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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의 영화비평] 신카이 마코토의 극한의 세밀한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마법적 체험
송경원 2017-01-17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지막 5분이 다 했다. 영화가 끝난 뒤 진하게 잔상을 남기는 건 시간을 뛰어넘어 끝내 만나고야 마는 소년, 소녀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니라 사진보다 아름다운 몇몇 장면들이다. 전체를 다 보지 않고 마지막 5분만 봤더라도 나는 이 작품에 충분히 만족했을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의 후반 5분은 그것만 따로 잘라서 단편으로 구성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독립되고 완결된 구성을 선보인다. 후일담으로서 앞서 펼쳐둔 상황을 정리한다기보다 차라리 마지막 5분의 이야기를 위해 90분간의 전사(前史)를 깔아둔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혜성 재해로부터 미츠하와 이토모리 마을을 구한 후 8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후반 5분의 이야기는 내레이션, 독백, 심상이 투영된 풍경, 빠른 편집과 세밀한 배경까지 <별의 목소리>(2002)나 <초속5센티미터>(2007)의 정서와 호흡을 연상시킨다. 미츠하와 타키의 인연을 90분간 보여주는 대신 몇 십초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줬다고 해도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너의 이름은.>은 초반 5분이 전체의 구성을 압축하고 있다. 혜성이 구름의 바다를 뚫고 떨어지는 환상적인 작화를 시작으로 미츠하와 타키의 독백이 끝나면 록밴드 래드윔프스의 <꿈의 등불>이 이어진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는 보기 드물게 O.S.T를 오프닝 전면에 배치한 구성은 전체 줄거리를 알고 난 뒤에 다시 보면 완전히 색다르게 다가온다. 영화 전반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노래가사는 물론이거니와 뮤직비디오처럼 삽입되는 도쿄의 풍광, 시간의 흐름을 그린 소년과 소녀의 스틸컷들은 일종의 예고편이자 그것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단편애니메이션이라 봐도 무방하다. 요컨대 <너의 이름은.>은 짧은 호흡의 단편 혹은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영상 여러 편을 나름의 법칙 아래 조립한 입체적인 그림이다. 여기서 핵심은 뼈대가 되는 서사들이 아니라 축약된 영상과 음악의 생생함이다. 이 짧은 호흡의 영상들은 시간축이 어긋난 소년, 소녀의 만남이라는 중심 서사를 각기 다른 시점과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식상한 소재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서사가 아닌 묘사, 신카이 마코토의 시작과 끝

사실 전형적이고 익숙한 소재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식상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빤한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조차 묘사의 감각으로 접근하는 신카이 마코토는 여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들과는 인식의 결을 달리하는 측면이 있다. 소년과 소녀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결국 만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어떤 각도, 어떤 시점, 어떤 구성으로 압축시키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의 단편으로 구성 가능하며 <너의 이름은.>은 실제로 그것을 실행한다. 전작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2011)이 전통 서사의 세계에 무리하게 편입하려 했던 결과물이라면 <너의 이름은.>은 중편 <언어의 정원>(2013)을 거친 후 자신의 장기와 장편영화의 호흡의 절충안, 혹은 경계에서 발견한 하나의 답인 셈이다.

거시적인 구성뿐 아니라 미시적인 장면 편집에서도 이러한 묘사의 묘는 반복된다. <너의 이름은.>에선 단순한 행동도 다양한 앵글로 묘사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아침 식사를 차리는 과정조차 평범하게 롱숏으로 보여주는 대신 수평을 잡은 가스불, 로앵글의 밥솥, 하이앵글의 달걀 프라이를 차례로 이어 붙인다. 화면 각각에 어떤 특별한 서사적 의미나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새겨져 있진 않다. 사건의 정보를 전달하는 서사적인 차원에선 로앵글이든 수평앵글이든 롱숏이든 클로즈업이든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는 한 문장이면 충분한 사건도 이같은 다채로운 앵글을 거치고 나면 좀더 경쾌하고 풍성하게, 달리 말하면 리듬감 있게 전달된다. 서사적으론 의미 없을지라도 묘사 차원에서는 특별해지는 것이다.

