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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살인과 죄의식을 다루는 우디 앨런의 불가해한 방식

<이레셔널 맨>

영화사에서 ‘살인’에 대해 가장 전복적 상상을 꽃피운 사람은 사샤 기트리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도덕과 규칙에서 멀리 떨어져 손가락질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정작 영화와 코미디를 조롱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꿈을 꿉시다>(1936)에서 “관객은 결혼 장면만 나오면 행복해져서 ‘좋은 코미디’로 평가하지. 그건 비극의 시작인데 말이야”라고 말했던 그다. 기트리 영화의 진경은 ‘역설’에 있다. ‘살인을 정당화했다’는 오명을 듣는 대표작 <>(1951)에서 증인으로 나온 아주머니는 “여기서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죽기를 한번쯤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그건 결혼 생활의 일부와 같아요”라고 말한 뒤 마을 신부를 끌어내 “그런 고백을 많이 듣지 않았어요?”라고 따진다.

웃으며 보다가도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게 기트리 영화다. <>은 끔찍한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낀 중년 남자 폴의 이야기다. 그는, 잘 씻지도 않고 낮부터 폭음을 즐기고 퉁명스러워서 마을 사람들 모두 싫어했던 아내를 보다 못해 살인을 저지른다. 아내를 죽인 직후, 아내가 그에게 먹이려 했던 와인 잔에 독약이 들어 있음이 밝혀진다.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이 유명해져 사업이 잘된다며 오히려 (수감된) 폴에게 고마워한다(일찍이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1936)에서 자본주의의 규칙이 ‘사기와 기만’이라고 까발린 기트리다).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폴을 보노라면 기가 막힌다. 아내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살인자 특유의 예지로 그녀를 먼저 죽였다는 게 그의 논리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는 범죄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나쁜 버릇이 판사들에게 생겼다”는 말에 판사조차 반박하지 못한다.

기트리는 고작 살인을 옹호하거나 법에 저항하기 위해 <>을 만든 게 아니다. 윤리 철학에 대해 논할 마음은 더더욱 없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살인을 왜 정당화하겠나. 그의 작품의 진정 놀라운 부분은 ‘상상’에 있다. 수십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그의 영화는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희극의 본질이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데 있다는 걸 간파한 그는 인물과 이야기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그 결과 그는 논쟁적이고 전설적인 코미디 작가로 남았다. 뒤틀린 유머의 정서에서 기트리는 우디 앨런의 진정한 선배라 불릴 만하다.

도스토옙스키와 우디 앨런 그리고 라브 디아즈

기실 ‘살인과 죄의식과 도덕’이란 소재는 오랫동안 우디 앨런을 매혹시켜온 소재다. 단 그는 기트리와 달리 ‘도스토옙스키적’이다. <범죄와 비행>(1989), <매치 포인트>(2005), <이레셔널 맨>(2015)의 리스트는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주제를 통과한 궤적과 같다. 두 세기 전의 작가가 제기한 질문에 현대의 여러 감독들이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스토옙스키와 영화를 말할 때 앨런보다 먼저 거론되어야 하는 사람은 라브 디아즈다. 그는 다수의 작품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주제를 변주해왔다. 두 감독은 <죄와 벌>을 다르게 해석한 <이레셔널 맨>과 <노르테, 역사가 끝나는 곳>(2013)을 근래 나란히 발표했다. <노르테, 역사가 끝나는 곳>의 주인공이자 법대를 그만두고 이상적인 세계관에 몰두하는 파비안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직접적인 후예다. 세상에 분노한 채 지내던 그는 하층민의 피를 뽑아먹으며 사는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다. 혁명을 하려면 살인쯤은 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를 정화하려면 악질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말해왔던 그다. 하지만 그의 정신적 고통은 살인사건 이후 더욱 심해지고, 그 대신 누명을 쓴 일가족의 불행을 목격하면서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죄인이라는 인식에 있다. 이것은 죄와 악을 뉘우치는 것과 다른 개념이다.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 게 아니다. 폭력적으로 굴욕을 강요하고 불의가 넘치는 사회에 태어나 존재하는 것 자체로 죄인이라고 생각한 그는 ‘만인은 만인 앞에서 죄인이다’라고 했다. 디아즈도 다르지 않다.

