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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무법자가 사라진 웨스턴 <로스트 인 더스트>

웨스턴은 서부라는 공간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주요 배경인 텍사스주는 남부에 더 가깝고, 몬태나주는 북부라 부르는 게 맞다. 정작 서쪽 끝의 로스앤젤레스는 웨스턴의 공간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서부는 상징적인 이름인 셈인데 동부의 반대편 정도로 파악하면 되겠다. 동부를 도시적인 공간, 즉 인간이 만든 규칙과 건물과 시스템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본다면 서부는 어떤 개념이 지배하는 공간일까? 자연이 지배하는 공간 정도가 어울릴 성싶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공간이란 또 무슨 말일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다 도시를 언급한 문장을 접했다. 그녀는 “집 밖에서 주로 생활하다 잠시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도시는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날씨가 기분에 영향을 줄지언정 생사 결정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공간이다”라고 썼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공간, 그곳이 바로 서부다. 땅의 순수함을 믿었던 사람들이 서부로 이동했고, 그 땅에 붙어살았던 인간에 의미를 부여해 서부의 신화가 완성되었다. 서부의 신화는 문명에 물들지 않은 땅을 기반으로 한다.

서부는 동부에 비해 그리 만만한 공간이 아니다. 웨스턴 속 서부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황야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이 부족해 ‘보이는’ 공간이다. <수색자>(1956)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에서 눈 내린 서부가 그렇게 낯설어 보인 이유를 기억해보라. 그것은 관습을 배반한 이미지였다. 적어도 웨스턴 속의 서부는 무언가를 심으면 금방 자라 배를 불리거나 돈을 거둬들일 수 있는 공간으로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서부에 도착한 농부들이 아무리 몸을 바쳤다 하더라도 그들은 웨스턴의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도무지 영화의 주인공으로, 웨스턴의 인물로 어울리지 않아서다. 그래서 고전 웨스턴은 서부 신화의 인물로 카우보이를 내세운다. 금욕적이고 고독한 인물. 그런 인물들은 수정주의 웨스턴과 스파게티 웨스턴의 시대로 이동하면서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온갖 무법자들이 들어선다. 설령 주인공급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욕망에 불타는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웨스턴을 만들어냈다. 도시에 적응해 돈을 잘 벌어들이는 사람과 정반대의 인물들, 무법자와 불한당들에게는 야만적인 서부가 더 적합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최초로 만들어진 웨스턴인 <대열차 강도>(1903)나 <은행 강도>(1908)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따로 말할 것도 없다. 곧 서부를 문명화할 철도나 은행을 터는 강도들이었다.

