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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의 영화비평] 2010년대의 블랙 퀴어 무비와 <문라이트>
황인찬(시인) 2017-03-07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성결혼 법제화 이후의 퀴어 무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혹은 오바마의 8년 임기 이후의 블랙 무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물론 몇 가지 상징적인 사건만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Black_Lives_Matter’ 운동이 상기시키듯 인종간 갈등과 격차는 변함없이 실재하며, 수많은 LGBT 청소년들(그리고 성인들 역시)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상징적 사건 이후의 예술이 그 이전의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계속 송신할 수는 없다. 미국 연방 헌법재판소가 동성결혼 금지에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 2015년이고 오바마가 2016년에 임기를 마쳤으니, 2016년에 등장한 블랙 퀴어 무비를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무관하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야만 한다. <문라이트>는 빈민가 흑인 게이 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영화이며 흑인, 게이, 소년 세 키워드에는 모두 동등하게 방점이 찍혀야만 한다. <문라이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이 흑인 사회 안에서의 퀴어 성장물이라는 데 연원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겹겹이 싸인 소수자성으로 인해 위축되고 상처받은 소년의 슬픔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문라이트>는 3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소년에게 주어진 세 이름, 그것이 의미하는 세 면모를 각 부의 제목으로 부여한다. 각 부의 표제는 소년, 게이,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되, 각 부의 서사에서는 흑인, 게이, 소년이라는 키워드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 영화가 시적인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각 부가 사실상 같은 주제를 반복하며 변주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문라이트>는 선형적 서사를 따르는 성장물이다. 3부 구성의 선형적 서사 맨 앞에 ‘리틀’이라는 제목을 단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유년기에서 촉발되는 샤이론(애슈턴 샌더스)의 내적 갈등이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따라간다. 마약 중독자 어머니, 남성성의 억압, 부성에 대한 그리움, 아직 자각하지 못한 성적 정체성 등이 그 갈등의 주를 이룬다. 유년 시절부터 남성성을 강조하는 흑인 사회 안에서 샤이론은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이고, 가난에 짓눌린 어머니(나오미 해리스)는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양육을 버거워한다. 그런 샤이론에게 의지가 되는 것은 생판 남인 후안(마허샬라 알리)뿐이지만 그 역시 샤이론이 겪는 연쇄적 불행의 한축을 담당하는 마약상일 따름이다. 이러한 갈등은 2부 ‘샤이론’에서 심화되며, 샤이론이 겨우 유지해온 삶의 조건들이 모두 무너지는 과정(혹은 이미 무너져 있음)이 그려진다. 후안은 이미 죽었고, 어머니는 마약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자신을 잃었으며, 샤이론의 유일한 친구이자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대상이었던 케빈은 샤이론을 괴롭히던 친구(호모포빅 디나이얼 게이- 자신이 게이임을 부정하는 동성애 혐오 게이- 임이 암시된)에 의해 샤이론을 배신한다. 여기서 샤이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그 자신을 파괴하는 것, 지금까지의 유순하고 내성적인 자신을 파괴하는 일뿐이다. 3부 ‘블랙’은 자신을 버린 샤이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후안과 마찬가지로 마약 파는 일을 하며, 근육질의 거구가 되었지만 때로 소년 시절과 다름없는 눈빛을 드러내곤 한다. 또 여전히 유년 시절 어머니가 남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배신한 케빈을 그리워한다.

성장 없는 성장 이야기

이상의 줄거리가 보여주듯, <문라이트>는 성장 없는 성장물이다. 혹은 억압으로 인해 성장이 불가능한 소년의 삶을 조망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샤이론은 20년이 지나서도 ‘리틀’이라 불리던 시절의 (정체화를 하지 못한) ‘흑인 게이 소년’에 멈춰 있다. 다시 물어보자. 2016년에 등장한, 퀴어 정체화에 실패한 흑인 소년의 성장 영화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아함과 다소의 무력함이 자아내는 회고적 어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3부의 시간이 2015년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3부가 시작하자마자 샤이론의 차량에서 들려오는 <Play That Funk>는 2015년에 발매된 음악이다. 영화와 영화 바깥의 시간을 마지막에 일치시킴으로써 회고적 성격을 한층 두드러지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리라). 2015년에도 여전히 샤이론은 그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가장 사랑받은 대통령 중 하나가 된 시대라 하더라도, 동성애자들의 동등한 혼인이 제도적인 인준을 받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회에는 인종간 격차가, 고통받는 동성애자들이 존재한다. 또한 2010년대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꺾이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감소하며, 성장의 불가능을 모두가 체감하고 있는 시대다. <문라이트>는 성장하지 못한 소년을 통해 매우 시기적절하게 이 변화 없음과 미래의 불투명함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문라이트>의 퀴어 서사가 다소 고전적이라는 점 역시 당대에 대한 비평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영화가 자아내는 어딘가 시대가 어긋난 듯한 묘한 감각이 세계적 보수화의 흐름 속에서 시계가 뒤로 돌아가고 있는 분위기와 맞물리며 우리에게 생각할 지점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라이트>는 성장 불가능의 세계에서 절망을 외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한축에서는 흑인 사회의 억압된 남성성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찰을 은근하게 수행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소년의 내면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고, 다시 그 시적 은유로써 이 성장 불가능의 세계를 통과한다.

