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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영화비평] 한국 사회의 일상적 재난을 묘사하는 <부산행>의 방식에 과연 문제의식은 있는가

<부산행>

연상호의 <부산행>이 비평할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칸국제영화제 상영 직후와 국내 개봉을 위한 언론 시사회 직후에 호평이 대다수였던 것과 달리 내 주변의 영화 종사자들 사이에선 이 영화가 이야기 굴곡이 없고 평평하며 필요 이상으로 신파적이고 전개가 익숙해서 기대만 못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건 영화와 관객이 만나는 사이에 비평이 개입할 편차가 거의 없다는 얘기기도 하다. 재난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이 영화 속 재난에도 은유가 들어 있지만 이건 너무 직접적이고 투명한 은유라서 누가 굳이 논평하는 게 촌스러울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현재의 한국 사회가 일상적으로 당면한 재난을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태도로 묘사했다고 보는 평들에 대해선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굳이 평가하자면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은유를 반박할 수 없는 층위에서 입에 침 바르고 얘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영화에 가깝다.

<부산행>에 떼로 등장하는 좀비는(이 글은 <부산행>의 프리퀄인 <서울역>을 보지 않은 시점에서 썼다) 원인과 동기가 불분명하며, 펀드매니저인 주인공 석우(공유)가 관여하는 생명공학 회사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무리한 실험을 추진하다 생긴 불상사쯤으로 암시된다. 부도덕한 과다 이윤 추구를 노린 기업의 무모한 투기와 그 기업의 이익에 봉사하며 기생하는 석우의 직업적 부도덕성이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재앙의 근원인 셈인데 이 원인은 이야기의 핑계 이상으로 더 나아가진 않는다. 석우와 그의 부하직원을 제외하면 영화 속 인물들은 끝까지 자기들이 좀비에게 왜 쫓기고 좀비가 되어가는지 모른다. TV 뉴스로 나오는 정황도 정부의 거짓발표뿐인데 세월호 비극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기시감을 이용한 이 장치는 현실 자체가 상투형으로 굳어진 상황이라서 굳이 공분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영화는 대신 다른 길을 택한다. 현대적인 운송장치인 KTX 열차에 주요 사건을 배치하고 이곳을 한국 사회의 축도로 제시하는 것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반응 관찰 카메라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을 모른 채 사분오열하는 군상을 보여준다. 한정된 공간에 갇힌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보며 세월호가 떠오른다고 많은 이들이 언급하지만 권력이나 자본의 비리와 무능의 피해자로 이들을 묘사하는 대신 이들의 반응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연상호는 재난을 맞이하는 우리의 대응 수준을 다룬다. 그런데 이 방식이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가해자의 편에 있었던 석우가 희생자가 되는 과정에서 희생자들과 같은 편에 서서 재난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 그는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기득권의 하수인이며 일 중독자이자 지난해 줬던 생일 선물과 똑같은 선물임을 모르고 딸아이에게 다시 주는 무심한 가장이다. 부도덕한 기업 종사자이자 냉혈한 가장이라는 석우의 정체성은 영화의 전개과정에서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 갱생함으로써 도덕적 면죄부를 받는다.

두 엘리트와 연대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재난영화는 유효한 상품일 수 있다. 세상이 언제는 혼란스럽지 않았겠냐만 지금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1960년대나 70년대의 상황과는 다르다. 보수층에서 민주주의라는 무질서를 염려했던 그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보수적인 지배세력들이 추동한 자본과 권력의 부패 합작이 초래한 무질서가 만연하는 시대가 됐다. 이것을 돌파하는 장르적 관행은 예전 영화의 방식으로는 어렵다. 위기에 빠진 집단이 주인공들의 영웅적 활약으로 도덕의 재확언이나 가족의 회복과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를 재확인하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더이상 효과적이지 않다. <부산행>의 주인공인 부패한 엘리트 석우는 그런 상황의 피조물이다. 그는 애초에 완벽한 영웅이 될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은 반성과 갱생뿐인데 예상했던 대로 그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한다. 석우가 완전한 영웅이 될 수 없는 조건으로 이 사회에서 엘리트로 구분되는 신분의 주인공이라는 게 중요하다. 석우 말고도 이 영화에는 또 다른 화이트칼라 엘리트가 나오는데 고속버스 회사 상무 용석(김의성)이다.