매일 오가는 익숙한 골목길이 지루하다면 고개를 돌려 뒤를 한번 바라보라. 한 발짝만 옆으로 걸음을 떼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모험을 위해 그리 먼 곳까지 떠나지 않아도 좋다. 매일 쓰던 세면대의 주변도 만약 선반 뒤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경치를 보여준다. 매일 일어나는 침대 주변도 책장 밑 의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풍광을 발견할 수도 있다. 좋은 묘사란 그런 것이다. 대상을 촘촘히, 동시에 새로운 각도로 그려보면 우리가 익숙하다고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를 감각들이 깨어나는 법이다. 신카이 마코토가 단편 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건 단지 1인 작업에서 출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글이든, 그림이든, 이야기든 대상의 특정 상태를 최대한 손실 없이 옮겨오는 데 집중해왔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들이 장면을 쪼개고 앵글을 나누고 같은 대상을 다각도에서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은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모사하기 위한 수단이다. 한순간, 한 가지 대상, 한 가지 심상, 그 무엇이든 묘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면 일반적으로 서사는 사건의 연쇄를 따른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통해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소설로 치자면 단편소설은 묘사에 좀더 힘을 발휘하고 장편의 경우 서사의 조밀함이 필수적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출발부터 순간의 정서를 찍어내는 것에 좀더 특화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아닌 게임 업계에서 경력을 시작한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일본에선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두고 ‘세카이계’라는 비평적 카테고리를 적용하곤 하는데, 대략 세계의 종말 등 거대하고 추상적인 문제 앞에서 나와 너, 두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에 집중하는 작품들을 일컫는다. 아직 정확하게 경계를 특정할 수 없는 열린 정의이긴 하지만 2000년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향을 짚어내는 데 유효한 카테고리 중 하나다. 이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분석은 “<너의 이름은.>과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의 완결”(KMDb 칼럼, 선정우 글)에서 충실히 다루고 있으니 이 글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를 ‘세카이계’의 문을 연 대표작 중 하나로 꼽고 있고, 이번 <너의 이름은.>이 ‘세카이계의 총괄이자 다음으로 도약하는 증명’이라는 분석을 짧게 인용하려 한다.

<너의 이름은.>은 이전 작품보다 확실히 대중적이다.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의미는 최소한의 인과관계를 제시하며 설득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여타 세카이계 계열의 작품처럼 그저 설정을 던져두는 것이 아니라 (성패와 관계없이) 적어도 확실히 설명은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되 주변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서사로의 확장성도 있다. 세카이계 작품들이 지닌 사회성의 단절 내지 무관심은 2000년 이후 일본 서브컬처의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의 근거로 사용되곤 한다. 서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세카이계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무수한 자의적인 세계다. 설정만 던져둔 채 인과는 무시되기 일쑤이며 상황 해결에도 관심이 없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보면 그것은 전통적인 서사 관점에서의 인식일 뿐이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는 목적과 방향이 무척 분명하다. 우주적인 설정은 너와 나의 거리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오직 내가 느끼는 감각, 감정의 묘사다. 최근 신카이 마코토와의 인터뷰에서 인상 깊었던 답변 중 하나는 묘사에 대한 그의 인식이었다. 가령 불안한 표정을 묘사한다고 했을 때 “소설의 경우엔 ‘미아처럼’이란 한 단어로 상태에 대한 비유가 가능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도저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한 상황을 해결하고 싶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법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는 바로 그 ‘미아처럼’이라는 묘사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여러 상황을 설정하고 사건을 구성하는지도 모르겠다. 서사가 중심이 되는 작품에서 슬픔, 기쁨 등의 추상적인 감정은 사건들의 결과에 해당한다. 반면 신카이 마토코의 세계에서 감정은 오롯이 그려서 전달해야 할 대상이다. 외려 서사와 설정 등 그간 이야기 매체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던 요소들이 장식 내지는 도구로 활용된다. 요컨대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이 느낀 특정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 고백했듯 감정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내면은 오직 자신의 경험에 비쳐 짐작될 따름이다. 이 지점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이야기를 출발하는 방식, 내면을 묘사하는 방식이 결정되는 것 같다. 감정 그 자체를 그릴 수 없다면 감정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극한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모사하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트레이드 마크인 포토리얼리틱한 배경은 이를 위한 방법론인 셈이다.

