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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의 영화비평]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초심자가 홍상수 초심자를 위해 쓴 가이드
송경원 2017-04-04

나는 홍상수 영화 초심자다. 18편에 달하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을 다 외우지도 못하고 순서대로 보지도 않았기에 그의 영화세계가 어떤 경로로 변해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건 몇몇 인상적인 대사와 장면들 정도인데, 그마저도 남들에게 설명할라치면 영화들끼리 적당히 서로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나는 ‘홍상수 영화는 거의 비슷해’라는 자기변명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두려움도 있었다.

홍상수 영화에 대한 평자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덮어놓고 칭찬하거나 외면하거나. 그의 영화만큼 언어로 옮기기 난감한 텍스트도 드물다. 홍상수에 대한 격찬은 넘치되 길게 설명하는 글이 드문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짐작한다. 어느새 홍상수는 영화적 식견을 판단하는 지표가 되어 있다. 이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고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그간 내가 홍상수 영화에 대해 받은 인상을 한 단어로 옮긴다면 영화 앞에 ‘정직함’이다. 이번 영화를 통해 그 앞에 수식어를 하나 더 붙이고 싶어졌다. 홍상수의 19번째 장편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치열하게 정직하고자 한’ 결과물이다. 월트 휘트먼의 시에서 따왔다는 제목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서 있는 심정이 영희라는 은유를 거쳐 형상화된다. 이 영화가 정직하다면 그것은 현실 반영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오직 주어진 것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삶에, 혹은 연출 태도에 관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깜깜한 영화의 해변에서, 홍상수의 전작들에 대한 두려움을 지우고, 초심자의 마음가짐으로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적극적인 오독을 해나가려 한다.

‘홍상수 영화’라는 덩어리

몇 가지 전제를 깔아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홍상수 영화로 진입하기 위해 내가 애용하는 접근 통로들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단어의 쓰임과 홍상수 영화를 둘러싼 말들의 사용은 다소 차이가 있다. 그래서 종종 오해받기도 하는데 일단 간단한 착시를 걷어낼 필요가 있다. 먼저 물어야 한다. 당신이 정의하는 ‘홍상수 영화’는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홍상수라는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지칭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면적으로는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흔히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를 두고 ‘홍상수 영화 같다’고 묘사한다면 홍상수 영화에서 반복되는 스타일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는 특정 스타일에 고정되지 않는다. 형식은 매번 바뀔 수 있고, 한 영화 안에서도 수시로 변주된다. 차라리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라고 해두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가 만든 영화다. 그게 전부다. 다만 홍상수라는 개인과 영화라는 질료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여타 내러티브 영화들과 구분된다. 이미지, 사운드, 배우의 연기 등 영화의 요소들은 대개 몇 가지 원칙하에 특정 방향을 향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이야기(서사)를 위해 봉사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옮긴 화면을 보고 다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이야기로 조립한다. 말하자면 대개 영화를 본다는 건 영상과 사운드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받는 과정이다.