서부를 지배하는 공간, 은행

존 포드는 1961년에 수정주의 성향의 <투 로드 투게더>를 연출했다. 부패한 보안관을 통해 서부 영웅의 타락을 말하는 이 영화는, 길을 동행하는 두 남자의 웨스턴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타락을 야기하는 물질이 돈이라는 점에서 <로스트 인 더스트>와 연결해 읽을 만하다. 이듬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서부 영웅으로 등장하는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른 모습을 연기했다. 그런데 세기 전의 인물로 21세기의 형제를 읽는 건 어떤 면에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부의 몰락이란 주제로 <로스트 인 더스트>와 비교하기에 적합한 작품은 마이클 치미노의 역사적인 데뷔작 <대도적>(1974)이다. 말파조사가 제작했고 웨스턴의 전설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조지 케네디가 등장하며, 무엇보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제프 브리지스가 40년 전에 출연했던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다. 엑스트라조차 트렁크에 토끼를 잔뜩 싣고 다니다 풀어놓고는 총을 갈기는, 그런 유의 인간을 연기한다. 말 대신 현대식 차를 몰고 다니는 게 다를 뿐, 주요 인물들은 황야를 누비며 총을 갈기는 시대착오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무작정 달리는 거야”라는 신조로 사는 그들은 서부 무법자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예전에 털었던 은행을 다시 털기로 결정한다. 은행을 털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아이스크림차를 몰고 건설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그들에게는 순진함과 한심함이 공존한다. 그들만 바보 같은 건 아니다. 전국적인 화제를 낳았던 그들이 다시 은행 근처를 얼쩡거리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치미노는 그들에게 서부라는 거대한 놀이터를 제공했을 따름이다. 아마도 그는 옛 무법자 놀이에 즐거워하는 서부의 남자를 다시 불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대도적>은 낭만적인 영화다. 특히 브리지스가 분한 라이트풋은 은행털이를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스스로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룬 영웅으로 착각한다. 한편으로 <대도적>은 수정주의 웨스턴보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가까운 작품이어서 여정 끝에 씁쓸한 결말을 준비해뒀다. 어른들의 놀이에는 한계가 있는 법, <대도적>은 낭만적인 무법자가 생존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 진작 끝났다고 말한다. 극중 주유소 사장의 말- “재정 지원이 없으면 GM이나 국방부나 양당체제가 모조리 무너질 나라야”- 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은행털이 형제의 이야기다. 은행 강도 사이로 이상하게 긴 시퀀스가 있다. 대출 기한을 코앞에 두고도 형제는 느긋하게 맥주를 따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게 그들이 은행을 털 준비를 하는 방식이다. 그들을 뒤쫓는 늙은 레인저의 행동도 이상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는 형제의 방문이 예상되는 은행 앞 카페에 자리를 잡고 주야장천 대기한다. 밤이 내려도 숙소로 가지 않는다. 영국인 감독 데이비드 매켄지가 생각하는 텍사스의 삶은 그러하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시간은 그들의 편이기에 그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런 서부 남자들이 살아야 하는 땅의 모습은 정반대다. 어느 거리를 가더라도 ‘채무 구제, 빚에 허덕이나요? 신속 대출’ 같은 문구가 그들을 옥죈다. 텍사스의 황량하고 조용한 마을(촬영은 뉴멕시코에서 진행되었다)에서 시선을 끄는 건 그런 문구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이 은행인 건 당연하다. 서부를 지배하는 공간은 바로 은행이다.

뒤집힌 <대도적>의 첫숏

영화의 주인공은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토비지만 흥미로운 인물은 그의 형 테너다. <대도적>에 더 맞을 것 같은 그는 시대를 잘못 건너온 남자다. 강도질을 목격한 노인은 “은행을 털어 하루하루 사는 시대는 지나갔지, 한심한 것들”이라고 반응한다. 그가 저항하고 죽는 방식은 <하이 시에라>(1941)의 도적들을 빼닮았다. 죄인으로서 자각이 모자란 것이라기보다 평원의 제왕으로서 서부를 달리던 남자들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인물인 것이다. 늙은 레인저는 그와 대척점에 놓인다. <대도적>에서 여장까지 해가며 은행털이에 나섰던 라이트풋으로 분했던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한다. 청춘의 불꽃처럼 살다 죽은 라이트풋의 삶을 보상하려는 듯이 그는 엄격하고 까칠한 법 집행자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것이 노인의 지혜라 생각될지라도 과연 라이트풋이 공감할지는 의문이다.

토비는 깊이 있고 공감을 얻어내기는 하지만 영화적 인물로서 매력이 떨어진다. 그는 형보다 더한 폭력적 성향을 지녔으면서도 한번도 범죄 기록이 없을 만큼 영악한 남자다. 그에게 매력이 덜한 이유는 도시의 룰을 따르기 때문이다. 웨스턴의 남자답지 않게 가족에게 연연하기도 한다. 그는 어머니의 대출금을 갚고 농장을 되찾은 뒤 신탁에 맡겨 두 아들이 자신과 다르게 성장하도록 돕는다. 대출로 인해 힘겹게 살다 죽은 할머니의 손자는 농장에서 나오는 석유 덕에 윤택한 삶을 살 것이다. 거꾸로 은행의 큰 고객이 된 것이다.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건 복수의 방식이 아니며 웨스턴의 방식 또한 아니다. 놀랍게도 <로스트 인 더스트>의 마지막 숏은 <대도적>의 첫숏을 정확하게 뒤집는다. 영화는 긴 숏의 끝자락에 풀이 자라는 땅을 클로즈업한다. 그 땅은 누구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영화는 질문한다. 그 땅은 더이상 서부라 불릴 수 없는 땅이다. 테너의 말대로 죄다 죽은 땅이다. 엔딩에 흐르는 곡 <무법자 성향> 때문일까, <로스트 인 더스트>는 무법자가 사라진 웨스턴에 던지는 애처로운 노래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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