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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영화비평] <어느 독재자>의 숨겨진 주제

익명의 국가에서, 폭군의 도주가 저지된다. 만일 그가 혼자였다면 그의 나쁜 탈주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손자가 곁을 지키면서 상황은 난처해진다. <어느 독재자>(2014)는 독재자와 손자의 여정을 담은 영화이다. 여행의 사이에서 그들은 타락한 정권의 피해자들과 만난다. 과연 이 나쁜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 행동을 후회하게 될까? 영화는 결말에 대해 관객의 기대와 다른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왜 하필 독재자가 어린아이와 함께 도주하게 되었는지, 감독에게 아이의 ‘순진한 눈’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언뜻 영화 속의 우화는 평화적이라 아이의 시선과 맞물리지만, 실제로 아랍 사회에서 독재정권은 민주주의로 전환되지 못했다. 이 나쁜 결말 때문에 영화는 이런 장치를 심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새로운,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한다고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말하고 있다.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코티야르)가 복직을 위해 뛰어다니는 여정이 마치 죽지 않으려 끊임없이 이동하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다고. 평범한 삶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문자 그대로 ‘남들 사이의 틈으로 가기 위해’ 자리를 옮겨 이동한다. 마흐말바프의 이번 신작에서도 주인공은 비슷한 경로를 걷는다. 인공적이고 화려한 왕궁을 빠져나오자마자 대통령과 손자는 예상치 못했던 험난한 여행에 돌입하게 된다. 처음에 호화로운 리무진을 타고 시작된 그들의 여행은 오토바이, 버스, 트럭, 마차 등을 옮겨 타며 더욱 거칠어진다. 하지만 목적지인 바닷가에 도착해서 나라를 떠날 보트에 올라타지 못한 채, 여정은 끝이 난다. 낙오자들의 살기 위한 여행이란 측면에서 다르덴과 마흐말바프의 이동 목표는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 <어느 독재자>의 운명은 유독 어둡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욕망에 쉽사리 동조하지 못한다. 스크린 속 손자의 얼굴에서도 순수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가 단지 폭군의 후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아이가 지닌 순결한 심성을, 곧 타락할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할아버지에게 던지는 손자의 질문에는 항상 폭군의 만행에 대한 순진한 의구심이 담겨 있다. 이 질문들이 징표가 되어 훗날 아이는 할아버지의 행적들을 따르게 될 것이다.

영화라서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바람

이 작품은 로드무비이면서, 동시에 신분 확인을 위해 모험을 이어가는 반영웅의 자전적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권위의 자리에서 축출된 후, 주인공은 자신의 폭정이 원인이 된 또 다른 폭력 사건에 관심을 기울인다. 만일 그의 이 끔찍한 모험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과정에서 역설되는 시스템의 아이러니는 인물의 내면과 이어져 사회적인 교훈을 내놓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교훈은 작품 내에서 완성되지 못한다. 인트로 시퀀스의 ‘도시 점등’ 장면에서부터 마흐말바프는 우화의 알레고리 방식을 취하지만 여기에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작품 스스로가 지니는 완결된 구성이 없다. 즉, 영화의 화자는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직접 노출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대중에게 완곡하게 이르고 있다. 총 3번에 걸쳐 불현듯 튀어나오는 ‘과거 회상’ 장면을 살펴보자. 모든 음식을 시중에게 먼저 먹어보게 하고, 할아버지를 폐하라 불러야 하는 등 아이의 주변에는 지배자로서 가져야 할 거추장스러운 제약들이 새겨져 있다. 훗날 이 플래시백의 자리에는 “들리는 것을 듣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바닷가의 목소리가 함께 놓이게 될 것이다. 아이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주는 주변의 명령들은 우화의 교훈성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옛날 옛적 어느 나라에 대통령이 있었단다”라고 시작되는 자전적 회고에 도움이 되는 장치가 된다. 이처럼 숨겨진 주제가 훗날 관객의 실제 상황에 맞춰 제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맥락으로 다시 작성될 것이다.

작품 자체만으로 보면 영화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교육적이지 않다. 아이의 존재는 사회현실에 대한 도덕적 표상을 비추는, 그리하여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어느 것이 나쁜지, 혹은 어느 지점에서 악행을 논할 수 있는지, 마흐말바프는 꽤나 열심히 회피하고 있다. 한때 절대권력을 지녔던 노인의 여행은 결말에 이르러 통속적 기대와 원형적 패턴을 벗어나는데, 따라서 결말을 보고 난 관객이 이 작품의 교훈을 명징하게 한 문장으로 완성시키기는 어렵다. 차라리 현실에 빗대어 영화의 부족한 점을 직접 메우는 편이 더 수월할 것이다. 이처럼 영화의 텍스트가 보여주는 의미의 네트워크에서 우리는 작품을 재해석할 힌트를 찾아 스스로 의미를 확장시켜야 한다.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이 숨어드는 ‘배수로’의 이미지가 좋은 예가 된다. 나이 든 영화 속 대통령이 배수로에 숨어드는 장면을 보자마자, 관객은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숨어들었던 작은 하수구의 구멍을 떠올릴 것이다. 현실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불행히도 튀니지를 제외한 다른 국가에선 해피엔딩을 맞지 못했다. 사라진 독재자의 자리를 무장 조직 파벌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갑작스럽고 엉뚱한 영화의 결말은 어느 정도 수긍되는 면이 있다. ‘폐하’에서 ‘할아버지’, 마침내 ‘살인자’라 불리게 된 어느 노인이 ‘교수형’과 ‘화형’, ‘참형’의 위기를 골고루 거치며 마침내 기이한 형벌을 제안받는다. “춤을 추게 만들자”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는 아마도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은 청년의 목소리에서 결말을 이해하는 힘을 얻는다. 이상주의적이다 못해 허망한 남자의 제안을 거치며 영화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한마디를 마침내 내뱉는다. 춤을 추는 아이의 이미지를 통해, 훗날 손자가 자신이 겪은 거친 연극의 결말을 ‘바닷가에서의 춤’ 정도로 기억하기를 영화는 기원한다.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폭력의 확산에 대해 과히 순진한 희망을 말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치가 있다. 영화라서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바람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비록 이란 출신이긴 하지만,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현재의 아랍 정치에 대해 말하기 적당한 관찰자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영화는 정치적 상황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지 못한다. 다만 그는 주제의 집약에 있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다. 나쁜 정권이 붕괴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보호 받지 못한 채로 머문다. 그 전통적 구호 구조의 취약점을 영화는 꿰뚫는다. 집단의 시스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말 그대로 그들은 동맹에서 탈퇴한 개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는 독재자의 척결만으로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더러운 시스템의 설명과 고발에서 영화가 멈추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 극이 지닌 도덕적 서스펜스는 짧고 모호하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독재자의 자손은 아버지로부터 이상적으로 분리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원칙을 배반한 인간의 행태에 대해 원론적으로 돌진한다. 독재자의 춤과 노래는 아마도 2017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도 일종의 지표를 제시할 것이다. 무엇이 이들의 만행을, 그 추악한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에 대해 영화는 좀더 실질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른다. 결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흑백논리의 무서움을 알리면서, 동시에 동화 같은 마법을 꿈꾸는 자들에게 긴장감을 선사한다. 행복한 엔딩 장면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부도덕한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감싼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어둠이 스크린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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