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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혜경의 영화비평]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영웅주의 논쟁’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문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이렇게 시작해보자. 당신은 지금 15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륙한 항공기의 기장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동력을 잃는 바람에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비상착륙을 해야 한다. 관제탑에서는 회항을 권유하지만, 40년 비행 경력의 당신은 ‘직관’을 발휘해 비상착수를 시도하고 기적적으로 승객 모두를 살리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당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155명을 살린 ‘영웅’이 되었다. 그날 밤, 당신은 악몽에 시달린다.

설리가 느낀 두려움의 본질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은 이 질문에 대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답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악몽은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꿈속에서 설리(톰 행크스)는 (실제와는 다르게) 회항을 시도한다. 하지만 충분한 고도를 확보하지 못한 비행기는 건물을 들이받고 폭파된다. 이 악몽은 약 15분 후, 인터뷰를 기다리던 설리가 뉴욕의 빌딩 숲에서 보게 되는, 건물로 돌진하는 비행기의 추락 환영으로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된다. 악몽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넋을 잃고 조깅하던 설리는 택시에 치일 뻔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동료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 하지만 헷갈려서는 안 된다. 설리는 회항하지 않았고, 놀라운 판단으로 모두를 살려냈다. 그런 그가 두려워해야 할 일이라고는 ‘비상착수한 자신의 판단이 틀려 승객을 살리지 못했더라면’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설리를 쫓아온 악몽은 정반대다. 그의 꿈에 따르면, 회항 후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꿈과 환영은 사실 악몽이 아니라 ‘안도’ 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설리의 표정에선 어떠한 안도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는 이 꿈/환영에 안도하지 않는가? 무엇이 그를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것인가?

사실 설리의 악몽은 한번 더 등장한다. 설리의 호텔 방, TV 속에서 사고 소식을 보도하던 앵커는 ‘허드슨강의 기적을 만든 설리 기장님, 당신은 영웅(hero)인가요? 아니면 사기꾼(fraud)인가요?’라고 질문한다. 침대에 누워 설핏 잠이 들었던 설리는 마치 이 소리를 들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난다. 하지만 TV 화면은 꺼져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상하다. 영웅의 반대말이 왜 사기꾼인지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승객 모두를 살려낸 그가 왜 자신이 사기꾼이 아닐까, 라는 두려움에 시달려야 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단지 분명한 것은, 앞의 두번의 악몽과 연결해보면 설리가 느낀 두려움의 본질은 결국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설리의 악몽으로 시작한 영화는 사고 이후 진행된 미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의 조사로 이어진다. 5번의 플래시백과 2번의 악몽, 여기에 1번의 환영까지 뒤섞여 간과되기 쉽지만, 이 영화의 서사는 온전히 설리가 NTSB 조사를 받는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더 단순히 말하자면 악몽에 시달리던 설리가 영화의 마지막, 청문회에서 시뮬레이션 최종 결과를 받아들고 자신이 정말 ‘내 일’(My Job)을 제대로 해낸 게 맞다는 확인을 받는 순간 끝이 난다. 그런데 이때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트우드가 실화를 영화화하면서 이 NTSB 조사과정에 허구를 덧붙였다는 점이다. 특히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회항을 했어야 한다는 NTSB의 판단을 한순간에 뒤집었던 설리의 ‘인간적 요소’ 주장은 사실(fact)이 아니다(‘인간적 요소’를 고려한 시뮬레이션은 설리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NTSB가 앞서 실시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결국 이스트우드가 (허구를 더해가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설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문제를 찾아내려 했던 NTSB의 조사를 극적으로 이겨내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 하는 일종의 ‘인정투쟁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미뤄두었던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설리>는 영웅에 관한 이야기인가?

‘기장으로서 내 일에 실패했다면’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설리>에서 이스트우드는 영웅주의 서사를 답습할 생각이 없다. 물론 (실존 인물) 설렌버거 기장은 ‘영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그런 그를 영화 속으로 데려와 (현실엔 없던) 질문들을 던져가며, 그가 했던 (영웅적인) 행동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교본 혹은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회항하지 않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비상착수한 설리의 선택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나’라는 질문에 하나씩 대답하며 영화를 진행시킨다. 결국 그의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선택이 설리를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위기의 순간, 모든 승객을 살려낸 설리의 행위는 영웅적이지만(결과), 그 행동이 있기까지 설리를 가장 먼저 작동시켰던 것은 사실 승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의도). 여기엔 이스트우드의 다소 위험한 가정이 놓여 있다.

설리는 생명의 은인이라며 감사를 표하는 승객의 인터뷰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TV를 꺼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설리의 이 얼굴을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에서 똑같이 본 적이 있다. 제대 후 아들과 카센터를 찾은 크리스 카일은 그곳에서 우연히 자신 덕분에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청년과 마주친다. 설리의 얼굴이 그랬듯 이 순간, 크리스의 얼굴에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들은 왜 기쁜 마음으로 감사인사를 받지 못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누군가를 구한다는 생각 이전에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탑승객 모두를 구했지만 설리의 불안이 사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까닭도 바로 여기 있다. ‘내 일’ 을 제대로 하지 못해 평생을 걸어온 분야에서 ‘사기꾼’이 되어버린다면? 비행기 출발 전 부기장(에런 에크하트)은 설리에게 그가 운영하는 회사에 대해 찾아보았다고 이야기하면서 홈페이지만 보면 직원이 100여명인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직원은 설리 혼자라며 ‘사기’가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던진다. 실제로 설리는 아내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번 사고에서 자신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다면 연금뿐 아니라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심지어 항공 운항 안전 회사)마저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불안해한다. 이 장면을 생각해보자. 비상착수한 비행기에서 탈출한 설리는 구조된 승객이 아닌 허드슨강 위에 떠 있는 자신의 비행기를 바라본다. 이 모습은 며칠 후, 조깅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전투기를 바라보는 설리의 모습과 정확하게 짝을 이룬다. 젊은 시절 설리는 위험한 상황에서 전투기를 무사히 착륙시키는 데 성공한다. 성공한 착륙과 실패한 착륙. 이 기억을 떠올린 설리는 괴로워하며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여기엔 (승객이 살긴 했지만) 실패한 착륙에 대한 설리의 패배감이 녹아 있다.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있었다 말하지만, 사실 설리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았던 자신의 결정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 말에 약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승객은 모두 살렸으나 아직 설리의 갈등은 끝난 게 아니다. 따라서 설리의 악몽의 시작은 (영웅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승객을 살리지 못했다면’이 아니라 ‘기장으로서 내 일에 실패했다면’에 더 가깝게 놓여 있다. 물론 둘 사이에 무슨 큰 차이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스트우드가 플래시백을 사용해 이 두개를 의도적으로 분리해놓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영화 속 ‘설리’(실존 인물 설렌버거가 아닌)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복잡해지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렇다면 이와 똑같은 논리로 우리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크리스를 (망설임 없이) ‘영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설리와 마찬가지로 카일 역시 ‘내 친구를 죽이려는 적군을 죽여 친구를 보호한 것뿐’이고, 군인으로서 ‘내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말하자면 <설리>는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둘러싼 ‘영웅주의 논쟁’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문처럼 보인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와 <아버지의 깃발>(2006)이 한쌍이었듯이, <설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스트우드의 반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메리칸 스나이퍼>로 한번 더 돌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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