두 엘리트는 처음부터 재수 없는 인물이다. 석우는 자기 일의 이익밖에 모르는 냉혈한이고 용석은 그보다 더 나쁜, 겉으로도 교양을 가장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경쟁지상주의자다. 그가 열차에서 석우의 딸 수안(김수안)을 처음 보고 하는 말은 공부 못하면 노숙자 같은 사람이 된다는 충고이다. 그는 충고가 될 수 없는 말을 충고라고 여기고 내뱉는 염치없는 아저씨의 전형인데 물질적으로는 상위 10%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유형의 인물이다. 석우는 딸로부터 갱생의 동기를 제공받지만 용석에게는 그런 동기 유발장치가 없다. 석우가 딸을 살리기 위해 아비규환의 열차 안에서 분투하는 가운데 조금씩 연대의 희망을 발견하며 진화하는 인물이라면 용석은 저만 살려고 끊임없이 열차 안의 군중의 연대를 훼방하는 악인이다. 이 두 인물은 정반대의 궤적을 걷지만 심리의 근본 바탕은 놀랍게도 똑같다. 석우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토록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면 용석은 부산에 사는 엄마에게 가기 위해 처절하게 용을 쓴다. 용석은 좀비로 죽어가면서 (어머니가 아닌) ‘엄마’의 부산 주소를 부르며 슬퍼한다.

이 영화는 엘리트 영웅이 집단을 구하는 서사 대신 회개하는 엘리트와 회개할 줄 모르는 엘리트의 대립구도를 통해 보통 사람과 연대하는 엘리트와 연대를 방해하는 엘리트의 대립구도를 잡는다. 그 대립각을 뚫고 영화 중반까지 진정한 영화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것은 마동석이 연기하는 상화다(이 남자의 직업이 뭔지 궁금한데 영화에선 나오지 않는다). 고릴라 같은 체구를 지닌 이 우락부락한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습관적으로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임신한 아내 성경(정유미)에게는 한없이 순한 남자이다. 한마디로 석우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최상의 남편이자 장래의 믿음직스러운 가부장으로서 보호받고 싶은 본능을 깨우치는 영웅인데 이 사람은 원인도 모르는 채 당하는 열차 안의 재난을 한시적으로 막아내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좀비들이 처음 열차 안으로 난입할 때부터 그것들을 엄청난 괴력으로 물리치며 자기들 살 궁리만을 했던 석우를 비난하고 린치하려 한다. 학식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상화는 석우에게 상식인의 위대함을 일깨우며 타인의 존재 가치와 그들과의 연대의 존엄함을 깨닫게 하는 매개인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 영웅인 상화의 캐릭터로서의 매력은 굉장하다. 그는 불퇴전의 육체적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심성도 나무랄 데 없다. 그는 아내의 안위와 아내가 뱃속에 품고 있는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적절한 시점에 장렬하게 서사에서 퇴장한다. 좀비에게 물려 뜯기고 그 자신도 좀비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그는 아내가 속한 비감염자 일행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좀비가 몰려오는 출입문을 막는다. 이 초인적인 보호행동은 전반적으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영화 속 공권력의 실체와 대비되어 상당한 파토스를 자아낸다. 힘센 다윗이 골리앗을 막듯이 국가 제도가 방기한 재난의 희생자들을 보호하는 능력자의 이미지를 마동석의 근육질 육체를 통해 시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붙잡고 있는 가치 역시 당연히 가족이다. 그는 좀비들이 몰려 있는 열차 칸을 뚫고 나아가는 막간에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분투해야 하는 아빠의 숙명적인 역할을 강조하며 석우에게 위로를 건넨다. 농담식으로 던진 그의 말은 그때까지 신분상으로 나뉘어 있던 석우와 상화를 아빠라는 공통분모로 묶어버리며 국가라는 대타자에게 질문하는 것은 애당초 목적에 없었음을 굳이 부연한다.

<부산행>

최종 가치는 언제나 가족주의

가족의 가치로 환원되는 서사의 목표가 뭐가 문제인가라고 질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세월호 사태와 같은 역사적 비극에 있어서도 언론이나 대중의 호출 단위는 대개 가족이었다. 유가족 중심의 서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재난의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조차도 부모의 입장에서 죽은 희생자 아이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눈물을 흘리는 스펙터클을 연출했다. 재난을 가족 보호의 범주로 환원하면 그 이면의 것들이 배제되고 우리는 다시 그 범주 이면에 있는 시스템의 문제를 질문해야 하는 순환궤도를 타야한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부산행>에서 감정의 연쇄를 이루는 게 가족과의 이별과 상실에 따른 멜랑콜리가 되는 건 대중영화의 유혹 장치로 필연적인 부분이 있지만 집요할 만큼 가족으로 귀결되는 이 영화의 정서적 덫의 장치는 퇴행적이다.

