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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의 영화비평] <부산행> 속 15호 칸의 학살을 둘러싼 불투명한 정서
송경원 2016-08-10

<부산행>

1.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로 단순히 가르자면 재미있다고 느낀 쪽이다. 다만 목표는 물론 이를 달성하는 방식이 너무도 선명해서 비평적으로 뜯어볼 여지는 그다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장면에 도달하기 전까진 말이다. 적당히 익숙하고 간간이 기발한 좀비 활극을 심드렁하게 관람하던 내 몸을 곧추세운 건 15호 칸에 있던 생존자들이 학살당하는 순간부터였다. 서사적으로 15호 칸 승객들의 전멸이라는 선택은 연상호가 세계를 해독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 영화의 결정적 장면이라 할만하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15호 칸 승객들의 행동이 그렇게 단죄되었어야 할 만큼 이기적이었나. 생존에의 욕망과 이기심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이기심과 악은 동일 선상에서 논할 수 있는가. 연상호 감독이 그간 애니메이션을 통해 지속적으로 던진 화두가 이 한 장면에 녹아 있다.

15호 칸의 학살(이 상징적인 전멸 장면을 어떻게 칭할까 고민했다. 학살이라고 부른 이유에 대해선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에 대한 논의는 이미 몇몇 평자들이 언급했고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이 지점에서 드러난 균열, 악에 대한 질문은 어디까지나 연상호가 이미 여러 번 선보인 시선의 연장 아래 있고 그나마 수위나 방식에 있어선 미약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특별할게 없다. 내 관심을 끈 건 15호 칸에서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문 너머로 바라보는 주인공 일행의 얼굴들이었다. 지루할지언정 한번도 헷갈리는 장면이 없었던 <부산행>에서 유일하게 그 얼굴들만이 모호했다. 석우(공유) 일행이 15호 칸의 학살을 바라보는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을 버리고 내몬 15호 칸 사람들에게 가해진 단죄에 대한 일말의 통쾌함?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다시 위협받게 된 생존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 아니면 그 모든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중일까. 모르겠다. 석우와 나머지 생존자들의 얼굴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불투명하다. 실사영화 <부산행>과 애니메이터 연상호 사이의 간극을 여기서 마주한다.

2.

<부산행>에 작가적 야심이나 사회적 행간을 요구하는 건 지나친 기대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익숙하고 반복적인 화술을 통해 정확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대중상업영화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그만큼 검증된 편집 방식에 따른 기계적인 연출이 중시되는 영화라는 말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아기를 품에 안는 석우(공유)의 플래시백 교차편집은 식상하다 못해 맥이 빠질 지경이다. ‘이토록 짠한 부성애에 감동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일차원적 감정 지시를 이해하지 못할 관객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이런 코드가 유효할 것이라 믿는 제작진의 게으름은 안타깝지만 불분명한 여지를 남길 바에야 차라리 두번, 세번 같은 말을 반복하는게 낫다고 믿는 건 상업영화의 오랜 속성이다. <부산행> 앞에 굳이 연상호라는 이름을 가져다놓지 않아도 좋은 건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명료함의 공식에 따라 서사를 실어나르는 데 충실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부산행>은 꼭 연상호가 필요했던 영화가 아니다. 장르영화가 요구하는 정확한 감정지시와 패턴화된 표정들은 일종의 레고 블록 조각이라 봐도 무방하다. 관객은 완성된 조립물을 기대하지 개별 조각엔 관심 없다. 캐릭터들이 웃고, 짜증내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얼굴들은 한번에 하나씩 정확하게 지정되어 배우의 얼굴에 조각되어야 한다. 넘치면 헷갈린다. 그러니까 이건 한번에 하나의 가면만이 허용되는 이야기 퍼즐이다.

반면 작가영화에 가까운 포토그래픽 시네마들은 다른 길을 걷는다. 사진적 영상은 기본적으로 다중성에 기반을 둔다. 그것은 계획되어 그려진 것이 아니라 포착된 것이며 영상 자체는 복합적인 의미의 단초 내지는 모호한 감정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가끔 궁금하다. 감독의 머릿속에 담긴 이미지가 화면으로 고스란히 옮겨질 수 있는 것인가.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구상에 한없이 가까워지도록 발버둥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대체로 구체적이고 세밀한 재현을 통해 완성되기보다는 뭉툭하고 두루뭉술한 비유의 순간들, 혹은 우연과 기적과 마법의 순간들을 통해 전달된다. 여기서 장면이란 구체적인 재현이 아닌 감독과 대상 사이, 이미지와 관객 사이에서 파생되는 관계의 흔적에 가깝다. 바로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두고 초기영화 이론에 지대한 공헌을 한 벨라 발라즈는 ‘다성성’(polyphony)이라 칭했다. 영화학자 자크 오몽은 자신의 저서 <영화 속의 얼굴>에서 “영화에서 얼굴은 이중적이다. 배우는 자신과 동시에 타인을 재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하나의 의미로 결정될 수 없는 불투명, 모호, 불완전함이야말로 작가에게 허락된 유일한 언어이며 영화에 포토그래픽한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보루다.