홍상수의 경우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는 애초에 이야기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출발시킨다. 영화와 홍상수 사이에는 커다란 방향(그것도 본인만이 아는)이 있을 뿐이다. 그는 배우와 함께 현장에 가서 그날의 상황을 보고 장면을 자아낸다. 정확히 구분하자.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장면을 조형하는 것이다. 배우의 대응, 그날의 날씨가 바뀌면 영화도 다른 결과를 뽑아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조립이라기보다는 덩어리 그 자체다. 흔히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홍상수 영화가 현실에 반응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홍상수라는 창작자와 그때 그 순간 만들어진 장면 사이에만 존재하는 유일하고 일회적인 반응이다. 우리가 그의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상수 감독은 외국의 어느 대학 강연 중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물통을 주고받으며 그 물맛에 관해 말할 순 있지만 몇년을 설명한다고 해서 그 물맛을 알 수는 없을 것”(<씨네21> 819호, <북촌방향>, ‘홀리다, 북촌몽유록’, 정한석)이라 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자신의 본질을 정확히 고백하고 있다. 화면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그건 설명을 하려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홍상수는 해체할 수 없는 덩어리의 형태로 자신의 반응을 발산한다. 요컨대 홍상수 영화란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어떤 감흥들을 구현한 물질들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홍상수의 반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반응의 결과물인 화면을 보고 각자의 반응을 뽑아낸다. 내러티브 영화들이 ‘이야기-장면-이야기’의 과정을 따른다면 홍상수 영화는 ‘반응-장면-반응’의 연쇄로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홍상수 영화를 보고 모두 같은 감흥을 얻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영화는 처음부터 해석의 간격을 전제로 덩어리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없이 유사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사랑’ 혹은 ‘고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각자 머릿속에서는 다른 그림을 그리되 의사소통은 할 수 있는 정도의 최소한의 겹침에 불과하다. ‘비슷하다’는 말은 홍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언어 중 하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반복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영화와 현실의 틈을 벌려왔다. 시간의 흐름을 꼬아놓는다든지, 꿈과 현실을 겹쳐놓는다든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타인의 내면을 서술하는 방식은 모두 유사한 것들을 통해 다른 지점을 드러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를 보고 기시감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영화는 자신의 전작들을 닮았고, 자신의 삶이 묻어 있으며, 종국에는 현실에서 영화라는 물질이 뻗어나오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현실을 닮았다는 건 본질적으로는 현실과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홍상수 영화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소유격)이자 ‘홍상수 영화’라는 덩어리진 고유명사다. 당연히 홍상수가 바뀌면 영화도 바뀌고 스타일도 바뀐다. 그 누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니, 시시각각 감정이 바뀔 뿐만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시점 역시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지금 또, 홍상수는 바뀌었다. 솔직히 그 변화의 궤적을 좇아가는 건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이르는 가장 정확한 통로는 ’사랑을 하게 된 후, 확실해지고 명료해진 것’들에 대한 반응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홍상수의 스타일, 연출의 변화 등이 아니라 그저 지금 당신이 목격하고 있는 것들의 온전한 형태, 혹은 그것들이 자아내는 당신 안의 반응이다.

검은 옷의 남자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하하하>(2009)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성옥(문소리)의 말에 문경(김상경)은 ‘제 생각엔 몰라야 더 잘 보이던데’라며 이죽거린다. 서로의 신경을 긁는 두 인물의 관계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들이 나눈 대화 자체가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꽂혔다. 처음엔 재치 있는 농담이라 생각했다. 영화가 끝난 뒤엔 조금 씁쓸해졌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아마도 그 장면이 그토록 오래 내게 들러붙어 있었던 까닭은 어떤 기시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실제로 내가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대화와 겹쳐 보였기에 남 일 같지 않았다. 홍상수의 영화가 사실적인 감흥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대개 그렇다.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장면들은 쉽게 현실과 겹친다. 삶의 조각들이 묻어 있다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현실과 영화가 아무리 정밀하게 포개져도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홍상수 영화가 단순히 자신의 감상을 옮긴 일기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상수가 지극히 개인적인 감흥을 옮기는 방식은 지극히 영화적이다. 삶의 부스러기를 철저히 긁어모으는 방식은 종종 그의 영화를 관객 각자, 혹은 창작자의 현실과 겹쳐 보이도록 착시를 일으킨다. 정한석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의 비결정적 상태를 체험케 하는 소박한 물질적 리얼리티의 왕성함”(<씨네21> 921호, ‘아름답고 귀한 욕망의 원주운동’ <우리 선희>)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홍상수 영화는 스스로 영화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인용되는 급격한 줌인과 줌아웃은 여러 가지 효과나 의도가 있겠지만, 내게는 ‘이건 영화입니다’라는 선언처럼 보인다. 화가가 자신의 붓터치를 감추지 않는 것처럼 홍상수는 카메라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중 봉봉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영희(김민희)와 명수(정재영)를 찍던 카메라가 갑자기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이 순간 카메라를 돌려야 했던 것은 홍상수 감독에겐 필연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이것은 사랑, 고독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각자의 경험에 빗대어 해석하는 과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창작자에겐 반드시 필요했던 움직임이었겠지만 관객을 향해선 완벽하게 열려 있다. 순수하게 내가 받은 느낌만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 잉여로운 장면들이 삶의 사이 조각난 시간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상대를 응시하면서도 문득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 시간들 말이다. 홍상수 영화에는 그런 잉여로운 시간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이번 영화에선 유독 문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길다. 화장실에 들어간 영희를 문밖에서 기다리는 ‘카메라를 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깃들어 있다고 느꼈다면 억지일까.