<씨네21> 1066호에서 박소미 평론가가 지적한 문제도 (<부산행>이 생존주의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 환원적인 가족주의의 퇴행성에 가닿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열차에 동승했던 두 할머니 자매 중 언니 인길은 좀비가 되어 옆 칸에 갇히고 동생 종길은 그런 언니를 충격 속에 바라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종길은 평생 헌신적이었던 인길에게 닥친 비극을 슬퍼하는데 인길은 좀비가 되어서도 선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다 (그녀는 다른 좀비들에 비해 수동적이며 누군가를 물어뜯을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영화의 또 다른 충격장치로, 종길은 그들 자매가 처한 상황을 저주하며 좀비들이 못 들어오게 막은 문을 열어젖힌다. 여기서 평생 착하게만 살았다고 언니를 힐난했던 종길은 좀비들에게서 탈출해온 석우 일행에게 문을 열어주기를 처음에 거부했고 문을 열어준 후에는 다른 칸으로 쫓아냈던 비감염자들을 향해 같이 죽자는 분한 마음으로 좀비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젖힌 것이지만 박소미 평론가가 지적했던 대로 이 중요한 클라이맥스에서 영화가 의당 겨냥했을 법한 생존주의의 전체적 맥락은 가뿐하게 휘발된다. 주인공 석우 일행을 거부한 비감염자들 전체가 나쁜 인간들이 돼버린 것이다

연상호 감독은 공부를 많이 해서 정치적 올바름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이것저것 배제해가는 장치들을 쓰며 서사를 맹렬하게 진행시켰지만 결국 마동석의 용맹무쌍한 매력만 빼면 별다른 게 남지 않는 오락영화를 만들고 말았다. 그 밖의 다른 인물들의 됨됨이나 약점은 간략하게 늘 등장하는 스테레오타입에 의존해서 그려진다. 마동석의 상화는 오로지 힘, 단단한 육체로만 표상되는 캐릭터다. 그의 약점은 임신한 아내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중반부에 가면 예상대로 이 남자는 아내를 구하려고 스스로 희생한다. 앞서 거론한 대로 그 죽음을 예감하듯이 그는 미리 유서에 가까운 대사를 남겼다(“아빠라는 게 그런 거 아니냐. 인정 못 받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그런 거”). 위기를 해결하는 남성과 그가 헌신하는 가족이라는 가치가 이 영화가 제출하는 최종 가치다. 그 가치를 증명하는 존재로서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이들은 석우의 딸 수안과 상화의 아내 성경이다. 그녀들은 부산에 거의 다 와서 멈춘 기차에서 내려 터널 속을 걷는다. 대기 중이던 군인들에게 사살당할 뻔했던 그녀들은 수안이 흐느끼며 부르는 노랫소리 덕에 구출된다. 군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처참한 몰골로 걸어오는 그들이 터널 속의 어둠에 반쯤 갇혀 있다는 게 교과서적 울림을 주지만 이들이 살아남은 이들 가운데 가장 도덕적이고 착한 인물들이었다는 것도 삐딱하게 보면 좀 낯간지럽다. 특히 수안은 거의 국정교과서의 매뉴얼에 가깝게 착하게 키워진 딸인데 영화에서 아이는 늘 위태로운 지경에서 어른의 보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은유를 작동시킬 거리가 없다

영화의 서사 목표가 가족으로 집중되는 사이에 영화의 으뜸 구경거리였던 좀비는 겉으로만 요란할 뿐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로 인해 공동체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며 분열을 초래하는 매개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 그들이 좀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금 바로 펼쳐지고 있는 재난의 구경거리에 밀려 매우 형식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그들의 습격을 받는 열차 안의 공동체는 애초에 분열돼 있는데 아주 단순한 구조로 그렇게 되어 있다. 악의적이고 이기적인 지배 엘리트, 개과천선하는 엘리트, 소박한 상식으로 행동하는 억센 가부장, 선악의 분별력이 뛰어난 아이, 인생에 냉소적인 할머니와 헌신적인 그의 언니, 혈기 왕성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젊은이들. 이들에게는 방송의 발표대로 기다리라고 권유하는 정부 관리나 그 하수인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 우리의 시대상에 걸맞게 능력이 조금씩 부족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기 역할에 충실한 능력을 보여주고 서사에서 사라진다.

은유적인 수준에서 영화 속의 좀비들은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한 징벌로도 보이지만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당연히 그렇고 관객인 우리에게도 이 은유가 작동할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습자지처럼 붙이면 되는 은유여서 그게 뭐라고 반문하는 수준의 은유이다. 체제의 극악한 잘못을 가리키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며 그렇게 하면 고도의 선동 오락물이 된다. 이 체제도 결국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걸 우리가 자각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미학적 거리가 필요하다. <부산행>은 그 중간쯤에도 있지 않은 것 같다. 솔직하게 이 영화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약간 모자라는 힘을 발휘하는 영웅들이 나온다. 리더가 없고 개인들은 그저 살아남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사회의 축도가 터널에서 부르는 여자아이의 노랫소리로 울려퍼진다. 국가가 구성원들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요구는 당연한 것이지만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서로 협조해서 그런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자명하다. 자발성을 배제한 채로 위를 향해 요구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를 향해 애걸하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들은 응답하지 않을 것이고 추상적인 레벨에서 늘 민주주의를 외치며 동의를 구할 것이다. <부산행>은 딱 우리 수준의 영화다. 그러니 비판하고 말 것도 없는데 다만, 이 영화가 일정한 리얼리즘적 성취를 이뤄냈다고는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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