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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의 영화비평] <캡틴 판타스틱>의 독창적인 지점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올해 담임교사에게 당황스러운 말을 자주 듣고 오는데, 그중에는 영화와 관련된 것도 있다. 교사는 “<인천상륙작전>을 봤는데 정말 감동적이고 훌륭한 영화였어요. 여러분도 좀비들이 난리치는 이상한 영화 보지 말고 <인천상륙작전>처럼 좋은 영화를 보도록 해요”라며 목청을 돋웠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엄마들에게 영화를 보여달라 했고, 적잖은 학부모들이 기가 막혀 입이 벌어졌다. 엄마들의 카카오톡 대화방에선 종종 그랬듯 담임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지만 이런 일로 학교에 찾아가지는 못한다. 고작 “선생님도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는 거야”라며 아이를 달래거나, 다양한 교사를 만나는 것도 성장과정의 일부일 거라며 스스로를 달래는 정도다.

걱정되는 건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 여부가 아니라 균형 잡히지 못한 특정인의 세계관이 교실 안에서 정답처럼 전수되는 일이다. 전국의 수많은 교사들 개개인의 소신과 교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체화하는 토론이 가능한 시스템이라면, 이런 선생님을 만나도 걱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부모 세대 때보다 어렵고 복잡해졌을 뿐 한국 교실에서는 여전히 ○, X를 가리는 법만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 괴로운 거다.

지지와 비난 혹은 혐오와 연민 사이의 어디쯤에서 붙드는 난간

이런 고민을 하는 부모가 <캡틴 판타스틱>의 초반 10여분을 보면 절로 신이 난다. 숲속 6남매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수렵과 작물 재배를 통해 유기적 섭생을 이어가고 명상과 무술로 몸과 마음을 닦는다. 밤에는 부싯돌로 댕긴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나 <총, 균, 쇠>를 읽다가 어울려 악기를 합주하며 춤춘다. 여기까지만 보면 말 그대로 판타스틱한 홈스쿨링인 것 같은데, 이들의 균열은 생각보다 빨리 드러난다.

6남매의 선생님이자 아버지 벤(비고 모르텐슨)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학업 성취도는 반지원정대의 임무에 버금간다. 10대 중반의 셋째 딸은 내일까지 초끈이론에서 발전한 M이론을 정확히 이해한 다음 오빠와 토론해야 한다. 8살 다섯째 아들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대기업들이 어떻게 권리장전을 악용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로 소화해 논한다. 넷째 아들은 암벽등반 중 미끄러져 손목이 부러졌지만 아빠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완벽히 통제된 시간계획 속에 반복되는 체력훈련과 독서, 토론과 시험이 이어진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상에 동의하지만 불만도 쌓여간다. 영화는 요즘 한국이나 일본에서 유행하는 ‘자연과 더불어 놀며 배우는 웰빙 라이프 안내서’가 아니다. 얼핏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고 하는, 일종의 성장영화로 보일 수 있지만 역시 아니다. <캡틴 판타스틱>의 독창적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한 영화의 주요 캐릭터가 극중 아버지일 때 관객은 어떤 형태로든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극중 약자인 자녀들이 어떤 형태로든 그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딸에게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지도 몰랐던 <우주전쟁>(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버지나 그와 비슷한 <부산행>(감독 연상호)의 아버지처럼 인물들이 재난을 겪는 경우는 말할 것 없다. <천하장사 마돈나>(감독 이해영·이해준)에서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김윤석)나 유사 아버지(백윤식), 심지어 <돌로레스 클레이본>(감독 테일러 핵포드)에서처럼 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라 해도, 관객은 어린 인물들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아버지의 언행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많은 경우 극중 어머니 앞에선 마음의 무장을 풀어놓지만 아버지를 대할 때 심리적 옷깃을 여미게 되며, 이는 젠더의 문제라기보다 인류학의 문제에 더 가깝다. 관객에게 아버지 캐릭터는, 지지와 비난 혹은 혐오와 연민 사이의 어디쯤에서 붙드는 난간 같은 것일 때가 많다. 영화의 속성인 시간적-공간적 일방성과 더불어 영화 감상에 인물 구성이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따질 때 중요해지는 논제다. 정리하자면 이 글에서 의지란 지지와 구분되며, 상영시간 동안 관객의 행위를 유지해주는 태도를 말한다. 이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캡틴 판타스틱>을 보는 당신은 아버지 벤에게 의지하는 관객인가.