<멜랑콜리아>(2008)의 대사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게 죄다”라는 말은 여러 영화에서 반복 등장한다. 그것은 악당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역사(와 그것의 현존)를 짊어지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가 유배와 부활을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디아즈는 길을 달리한다. 그는 부활이나 희망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배가 아닌 순례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별다른 죄를 짓지 않은 <에레미아스>(2006)의 주인공이 희생당한 소녀를 애도하며 신 앞에서 먼 길을 떠나기를 맹세하는 것처럼, <노르테, 역사가 끝나는 곳>의 파비안도 고통스러운 순례의 길을 떠날 것이다. 그들이 왜 순례를 떠나야 하는지 묻는 것은 곧 나의 질문으로 화한다. 그의 영화를 보는 게 불편한 건 당연한 일이다. 디아즈는 한번도 교훈을 드러내 말한 적이 없는, 하지만 위대한 교훈극을 만드는 작가다.

죄의식을 포장한 할리우드영화

<이레셔널 맨>의 에이브(호아킨 피닉스)는 얼핏 라스콜리니코프와 파비안의 형제 같다. 한때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다 이제는 우울과 허무에 빠진 철학 교수. 식당에서 아이의 양육권을 잃을까봐 슬퍼하는 여인의 사연을 우연히 엿들은 그는 재판을 맡은 판사를 죽여 해결하려고 한다. 형제들과 그의 차이는 사건 이후에 일어난다. 사건 이후 심연으로 떨어져 몸부림치는 형제들과 다르게, 에이브는 기분 좋은 삶을 산다. 숨이 막혀 답답해하던 그는 숨을 쉴 의지를 얻는다. 사회의 암을 제거해 세상이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삶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삶의 기쁨을 느낀다. 그것 때문에 <이레셔널 맨>을 비판할 마음은 없다. 모든 코미디가 기트리의 그것처럼 전복적일 필요는 없고(그랬다면 더 좋았겠지만), 뻔뻔한 주인공이 살아가겠다고 우기는 코미디는 장르영화로서 충분히 유쾌하다. 더욱이 살인이 들통날 지경에 이르자 에이브가 취하는 행동도 인간으로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죄의식으로 인해 두려워하기는커녕 현실의 삶과 즐거움을 더 연장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인물은 현실적이다. 문제는 감독 앨런의 태도다.

<범죄와 비행>에서 살인을 사주한 인물의 이름은 심지어 ‘주다’다. 바로 죄인의 이름. 다른 사람이 누명을 쓰고 자신은 부와 특권의 세계로 복귀한 어느 날, 그는 결혼 파티에서 무명 다큐멘터리 감독 클리프와 만난다. 주다가 지어낸 이야기처럼 자기 경험을 합리화하자 클리프는 이야기 속 인물을 비극적 인물로 읽는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그를 지켜보고 있기에 내내 고통스러울 것이고, 신이 없다고 해도 그는 신의 부재로 인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다는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돌린다. 클리프가 현실과 영화를 혼동한다면서 “해피엔딩을 원한다면 할리우드영화를 보라”고 권한다.

<이레셔널 맨>은 죄인 주다가 보라고 권했던 할리우드영화에 다름 아니다. 앨런은 왜 자기 영화에 이런 식으로 답을 한 것일까? 노인의 농담일까? 글쎄, 이건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앨런이 어느덧 세상의 수치에 길들여진 결과처럼 보인다. 부르주아의 윤리에 적당히 맞춰 살아가라는 이야기. <이레셔널 맨>을 여자주인공의 시점으로 돌리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서스피션>(1941), <의혹의 그림자>(1943)와 비슷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파티와 피아노레슨과 승마와 로맨스에 빠져 사는 부르주아 여성이 도덕과 교훈을 운운하는 이야기에는 히치콕의 장르영화만큼 개운함이 없다. 더군다나 팔순 노인의 깨달음치고는 너무 순진하고 퇴행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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