한없이 사진에 가깝고, 결코 사진이 될 필요가 없는

<너의 이름은.>이 전작들에 비해 대중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이야기로서 최소한의 설득의 요소를 갖췄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한마디로 말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서사와 소재가 매력적이고 특별한가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환상적인 설정과 애틋한 사연보다 오래 기억되는 것은 구름을 가로지는 혜성, 이토모리 마을의 풍광, 손바닥에 쓴 ‘좋아해’란 한마디,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도쿄 도심의 풍경들, 너를 만나러 가는 젖은 골목길, 계단 사이의 녹음 등 사진과도 같은 이미지들이다. 마치 망막에 각인되는 세밀한 풍경은 그 자체로 극상의 판타지에 가까운 체험을 제공한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신카이 마코토의 힘은 결국 여기서 나온다. 중요한 건 일련의 이미지들이 여전히 그림의 영역에 있다는 점이다. 실사와 구분하기 어려운 컴퓨터그래픽과 달리 신카이 마코토의 작화는 펜으로 그려지고 채색된 2D 영역에서 극한의 세밀함을 추구한다. 사진을 닮은 그림이라는 점, 이것이 비유의 문장처럼 우리에게 생경한 기분을 안긴다.

만약 진짜 사진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사진 이미지는 당연한 시지각 정보로 처리된다. 하지만 사진에 가까운 그림은 최종적으론 사진보다 더 디테일해 보이는 마법을 발휘한다. 그림이라는 재인식의 작업을 거친 이미지는 같은 풍경이라도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마치 매일 보던 골목길을 한 걸음 다른 각도에서 볼 때의 새로움처럼 일상의 풍경을 묘사한 장면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도쿄 도심의 빼곡한 빌딩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마저 (사진과 닮은) 그림으로 그리면 신기한 볼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신카이 마코토의 힘은 리얼(사실)이 아니라 리얼리틱(사실적)에 있다. 이는 CG 그래픽이 추구하는 지각적 리얼리티와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본질적으론 큰 차이를 드러낸다. CG가 사실과 동일한 감각을 흉내내는 것이라면 포토리얼리틱한 그림들은 사진이 전달할 수 없는 감각을 일깨운다. 일상에 깃든 판타지라고 불러도 좋은 이 감각들은 차라리 문학적인 수사에 가깝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화에서 배경은 인물들의 심상이 투영된 대상이다. 일차적으로 구름의 형태, 신호등의 깜박임 등은 수사적인 의미에서 인물의 내면이 투사된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심상이 투여된 상징물은 서사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활용법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는 감정 그 자체를 대상에 투사하지 않는다. 외롭다고 외롭게 서 있는 신호등을 그리지도 않고, 혼란스럽다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묘사하지도 않는다. <너의 이름은.>의 배경들 역시 서사적으로 하나하나 의미를 품고 있진 않다. 대신 우리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한번쯤 스쳐지나갔을 법한 감정들이나, 비온 뒤 골목길을 채운 촉촉한 공기들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하지만 사실과는 다르게 선보일 때 촘촘한 배경에 여백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당신이 걸었던 골목길의 습기까지 모사된 화면이 자신의 일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사진도, 정밀한 CG도 흉내낼 수 없는 그림의 마법이다. ‘리얼’이 전달하지 못하는 것까지 끌어내는 ‘리얼리틱’의 효과는 어쩌면 일종의 착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서사와 정확히 조응하는 배경이 아니기에 누군가에겐 신기한 구경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설명이 아닌 묘사의 영역에 뿌리를 둔 신카이 마코토의 마법은 때때로 그 어떤 설명보다 정확하게 설렘, 풋풋함, 청명함 같은 감정들을 전달한다.

물론 이 모든 감정과 감각들은 신카이 마코토라는 필터를 거친 결과물이다. 미성숙한 남자아이의 시선으로 감각하고 재구성된 세계라고 해도 좋겠다. 신카이 마코토 작품 속 인물들은 대체로 착하고 서툴다. 상황을 해결해나가는 방식도 자기 본위이고 간혹 상대에 대한 배려나 이해가 생략되기도 한다. 철저하게 자신(소년)의 시점을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에서 타인의 내면은 오직 자신의 경험에 비춰 짐작될 뿐이다. 뭉개고 지나치며 미처 채우지 못한 서사의 구멍들을 신카이 마코토는 묘사의 환상적인 힘으로 메운다. 때론 실패하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아쉬움들이 도리어 사진과는 또 다른 그림의 힘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보편타당한 대중 서사라는 압박 속에서도 빛과 색의 마술사는 여전히 시각적 황홀경에 도달하는 길을 잊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그게 전부라며 아쉬워하겠지만 누군가에겐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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