요동치는 다리 난간을 잡고 출렁다리 건너기

아버지와 함께 마을에 나간 첫째 보데반이 또래 여자애들과 마주쳤을 때, 이성에 서툰 그에게서 쌓였던 불만이 새나온다. 20살이 다 되도록 여자친구 한번 만나본 적 없는 그는 트로츠키 ‘주의자’인지 트로츠키 ‘빠’인지를 놓고 아버지한테 대든다. 틀리지 않은 아들의 말에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벤을 볼 때, 관객이 잡고 있는 난간은 그의 눈동자처럼 흔들린다. 보데반은 하버드와 프린스턴 등 아이비리그 명문대에 죄다 합격했다는 통지서를 받고, 다음 장면에서 벤은 아내가 자살했다는 전화 통보를 받는다. 보데반의 대학 지원은 아버지 몰래 어머니와 함께 추진해온 일이었다. 합격 통보(아버지의 교육 철학과 배치)와 자살 통보(아버지에게 원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가 순차적으로 제시되고 그 사이에 죽은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 관객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벤의 지향은 자본주의 문명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항하는 것인가? 벤이 군림하는 홈스쿨링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가?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을 기회가 주어지는가? 보데반이 하버드에 진학해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로 성장할 확률은 상당히 높지 않은가? 극 종반 반전을 부르는 아이들의 공통된 선택은 완벽하게 자발적인가? 헷갈림은 계속된다. 이 영화를 볼 때 왠지 모를 생소함을 느꼈다면 당신이 건너는 출렁다리가 큰 폭으로 흔들려서가 아니다. 다리에 난간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엄마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둘째 딸 키엘러가 <롤리타>를 읽고 있다. 아버지가 책에 대해 말해볼 것을 주문한다. 줄거리를 읊어서는 안 되고 ‘재미있다’처럼 부정확한 형용사를 써도 안 된다. 키엘러는 <롤리타>의 주인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아동 성추행이잖아. 그런데 그게 아름다운 거야. 문제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심정적으로는 그놈이 싫어. 동시에 안됐다는 생각도 들어.” ‘아름다운 부도덕’으로 요약되는 키엘러의 감상은, 이후 “아름다운 실수”를 범한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그의 과격한 임무 탓에 셋째 딸 베스퍼가 죽을 뻔했을 때- 그것이 현대 의학에 의해 증명될 때- 여기서부터 영화는 출렁다리 건너기를 끝내고 안정적인 길을 택한다. 그러고는 의지할 곳을 찾기 힘들었던 관객의 영화보기와 별개로 영화는 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 다리에서 내려온 관객은 마음을 데우고 지지 대열에 합류한다.

벤의 가족공동체가 처음 균열을 보여주는 초반 숲속 합주 장면. 평소 가장 불만이 많던 넷째 아들 렐리안이 아버지의 연주에 어깃장을 놓으며 엉뚱한 박자를 두드린다. 연주는 곧 망가질 것 같았지만 아버지와 맏이가 리듬을 조율하고, 이내 한결 흥이 나는 음악회가 펼쳐진다. 영화 전반을 함축하는 이 장면과 함께 약간의 수정주의를 채택한 벤이 아이들과 식사하는 엔딩은, 관객의 흔들리는 여정을 양쪽 끝에서 탄탄히 잡아준다. 출렁거려도 떨어질 걱정 없는 이 영화의 관객은 벤의 실험만큼이나 보기 드문 이 영화의 형식 실험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사족으로, 이 영화의 엔딩은 <디센던트>(감독 알렉산더 페인)의 마지막 숏과 함께 아버지-자녀가 나오는 가장 인상적인 엔딩 목록에 올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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