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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의 영화비평] <러빙>이 실화를 극화하는 방식
송경원 2017-03-14

영화사에 남을 걸작은 아니다. 아니, 올해의 영화에 뽑히기도 힘들 것이다. 심지어 제프 니콜스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긴 어렵다고 본다. <러빙>은 얼핏 욕심을 내려놓은 영화 같다. 애초에 제프 니콜스 감독이 실화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연출했다는 게 의외다. 실체 없는 불안의 정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감독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기엔 여의치 않은 조건이다. 아마도 무난하다는 반응은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된다.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제프 니콜스 감독은 <테이크 쉘터>(2011)에서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정을 묵시록의 무대로 변주시키며 불안한 상상력을 펼쳐낸 전력이 있다. 개인의 예민한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영화적 공기로 치환시킬 수 있는 재주꾼에게 ‘러빙 부부’의 단조로운 실화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제프 니콜스의 영화가 <러빙>을 통해 한 단계 도약했다고 생각한다. ‘실화의 재현’이라는 생경한 경험을 앞둔 제프 니콜스 감독이 이번엔 자신의 장기를 부각시키는 대신 모자란 구석을 메우며 바닥을 다지려 애썼던 것처럼 보인다. <러빙>의 연출은 그만큼 고전적이며 기본에 충실하다. 하지만 안정적인 연출을 밋밋하다는 인상과 곧장 연결짓는 건 안일한 접근이다. <러빙>은 제프 니콜스의 전작들만큼이나 긴장된 공기로 가득 차 있고 인물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매 순간 생생하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담담함은 재기 넘치는 젊은 감독이 ‘실화의 재현’이라는 거대한 영화적 질문 앞에서 필사적으로 응답하는 순간들이다. 넘치는 자의식에 섣부른 기교를 뽐내기 급급한 영화들 사이에 <러빙>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근작들이 지향하는 무난함, 혹은 비개성적인 태도가 묻어난다.

가족, 사랑, 불안, 제프 니콜스의 세 가지 키워드

<테이크 쉘터>, <머드>(2012), <미드나잇 스페셜>(2016)까지 제프 니콜스의 전작들은 장르도 형식도 제각각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제프 니콜스만큼 일관된 주제에 천착하는 감독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세편의 전작이 건드리고 있는 심층 주제는 결국 하나, 가족이다. 가족의 해체라는 불안에 맞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제프 니콜스가 던지는 질문은 이 한줄의 텍스트를 벗어난 적이 없다. <테이크 쉘터>는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중년 남성 커티스(마이클 섀넌)의 불안을 형상화한다. 커티스의 공포는 세계가 끝나는 게 아니라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며 그의 망상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쓸모를 확인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머드> 역시 기본적으론 성장담의 외연을 갖추고 있지만 영화의 동력은 가족을 만들고 사랑받고 싶다는 소년, 소녀의 상처 입은 욕망이다. <미드나잇 스페셜>에 이르면 가족의 유대라는 상상력을 SF 저 끝자락까지 밀고 들어간다. 완성도나 형식은 천차만별이지만 결국 세편의 영화 모두 가족, 사랑, 불안, 이 세 단어 안에 수렴되는 셈이다.