<문라이트>는 ‘흑인 게이 소년’이라는 주제를 변주하며 반복함으로써 시적인 리듬을 만드는 한편,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시학’을 연상케 하는 ‘물’과 ‘불’의 은유를 활용하며 3부 구성을 통해 물과 불의 변증법적 합일로 나아가는 전개를 보인다. 바슐라르식으로 말하자면 1부의 물, 2부의 불, 3부의 공기(승화)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문라이트>의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들은 물과 관련되어 있다. 샤이론이 후안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것은 바다이며, 케빈과 마음을 교환하는 공간 역시 바닷가이다. 바다는 치유의 공간이면서 사랑의 공간이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밤바다의 이미지가 묘한 불안을 담아낼 때는 물론이고, 바닷물 속에서 후안이 샤이론에게 삶에 대한 긍정을 전하는 대목에서조차 바다는 불안함을 전달한다. 2부에서 케빈과 바닷가에 앉은 샤이론이 “난 너무 많이 울어서 어쩔 땐 눈물로 변해버릴 것 같아”라 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물은 샤이론에게 있어 부드러움과 유순함 혹은 침묵과 불안의 은유가 된다. 반면 불은 샤이론과는 다른 것, 미처 알지 못한 샤이론의 다른 면, 억압된 성적 욕망과 분노의 은유가 된다. “너는 물을 좋아하지? 내가 불을 소개해줄게”라는 케빈의 대사 이후 케빈과 샤이론의 성적 접촉이 이어지며, 이 시퀀스 이후 샤이론은 드러낸 적 없는 강렬한 분노와 폭력을 보이며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물이 불을 만나 일어나는 화학작용이라 해야 할까. 물이었던 샤이론은 증발하여 사라진다. 이어지는 3부에서 샤이론으로서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리고, 근육질의 몸과 금니 등의 외골격으로 감싸였으나 그 내면은 텅 빈, ‘공기’(혹은 空)와도 같은 ‘블랙’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이 증발, 승화의 이미지는 3부의 결말에 이르러 다시 한번 나타난다. 3부에서, 샤이론이 케빈(불을 다루는 요리사로 일하는)과 다시 만나 케빈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영화는 푸른 가스불로 물이 담긴 냄비를 가열하는 모습을 화면 가득 비춘다. 이 물과 불의 만남 직후 케빈은 샤이론에게 내가 알던 샤이론은 어디 갔느냐고, 너는 누구냐고 묻고, 결국 샤이론이 자신의 마음을 케빈에게 다시 고백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다시 이뤄지는 물과 불의 결합은 증발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승화하여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퀴어 정체화를 두려워하던 샤이론이 고백을 통해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회복하고 성장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 없는 성장물로서의 <문라이트>는 물과 불의 변증법적 전개를 통해 샤이론의 아주 작은, 그러나 매우 의미 깊은 질적 변화를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외면할 수 없는 <문라이트>의 시도

전망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성장을 발견할 수 있을까. 논리적 언어로 불가능한 그것을 <문라이트>는 비논리적이며 시적인 장치를 통해 통과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라이트>를 보며 어딘가 얼떨떨한 기분을 느낀 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극적인 성장의 동기가 영화의 논리 안에 존재하지 않음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라이트>의 감성적인 어조가 다소 민망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스스로 전망 없는 세계를 뚫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시적 은유를 활용하는 데 있어 다소의 나르시시즘을 동반한 무력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그리고 2017년의 지금 이 시점으로서는 이 영화의 시도를 비웃는 일이 불가능하다. 우리 삶의 전망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이라면, 전망 없음을 명징하게 인식하면서도 그로부터 다시 새로운 전망을 상상하며 애써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 이야기를, 한 소년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2010년대의 퀴어 무비는, 블랙 무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문라이트>는 나름의 방식으로 답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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