한편 애니메이션은 어떤가. 이론적으로는 작가의 머릿속 이미지를 시간과 물량의 허용치 안에서 손실 없이 화면에 옮길 수 있는 방식이다. 다만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모방이다. 실재를 포착 하는 것이 아니라 환영과 상상을 모사한다. 이탈리아 애니메이션 역사가 지안알베르토 벤다치의 말을 빌리자면 “애니메이션은 전적으로 인간의 사고- 다른 애니메이터들이 사물, 생물과 그것의 형태, 움직임의 의미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 를 원재료로 한다.” 실상 ‘애니메이션’이란 한 단어로 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식과 방향이 다양하지만 이 글에서 다뤄보고자 하는 건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걸 목적으로 한 상업애니메이션의 사례다. 이 경우 감정묘사에 대한 몇 가지 패턴이 있는데 패턴이 세분화, 구체화되는 경우는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순간을 담아내는 경우는 없다. 설사 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해도 ‘애매모호한 표정’이라는 또 하나의 패턴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그려졌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건 창작자의 의도를 정확히 구현한 결과물이다. 이는 찍은 것과 그려진 것의 물질적 차이가 있을 뿐 실사영화가 지향하는 목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니 어쩌면 실사영화들의 이상향이다. 그래서 결국엔 최근 개봉했던 <정글북>처럼 사진을 모방하되 기본적으로는 완벽히 통제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설명과 감정의 지시를 목표로 하는 상업영화가 최종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불확정 요소들을 배제하는 그래픽 시네마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건 어쩌면 필연처럼 보인다.

3.

연상호의 첫 실사영화 <부산행>에 대한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애니메이션 감독이었을 때 연상호의 작품들은 실사영화를 대하듯 소비됐다. 그런데 정작 실사영화로 넘어오니 매우 명료하고 지시적인 그래픽 시네마의 화술을 구사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물론 연상호의 전달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랬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 유효한 질문은 15호 칸의 학살을 바라보는 모호한 얼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게 왜 모호한 것처럼 보이는지 알아보는 일이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왜 하필 그 장면만 불투명한 정서로 둘러싸였나’이다.

연상호에게 굳이 작가라는 말을 붙이진 않겠다. 아마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을 두고 작가성을 거론하는 건 여타 장편상업애니메이션과 ‘다르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연상호의 애니메이션들이 달랐던 건 악의 근본을 파내려가는 단단하고 무시무시한 서사 때문이었다. 악이 더 큰 악을 징벌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지옥도를 묘사하는 건 확실히 장편애니메이션에서는 드문 서사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드라마가 사실적이고 무거울수록 ‘그려졌다’는 수단이 부각됐다는 점이다.

만약 똑같은 이야기가 실사영화로 재현되었을 때 그만큼 흥미로웠을까 자문해본다면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사실적인 드라마, 혹은 실사영화에서 주로 봐왔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본다는 게 그간 연상호 세계의 특징적인 부분이었다. 요컨대 연상호의 작품에서 ‘그래픽’이란 요소는 로토스코핑처럼 실사를 애니메이팅으로 변환한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로토스코핑 기법의 여러 장점 중 특히 도드라지는 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최대한 무화시켜 심리적 이완 상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건 그려진 이미지’라는 인식이 끔찍함, 답답함을 완화시켜준다. 환상이라는 이름을 빌린 거리두기, 일종의 면죄부라고 해도 좋겠다.

재미있는 건 애니메이션일 때는 ‘다름’의 장치였던 요소들이 실사영화로 넘어오자 평범하고 당연해져버렸다는 거다. <부산행>의 실사 배우들은 애니메이션이 각 캐릭터에 정확한 표정을 지시하는 것처럼 정해진 얼굴을 꺼내놓는다. 이건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때도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준 표정이 훨씬 단순한 패턴이라 좀더 무표정에 가깝게 보일 여지가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별것 아닌 것 같은, 어쩌면 좀더 못 만든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 요소가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감상을 가르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사실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에서 표정이 비교적 단순했던 건 제작 공정의 특성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만큼 표정까지 세밀하게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그게 의외의 효과를 자아낸 것이다. 예컨대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처럼 24프레임을 뛰어넘는 세밀한 움직임으로 미세한 표정까지 재현한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모호함에 대한 모사’일 따름이다. 반면 감정을 정확히 지시하지 않는 무표정은 역설적으로 해석의 가능성을 넓힌다. “우리가 <월·Ⓔ>에서 그토록 감동을 받은 것도 튀어나온 눈밖에는 얼굴이 없는 깡통로봇이 어떤 표정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씨네21> 933호 ‘허문영의 신 전영객잔-단단한 서사 속 불완전한 가면’ )이란 분석은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연상호의 애니메이션들은 주로 이 묘사의 단순화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혜택을 봐왔던 걸로 생각된다.

