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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원의 영화비평] 잊었던 것의 귀환

기억의 풍경과 스펙터클이 공존하는 <도리를 찾아서>

<도리를 찾아서>

몇달 전 픽사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었다. 그중 한 꼭지에서는 ‘언성 히어로’(unsung hero)를 꼽아야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캐릭터가 바로 ‘도리’였다. 한 작품에서 주인공에 필적할 만한 활약을 펼쳤으며, 픽사를 뛰어넘어 애니메이션 전체를 보더라도 낙천적 성격과 실행력을 겸비한 가장 출중한 긍정의 아이콘이며, 화려하지 않은 외모이지만 나름의 매력을 한껏 소유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도리를 꼽은 나 자신의 심미안에 적잖이 뿌듯해하는 것도 잠시, <니모를 찾아서>를 검색하자마자 더이상 도리는 언성 히어로가 아니었다. 한창 개봉 준비를 하고 있는 가장 핫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일개무명의(더군다나 게으르기까지 한) 평론가가 떠올린 캐릭터의 매력을 픽사에서 놓칠 리가….

<니모를 찾아서>가 개봉한 2003년으로부터 13년이 흘렀다. 그 작품에 참여했던 애송이 애니메이터들은 이제 제법 경륜을 갖춘 전문가가 되었을 것이고, 극장에서 ‘와~’를 연발하며 ‘커서 꼭 저런 작품을 만들어야지’라고 야무지게 앞날을 설계한 초딩 관객중 누군가는 <도리를 찾아서>의 막내 스탭으로 참여하여 ‘하아~ 이게 아닌데…’라는 깨달음을 비로소 얻었을 수도 있다. 후속작이 나오기까지의 13년은 그만큼 제법 긴 기간이다. <도리를 찾아서>에서는 그 기간을 13년 대신 1년으로 삼았다. 엄청난 모험을 함께 겪었던 만큼 니모와 말린, 그리고 도리는 그동안 제법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제목처럼 이번에는 도리를 찾아나서야 한다. 전편에서 니모가 잡혀갔듯이, 이제는 도리가 무리에서 이탈한다. 바다생물 연구소로. 그래서 탈출과 구출의 엇갈림과 접점이 작품의 활극적 요소를 구성한다. 다른 한편, 도리를 찾는다는 건 도리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단기기억상실증을 달고 살기 때문에 매번 좌충우돌하는 도리에게도 어렴풋이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과거가 있다. 그 과거 속에 가족이 있고, 잊고 있던 자신이 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가는 과정은 꽤나 내면적인 경로를 통해, 정서적 요소를 꾸린다. 그래서 <도리를 찾아서>의 첨단 비주얼 테크놀로지는 스펙터클 어드벤처라는 시각적 즐거움을 한껏 충족시켜야 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기억의 풍경을 구성하면서 이를 정서적으로 품어 안아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가족, 가족, 가족

