붙여보자. 이것은 보지 않고 의심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가혹한 처벌이 가해지는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니 이야기라기보단 소문과 의심에 마음이 홀린 자들을 향한 참혹한 단죄의 나열이다.

누가 봐도 서로에게 살(殺)을 날리는 것처럼 구성된 굿판이 일광과 외지인이 각자 굿하는 모습을 나란히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고 의뭉을 떤다. 그리하여 일광을 의심하는 자에게는 일광이 악마처럼 보이고, 외지인을 의심하는 자에겐 외지인이 악마처럼 보이도록 숏을 열어둔 채 열린 결말이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야말로 현혹이다. 이 플롯이 진정 끔찍한 건 보는 대로 믿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믿는 대로 보이도록 숏을 중성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나홍진은 “누군가의 불행도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운명의 불가해함을 말하지만 실은 운명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조종하는 건 온전히 감독의 의지다. 나는 지금 이 영화가 의심과 소문에 시달려본 자가 전달하는 황폐한 복수극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곡성>의 모든 치장과 왜곡을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애초에 출구가 없는 악의적인 미로의 설계자가 바란 것은 무엇인가. 미로 속에서 퍼즐을 짜맞추고 있을 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때론 영화 바깥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내가 <곡성>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진실은 이 영화가, 그리고 나홍진 감독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감독 스스로도 속아 넘어갔을, 자기기만의 욕망은 관객이 본 진실들을 거짓으로 바꿔버리고 기꺼이 게임에 뛰어든 이들마저 다툼으로 몰아간다. 남은 것은 거기에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오갈 데 없는 감흥 한 조각. “피해자에 대한 이해”를 주장하는 나홍진의 자기기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곡성>에 관한 한 내가 보지 못한 것까지 함부로 추측하고 싶지 않다. 다만 공간의 물성을 담아낼 줄 아는 보기 드문 재능의 감독이 자신마저 속이는 허주가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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