잘못 쓴 게 아니다. 나는 카메라를 본다. 내가 보는 것은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된 장면인 동시에 그것을 재현하고 있는 카메라다. 양립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동시에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즐거움이다. 물질적 리얼리티의 왕성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카메라의 운동을 본다. <강원도의 힘>을 만들고 난 뒤 “보이는 것을 믿는다”던 홍상수가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만지고 있는 걸 본다. 1부에서 검은 옷의 남자가 들쳐 메고 사라졌던 김민희가 2부에서 극장에서 앉아 있는 걸 본다. 강릉의 펜션에서 열심히 창문을 닦고 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검은 옷의 남자를 본다. 그간 홍상수 영화에 이토록 비현실적이며 유령 같은 인물이 실체를 지닌 채 화면을 활보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홍상수 감독은 “왜 그런 인물이 나오는지 설명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씨네21> 1097호, 홍상수 씨네인터뷰)라고 멀찌감치 앉아 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상징에 대해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 영희를 데리고 사라진다는 점, 1부와 2부 사이에 시간대가 벌어져 있다는 점에서 죽음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홍상수 감독 스스로가 형상화되어 영화 속에 침투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해석도 그럴듯하고 말이 된다. 원래 상징이란게 그런 식으로 열려 있는 법이다. 흥미로운 건 하나의 해석을 따른다고 해서 다른 해석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내러티브 영화는 차례로 정리된 하나의 길을 따른다. 갈림길이 나오면 선택을 해야 한다. 옳고 그름, 양자택일의 문제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는 장면 자체는 해체 불가능할 정도도 단단한데 반해 장면 사이의 연결이 느슨하다. 어떤 방향으로 연결시켜도 말이 된다. 다시 말해 ‘아는 만큼 보인다’와 ‘몰라야 더 잘 보인다’가 양립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인물들은 갈림길에서 하나를 취하지 않는다. 영희는 자신을 찾아올 감독을 기다리지만 한편으론 기다리지 않는다. 준희(송선미)의 말에 따르면 도희(박예주)를 만나 확 늙어버렸다는 명수는 술자리에서 곧잘 흥을 타고 도희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겐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것으로 보였다. 현실에서의 시간이란 동시에 여러 감정과 생각, 심지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겹칠 수도 있다. 밥을 먹으면서 내일 먹을 걸 생각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창밖에 들리는 희미한 자동차 소리에 집중하기도 한다. 시간은 점이 아니라 흐름이다. 봉봉카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영희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적이면서 사실적이다. 선배를 기다린다는 물리적인 시간이 있고, 동시에 아마도 오지 않을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마음)이 있다.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에 슬쩍 마음을 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장면에 담긴 시간이다. 종종 영화는 시간을 담는다는 말을 관용어처럼 내뱉곤 하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형상화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앞뒤 맥락을 다 생략하고 이 장면만으로도 영화가 된다. 점에서 점으로 시간을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이 장면이 시간이자 반응이며 영화의 물질적인 흔적으로 남는다.