이쯤 되면 <러빙>을 차기작으로 고른 심정도 이해가 된다.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불안을 형상화하는 제프 니콜스의 표현력에 방점을 찍고 정의내리지만 사실 제프 니콜스라는 우주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 그리고 사랑이 있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나 사랑을 잃을 것에 대한 불안은 온갖 장르들을 빨아들여 제프 니콜스의 화술로 거듭난다. 제프 니콜스는 러빙 부부의 실화를 두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 정의내렸다. 실존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러빙>이란 제목은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중의적인 표현이다. 가족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좋겠다. <러빙>은 흑인 인권사에 한획을 그은 러빙 부부의 투쟁을 다루고 있지만 제프 니콜스는 러빙 부부의 변함없고 당연한 애정을 보여주는 데 내내 몰두한다. 영화 속 리처드(조엘 에저턴)는 버지니아 법원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은 후 두번이나 고향으로 몰래 잠입한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산파를 해주면 좋겠다고 아내가 말했을 때, 다른 한번은 워싱턴 도로변에서 놀던 아이가 다친 후 아내가 고향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다.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위해 아내의 바람을 묵살하지도 않는 믿음직한 가장의 전형이라고 해도 좋다. <러빙>이 120분을 들여 보여주는 건 이런 순간들이다. 아내에게 헌신하는 남편, 남편을 믿고 의지하는 아내, 외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서로에게 충실한 두 사람. 아마도 제프 니콜스가 그토록 여러 이야기 속에서 찾아 헤맸던 이상향인지도 모르겠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그리고 볼 수 없는 것

<러빙>은 실화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제프 니콜스 감독은 추구했던 이상적인 가족을 마음껏 묘사한 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의외의 성찰을 가능케 한다. 제프 니콜스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을 배우 마이클 섀넌이 사진작가 그레이 빌렛 역을 맡아 러빙 부부를 유명하게 만든 한장의 사진을 찍는 장면이 있다. ‘결혼한 죄’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이 기사 속 사진은 러빙 부부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는 계기가 된다. 리처드 러빙이 아내의 무릎을 베고 거실에서 TV쇼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사진은 이들 부부가 여느 평범한 가정과 다르지 않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 그레이 빌렛의 사진은 진실이 아니라 상징이다.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 녹아들어 찍었다고 하지만 결국 사진작가에게 선택된 한장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적지 않은 실화영화들이 취사선택된 ‘이야기’라는 점을 애써 뭉갠 채 정보의 객관성, 다시 말해 ‘실제’라는 요소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눈앞의 이미지가 실제와 다름없다는 착시는 많은 것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나는 영화가 현실과의 경계를 유지한 채 추상을 전하는 도구라고 믿는다. 영화에는 언어에 담기지 않는 감각, 감정들을 구체화시키는 힘이 있다. 실제와 실감, 두 가지가 무분별하게 섞여들어갈 때 영화는 위험한 물건이 되기 십상이다. 제프 니콜스가 실화의 재현에 대한 윤리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진 않았으리라 본다. 하지만 ‘주관적인 시점의 이야기’라는 자기 고백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러빙>은 결과적으로 영화가 실화를 재현하는 적절한 거리에 대한 하나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러빙>은 인권운동사에 남을 만한 유명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법정 투쟁 과정은 생략한다. 대법원의 판결이 나올 때도 영화가 보여주는 건 마당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러빙 부부의 평범한 시간들이다. 이러한 생략은 일차적으로 러빙 부부를 역경을 극복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감독의 판단에 따른 선택이다. <러빙>에는 지난한 법정 싸움의 과정도, 당시의 반대 시위도, 심지어 그 흔한 백인들의 직접적인 린치도 없다. 시대적 상황이라고 해봐야 뉴스 화면을 통해 단편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전부인데, 실상 우리가 1950년대를 바라보는 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 <러빙>은 대부분의 실화영화가 답습하는 모든 실-實-ture의 영역을 비껴간다. 그렇다면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무엇인가. 카메라는 철저히 제프 니콜스라는 화자의 시점으로 재해석된 화-話-story의 영역에 머문다. 쉽게 말하면 러빙 부부의 일상을 찍는 셈인데, 이들의 삶은 마치 섬과 같다. 실제 역사적인 사건의 한복판에 놓여 있을 것이 분명할 텐데도 이들이 직접 압박을 받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리처드 러빙이 받는 위협도 사실 실체가 없다. 대신 우리는 가족을 잃을지 모른다는 리처드의 불안, 아내인 밀드레드(루스 네가)와 나누는 눈빛, 침묵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도닥거림을 목격한다. 무엇을 재현하고 무엇을 재현하지 않을 것인지의 문제에 있어 제프 니콜스의 선택은 분명하다. ‘사실’이라고 인정될 만한 공공의 기억은 대부분 생략하는 반면 이야기의 영역에 속한 것들, 이를테면 사적인 교감의 순간이나 개인이 느낄 실체 없는 압박과 불안은 꼼꼼히 채워넣는다. 말하자면 실화를 바탕으로 하되 늘 자신이 잘하던 연출들을 반복한다. 덕분에 <러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대부분 쉽게 침범하는 경계, ‘이것은 진짜’라는 식별 불가능한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화자에 의한 주관적 해석이며 <러빙>은 그 점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영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역사에서 소재를 빌려왔을 뿐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제프 니콜스의 화답이나 다름없다. 사진작가 그레이 빌렛의 자기 고백적인 시퀀스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아마 러빙 부부도 마냥 서로 애틋하고 아끼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포착하지 않는 숱한 내적 갈등의 시간들이 쌓여 있겠지만 영화 <러빙>에서 그런 순간들은 볼 수 없다. 정확히는 보여주지 않는다기보다는 <러빙>이라는 영화 세계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이것은 완전한 사랑을 일궈낸 가족에 대한 신화(神話)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야기(實話)를 믿고 싶은 이야기로 옮겨오는 것, 영화가 실화를 다루는 과정은 결국 이 단순작업의 반복이며 이때 필요한 것은 단지 스스로 실제라고 위장하지 않는 태도 정도다.