<니모를 찾아서>를 비롯하여, 200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 장편 애니메이션들은 ‘가족’ 이야기를 꽤나 열심히 다루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장편애니메이션에서 ‘가족’을 다루지 않은 경우를 찾기가 더 어렵기는 하다. 애니메이션이 극장을 통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가족 단위의 관객을 타깃으로 삼아야 하는 게 기획의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반의 애니메이션들이 들려주는 가족 이야기는 (고전적) 디즈니 버전의 가족과는 달랐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이 19세기 낭만적, 목가적 가족주의를 꽤나 집요하게 품고 있었다면, 21세기 초에 새롭게 등장한 애니메이션 속 가족은 확장된 가족, 유사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주요 인물들은 애초에 가족을 꾸릴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느닷없이 돌봐야 할 아이가 주어졌고, 온갖 야단법석을 다 떨다보니 어느새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었네,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근대적 핵가족 제도의 해체라는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작품을 만들고 있는 애니메이션 현장 스탭들이 처한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 2D 드로잉/셀애니메이션에서 디지털 2D/3D로의 급격한 이행은 애니메이션 산업 내에서도 일종의 세대 갈등을 유발하였다. 셀애니메이션 방식 때부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애니메이션의 ‘감’을 온몸으로 익힌 기성세대와 모든 이미지를 디지털 픽셀로 처리하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 속에서 움직임을 익힌 젊은 세대는 한정된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했다. 기존 스튜디오들은 디지털 세대에게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익히도록 하는 것보다는 기성세대에게 디지털 제작 방식을 훈련시키는 것이 조금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결국 디지털 애니메이터들은 그들만의 스튜디오를 세우고, 처음부터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젊은 스탭들에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은 환상에 불과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13년 전의 픽사는 디즈니에게 꽤나 기특한 수양아들 같은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 뛰쳐나갈지 모를 사춘기 시한폭탄이었다. 밀고 당기기 끝에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계약 가족이 아닌 정식 가족으로 10년을 함께 살아온 셈이다. 그래서인지 <니모를 찾아서>에서 가족은 꽤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인간관계로 다뤄졌지만, <도리를 찾아서>에서 가족은 너무나 당연한, ‘자기 정체성’의 처음이자 끝으로 제시된다. 도리를 위하는 입장에서라면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게 행복일 수 있다. 다만 이번에 도리를 괴롭힌 가장 큰 지점은 ‘자기가 부모를 (잊어)버렸다’는 각성이다. 그것이 아무리 기억상실로 인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도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엄청나게 자책한다. 나아가 탈출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문어 행크에게도 가족관계의 회복을 권한다. 열렬한 ‘가족 전도사’가 된 것이다(작품의 첫 장면에서 무리지어 이주(migration)하는 새떼와, 반복되는 가오리떼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을 설파한다. “오~ 집으로 가~”라는 노랫말처럼 거대한 이주는 결국 가족을 찾아가야 한다.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지점이다).

시네마-아쿠아리움

도리가 니모, 말린으로부터 떨어져 갇힌(!) 곳은 바다생물 연구소이다. 이곳은 ‘구조, 치료, 바다로 돌려보내기’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운영된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바다생물을 전시, 관람, 심지어 체험케 하는 대형 아쿠아리움이기도 하다. 동물원의 해양 버전인 아쿠아리움이 현실 세계에서 지니는 양가적 성격처럼, <도리를 찾아서>의 바다생물 연구소도 기능적으로는 생태 친화적이고자 하지만, 부정적인 면모도 슬쩍슬쩍 보여주곤 한다. 동물원처럼 대놓고 쇠창살로 안과 밖을 나누지는 않지만, 관리되는 내부와 구경하는 외부의 공간적 경계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는 도리의 기억을 통해 모호해진다. 도리는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곳이 넓은 바닷속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쿠아리움 내부였다. 그 내부에 있을 거라던 도리의 부모는 도리를 찾기 위해서 그곳을 벗어나 바다로 나간 상태이다. 바닷속 친구로 여겼던 고래상어 데스티니는 야외 수족관에서 보호받아왔다(우연찮게도 고래상어와 벨루가는 몇해 전 한국의 대형 아쿠아리움들의 개장과 맞물려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아쿠아리움의 성격에 대한 질문은 사라진다. 관건은 아쿠아리움의 ‘선의’적 의도가 도리 일행에게 또 다른 곤란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인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한, 대부분의 픽사 작품에서는 디즈니식의 절대 악당은 가급적 배제한다). 그저 제도와 운영 방침, 건축 공간적 구획 등이 갈등의 요인으로 작동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아쿠아리움의 전시가 기획한 스펙터클은 영화관으로 넘어온다. 밀집한 관람객 때문에 아쿠아리움에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볼거리들을 이제 우리는 스크린 위에서(때론 아이맥스의 스케일로, 때론 3D 입체영상으로) 한껏 여유롭게 즐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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