반응의 리얼리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어떻게 하겠다는 지향을 내비치지 않음으로써 중첩된 감정들을 한 화면에 겹겹이 포개어놓는다. 이것을 (필름에 의해) 정지된 시간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봐야 할까. 물론 방향키를 잡는 건 결국 관객이다. 영희가 영어로 끊임없이 ‘배고프다’고 말할 때 그것이 진짜 배가 고프다는 것인지 영혼의 허기를 말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거기에 외로움이란 감상을 덧씌우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해석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검은 옷의 남자가 누구인지 정해놓고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는 어떨 땐 죽음, 어떨 땐 감독의 화신, 어떤 장소에선 그저 창문을 닦는 남자이기도 하다.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하나를 취해서 설명하는 순간 영화는 편편해진다. 홍상수 영화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어떻게든 벌리려 시도한다. 이 영화의 부피를 무한대로 열 것인지, 납작하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

여기 두 가지 운동이 있다.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하나는 이 자리에 머물려 한다. 1부에서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영희는 갑자기 멈춘 후 절을 하고 지영(서영화)은 앞으로 나아간다. 다리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의 거리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전진하는 것과 멈추려는 것이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영화다. 그 틈새에서 영화라는 이름의 시간이 지속된다. 영희는 거창한 미래를 꿈꾸지도, 스스로를 연민하지도 않는다. 영화 안에는 수많은 말들이 맴돌지만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건 최선을 다해 거기 오롯이 서서 생을 버티고 있는 영희의 모습이 전부다. 밤의 해변에서, 혹은 말의 바다에서 조용히 잠들 듯 누워 있는 영희의 존재는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며 전부라 할 만하다. 김민희의 움직임이 하나의 리듬이 되고, 온전히 화면 가운데 버티고 선 그 모습이 곧 영화가 된다. 서로 다른 방향의 두 운동이 지속되는 한 모든 시퀀스를 잘라내어 따로 떨어뜨려놓아도 각 장면들은 독립된 영화로 성립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란 감독의 감흥-장면이란 물질-관객의 반응으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의 결과물이다. 이들은 극장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어떤 감정을 공유한다. 언어의 뭉툭한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 저편에 놓인 쓸쓸함’ 정도일까. 두 가지 운동(혹은 시간)의 틈새에 무엇을 끼워넣을 것인지는 장면을 마주한 관객 각자의 감흥에 달렸다. 그 거리야말로 홍상수가 꾸준히 유지해왔으며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관람(해석)의 거리다. 이 거리를 지우고 지나치게 밀접시키면 영화는 현실인 척 위장하며 위험한 침투를 시작한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감독의 윤리라고 믿는다. 홍상수 영화가 아무리 현실과 겹쳐 보인다 해도 결국엔 현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과잉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밤에 해변에서 혼자>에는 유독 늙음에 대한 다양한 말들이 각기 다른 얼굴을 한채 뭉쳐 있다. 앙드레 바쟁이 언급한 사진적 영상의 존재, 그것이 거기에 있었음의 진실은 이미 화석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영화는, 사진은,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싶은 욕망(미라 콤플렉스)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욕망은 있되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홍상수 영화’라는 덩어리가 그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리얼리즘’이란 단어는 함부로 갖다붙이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은 홍상수에 이르러 ‘그 감정이 거기에 있었음’으로 변환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시간, 그 자리, 그 인물과 함께 느꼈던 유일무이한 감정이 있고, 그 순간이 해체할 수 없는 덩어리가 되어, 정지하지 않고, 흐른다. 정확히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과 멈추려는 움직임이 공존한다. 우리는 두 움직임이 벌려놓은 틈새, 오솔길을 따라 그의 여정에 동행할 수 있다. 오직 영화로만 구현 가능한 유일무이한 형태. 설명되어서도 안 되고 설명할 수도 없는 덩어리. 영화는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존재하고, 진실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 발화한다. ‘홍상수 영화’는 그렇게 영화라는 이름의 시간(이른바 시간-이미지)을 만들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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