4.

다시 돌아와 15호 칸의 학살을 바라보는 주인공들의 표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기능적으로 이 장면은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장치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학살을 통해 15호칸 승객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감정을 빠르게 해소시켜준다. 굳이 학살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15호 칸에서 일어난 죽음이 그들의 원죄 때문이라기보다는 관객의 카타르시스 내지는 이야기의 빠른 진행을 위한 일종의 생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개별 승객들의 사연을 구구절절 살피고 설명하는 것 말고도 이 영화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보여줄 것이 산더미다. 따라서 이 장면은 좀비들이 이기적인 사람들을 살육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필요에 의해 캐릭터들이 학살당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인물에게 악을 전가시키고 마네킹처럼 소비하는 이런 방식을 찬성하진 않지만 서사적 효율 차원에서 이해할 수는 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건 과감한 생략이 난무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불투명한 표정들을 이토록 오래 주시하는 이유다. 아마도 이 순간 발생한 모호함이 연상호 감독의 의도였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영화 전체의 톤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도 그는 모호함을 즐겨 사용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짐작건대 ‘복잡한 표정을 지어라’ 정도의 연출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장면은 편안하게 관람하던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모호함으로 나(관객)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의도된 결과인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애니메이터 연상호와 실사 감독 연상호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교차한 지점일 수도 있고, 불현듯 작가 의식이 배어나온 연출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 틈새, 그 장면, 그 얼굴에서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 그래픽과 포토그래픽한 순간이 교차한다는 사실, 그 하나다. 15호 칸의 학살을 바라보는 석우 일행의 표정은 포토그래픽하다. 그 얼굴들은 “다른 얼굴보다 더 많은 의미 작용을 하기 때문에 더 변별적인”(자크 오몽 <영화 속의 얼굴>) 비가시적인 얼굴이라 할 만하다.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기에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얼굴들. 하지만 다른 모든 장면에서 그래픽한 얼굴(=가독적인 얼굴)들을 하고 있는 <부산행>에서 이 순간만 따로 포토제닉한 장면으로 받아들여지긴 쉽지 않다. 다시 말해 영화는 불투명한 상태를 ‘보는 것’을 거부하고, 의미를 ‘읽어내도록’ 유도한다. 이때 사실상 독해 불가능한 표정과 표정들 사이에 들어차기 가장 좋은 것이 연상호가 꾸준히 반복해온 주제들, 이를테면 지옥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 대한 반영이나 인간의 악성에 관한 개념들이다. 설령 그 해석들이 오해일지라도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적극적인 해독이 필요한 시퀀스의 마무리가 석우 일행의 포토제닉한 표정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비어 있는 공간, 그래서 해독 불가능할 만큼 가득 찬 감정들이 담긴 장면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 그릇 안에 담긴 감정을 보는 것보단 의미를 읽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연상호는 처음부터 그래픽영화를 만들던 사람이고, 실사로 넘어 와서도 그래픽한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심심해졌다. 여기 그래픽한 방식이란 감독의 구상을 정확히 이미지화하는 행위에 국한한 개념을 말한다. <사이비> 비평에서 허문영 평론가는 “그의 서사가 인간의 얼굴과 만난 결과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모호함을 포착하는 대신 선명함을 강화하는 방식의 연출을 택했다. 물론 이 한편의 영화로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효율주의자로서의 연상호 감독의 면모는 분명히 확인된 셈이다. 목표로 한 것만큼은 분명하게 성취하는 감독, 그 과정을 실현해내는 합리적인 연출이 연상호 감독의 장기인 것 같다. 그 점을 애니메이션에 가져다놨을 때는 ‘다름’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실사영화에 이르러서는 경제적인 연출에 관한 부분이 부각됐다. <부산행>은 딱 그만큼의 영화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을 연출했을 때 엿보였던 가능성이 어쩌면 신기루였다는 걸 새삼 확인한것 같아 왠지 입맛이 씁쓸하다. 유능한 연출자 연상호를 얻었지만 궁금증을 일으키는 애니메이터 연상호는 딱 그만큼 희미해지고 말았다. 만약 포토그래픽한 것이 ‘그것이 거기에 있었음’을 포착하는 사실주의의 산물이고 그래픽한 것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감정을 재현해내는 표현주의의 도착지라면, 사실상 둘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운 지금 우리는 영화에서 이같은 불투명한 장면들을 계속 만날 수 있을까. 실사영화에서조차 포토그래픽한 순간을 딱 한 장면밖에 마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섬뜩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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