1초의 지연 속에 허락된 영화적 마법

그렇다면 신화가 된 이야기 안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벗어나 매체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즉 눈앞의 이미지를 현실로 감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반대로 말해 눈앞의 이미지를 현실로 감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실제인 척 위장해서는 안 된다. 온전히 감독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 안에서 영화는 관객이 인물의 감정에 동화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을 심어둔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제프 니콜스는 이미 증명된 재능을 뽐낸다.

가령 영화 속 유일하게 나오는 법정 장면으로 버지니아주 판사에게서 추방 명령을 받는 순간이 제시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서 나오는 게 아니라 러빙 부부가 체험한 순간이기 때문에 선택된 이 장면은 투쟁이라기보다는 투항에 가깝다. 공권력의 부당함과 과정의 부조리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러빙 부부의 쭈뼛거리는 눈빛이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하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이 순간 모든 인물들을 침묵시킨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멀찍이서 잡은 리처드 러빙의 복잡한 표정 정도다. 누군가는 이 표정에서 불안을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스쳐 지나가는 안도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실체적 진실은 오직 이 모호한 인물의 표정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리처드로 분한 조엘 에저턴의 육체로 표현된 미세한 얼굴 근육을 통해 시대의 공기와 불안, 개인이 감당해야 할 피로를 읽을 수 있다. ‘불안’이라는 광범위한 단어로 묶을 수밖에 없는 추상화된 감정들이 관객 각자의 해석을 거쳐 구체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여기저기에서 맥락 없이 남발되는 ‘영화적’이라는 수사는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한 표현이다.

일상을 영화적인 순간으로 채색하는 제프 니콜스의 비결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해서 놀랍다. 오프닝에서 밀드레드는 불안한 눈망울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한다. “나 임신했어.” 리처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다. “좋은 소식이네. 잘됐어.” 두 대사 사이의 짧은 틈, 여느 영화보다 1초 남짓 긴 호흡. 그저 한 박자 늦게 인물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것만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한 감정들이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영화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화면으로 포착하려는 매체인지도 모르겠다. 조엘 에저턴의 애매하게 일그러진 얼굴(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은 그 어떤 항변이나 고백보다 힘이 세다. 그리고 뒤늦게 따라오는 대사. “좋아” 혹은 영화 말미 “나는 당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취중고백. 인물은 침묵하고 화면이 말을 거는(또는 이야기가 침묵하고 이미지가 말을 거는) 영화적 마법, 그 기본의 힘을 새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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