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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의 영화비평] 식자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개, 돼지’들의 윤리학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레셔널 맨>

한 교육부 고위 공무원의 ‘개, 돼지’ 발언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대체로 국민들은 이 사건의 두 지점에서 격노했는데, 우선은 그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언자가 ‘교육’부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고직’이라는 요소가 놀람과 분노를 유발하는 데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으로 현재 한국 국민들의 ‘고위층’의 윤리감각에 대한 기대감이 거의 최저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의 발언은 흔히 ‘대중’이라고 칭해지는 수많은 국민에 대한 도덕적, 지적 우월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단어가 과연 이론적으로 성립 가능한 것일까? 타인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존재론적 우월감을 느끼는 순간 ‘윤리적’ 우위란 자동박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나는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인간이야”라는 말이 그 자체로 어불성설인 것처럼 말이다. 우디 앨런의 <이레셔널 맨>은 이처럼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자부하며 선악의 경계를 인위적으로 설정하려 한 인간의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코믹 스릴러다.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라는 우디 앨런식 서사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초반 대사나 내레이션은 대체로 자기 폭로적인 성격을 띤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방향을 암시하고, 주인공이 표면적으로는 그 진술을 거부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운명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마이티 아프로디테>(1995)를 통해 자기 영화가 가진 이런 서사적 특질을,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라는 가장 고전적인 형식을 빌려 구현하기도 했다. <이레셔널 맨> 역시 비슷한 세팅을 도입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스릴러’로서의 장르적 흥미를 반감시키는 방식이기에 ‘반전’과 같은 깜짝 퀴즈식 장치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디 앨런식 화법을 즐기는 관객에게는 오히려 초반 진술을 번복/반복하면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 아이러니를 관람하게 될 기대감을 높인다. 쉽게 말해, “이 젠체하는 맨스플레인의 정점에 선 남성주인공이 과연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질까?”를 낄낄거리며 지켜보도록 하는 것이 우디 앨런 영화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영화에서 이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주인공인 에이브 루카스(호아킨 피닉스)의 강의다. 뭔가 우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학교 교직원은 물론 학생과의 연애까지 서슴지 않는 데카당스한 철학과 교수 에이브는 학교에 부임하기도 전에 수많은 학교 구성원, 특히 여성들 사이에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매우 시니컬한 태도로 수업에 임한다. 영화에서 그의 강의 시퀀스는 여러 번 등장하지만 내용을 주목해야 할 수업은 초반의 두번이다. 하나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관련된 윤리학 강의이고, 다른 하나는 키르케고르의 ‘자유’와 ‘불안’에 관한 실존주의 강의다. 에이브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설명하며 윤리적으로 완벽한 세계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허용될 수 없으며, 설령 킬러가 목표물을 찾기 위해 질문을 할지라도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의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에게 그러니까 ‘철학이란 결국 언어로 하는 자위에 불과하다’며 자조한다. 이런 대화는 그가 현재 직업적, 정서적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려줄 뿐 아니라 그가 곧 유사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교만한 ‘이성’의 ‘비이성적’ 자기 합리화

에이브는 현재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일컬었던 ‘절망’의 바닥을 헤매고 있는 상태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자살했고, 친했던 친구는 이라크전에서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었다. 그에게 죽음은 가깝고, 삶은 부조리하며, 세상은 비윤리적이고, 자신이 가르치는 철학은 무용하다. 염세주의적 태도는 전염성이 강할 뿐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나 불가해한 미래에 대한 ‘회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성과 혼동되곤 한다. 특히 철학과 교수라는 에이브의 직업적 특수성은 그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를 욕망하는 두명의 여인 질과 리타는 각자 자기 목적에 부합하게 그의 정체성을 해석한다. 질은 에이브가 자신의 영민함을 알아봐주는,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는 불운한 철학자라고 생각해 그에게 매료되고, 리타는 그를 일상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이해하는 동지이자 학문적 ‘뮤즈’가 필요한 천재라고 제멋대로 규정해버린다.

에이브의 절망은 그의 자유로운 의지나 선택이 개입할 수 없었던 불행한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의 자살이나 친구의 죽음은 그가 그저 고통을 견디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실 그는 단순히 슬퍼한다기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이 정작 삶의 주체인 자신을 소외시킨 채 벌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질과 식당에서 함께 우연히 엿들은 부당한 판사의 이야기에 ‘살인’을 생각해낸 것은 그의 내면에서 방향성을 잃고 스스로를 공격하기 시작한 분노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실존적 결단이었지만 윤리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판사 살해를 계획한 이후 그는 ‘절망’에서 벗어난다. 그는 삶에 대한 강한 욕망에 불타오르고, 그의 신체도 그에 부응한다(그는 발기 불능 상태에서 벗어나 왕성한 성욕을 발산한다). 불의를 처단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윤리적 테제가 그의 목표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세계의 부조리를 바로잡고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신적 지위에 대한 욕망이 그 행위의 근간에 자리잡고 있다.

남성의 야망과 살인이라는 소재적 유사성 측면에서 이 영화는 <매치 포인트>(2005)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영화 속 주인공 크리스(조너선 리스 메이어스)가 저지른 살인은 ‘행운’으로 은폐되었고, 이 영화 속 에이브의 윤리적 단죄는 처벌당한다. <매치 포인트>에서 감독이 총을 겨누었던 것은 중산층의 부조리와 ‘운’이라고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삶의 우연성이었던 반면, 이 작품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교만한 ‘이성’의 ‘비이성적’(irrational)인 자기 합리화이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자기가 저지른 살인의 이기적인 목적을 인정한 것과 달리 에이브는 자신의 살인을 공리적인 것이라고 합리화하며 그것이 세계의 불완전한 도덕성을 보완해줄 것이라는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지식인의 얄팍한 윤리감각을 조롱하다

우디 앨런은 영화에서 매우 이성적이고 지적인 담론들을 다루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그것의 목적은 지적 교설을 통해 통찰보다는 현학적 태도들의 얄팍한(혹은 자기 편의적인) 윤리감각을 조롱하는 데 있다. 우디 앨런 영화의 남성주인공들은 지적인 직업(교수, 작가, 감독 등)군이 다수이고, 여성주인공들은 대체로 그의 부인이거나 제자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설정 자체는 성차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레셔널 맨>에서 에이브는 교수이고 질은 학생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윤리적 차원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질이다. 에이브는 매우 치밀한 연구와 사전 조사 끝에 ‘완전한 타인’에 의한 독살이라는 완전범죄 시나리오를 만든다. 하지만 그 완전성에 균열을 내는 것은 집단적이고, 직관적이며,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루머에 가까운 여성들의 담론이다. 질의 추론, 리타의 직관적 의심, 실험실 학생의 부주의한 진술, 질의 친구가 전해준 소문이 그것이다. <맨하탄 살인사건>(1993)에서도 남편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은 틀리고, 부인의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추측이 맞았다. 어쩌면 우디 앨런은 고상한 척하는 지식인의 합리성과 교만한 윤리의식보다 ‘개, 돼지’들의 직관과 수군거림이 사회가 보편적 윤리성을 유지하는 데 더 효과적일 뿐 아니라 더 ‘이성적’인 길임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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