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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효정의 영화비평] 말이 아닌 것으로 전하는 진심 <목소리의 형태>

울림. 부드러움과 나직함. 죄책감과 수치심. 목소리에는 많은 것들이 전달된다. <목소리의 형태>(聲の形)의 제목에서 목소리를 뜻하는 말은 일본어 약자체 声이 아니라 한문 정자체 聲으로 표기되었다. 사물의 개념을 표기하는 문자인 한자는 형태와 의미를 소리와 아울러 전하는 표의문자다. 형태, 의미가 소리와 어우러진다는 것. 가령 신카이 마코토가 <언어의 정원>(2013)에서 ‘언어’를 뜻하는 일상어 고토바(言葉) 대신 일본 고유의 시인 와카(和歌)를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 고토노하(言の葉)를 선택했을 때, 언어는 문득 한잎, 두잎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혹은 한구, 두구 읊조리는 시나 노래처럼 다가온다.

<목소리의 형태> 역시 그러하다. 목소리(聲)라는 말에는 울림으로 전달되는 소리(声), 소리가 전달되는 귀(耳) 그리고 소리 전달의 매개가 되는 손(又)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글자만으로도 소리가 전달되는 흐름이 이미지처럼 펼쳐진다. 이는 원작 만화가인 오이마 요시토키가 제목을 선택한 의도이기도 했다. 수화 통역자였던 어머니의 영향하에 탄생한 만화에서 원작자는 소리와 감각기관 그리고 손이 활용되는 의사소통의 다양성에 대해 전달하고 싶었다. 귀에 들리는 것이 목소리의 전부가 아니다. 마음을 울리는 소리의 형태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목소리의 형태>가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적 세계관이다.

야마다 나오코의 리듬과 묘사

알려진 것처럼 <목소리의 형태>는 집단 따돌림의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 과거를 수습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인기 원작 만화를 교토애니메이션사(일명 ‘쿄애니’)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극장판으로 만들었다(원작과 극장판이 일으킨 돌풍현상과 감성적 특징에 대해서는 송경원 기자가 <씨네21> 1103호 특집에서 <목소리의 형태>에 대해 쓴 비평을 참고하기 바란다). 말썽쟁이 초등학생 소년 이시다 쇼야는 청각장애 소녀 니시미야 쇼코가 전학을 오자 호기심을 보인다. 관심을 표현하는 데 서툰 아이 쇼야는 쇼코의 장애를 놀리기 시작하고, 한번 시작된 괴롭힘은 관성이 되어 죄책감 없이 전개된다. 신중하지 못한 시간이 흐르고 결국 쇼코는 아이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채 전학을 간다. 쇼야는 집단 괴롭힘 가해자로 낙인찍혀 역으로 괴롭힘을 당한다. 작품은 그 후 5년이 지나 여전히 외톨이로 지내는 고3의 쇼야가 자신의 과거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따라 전개된다.

성장기 소년소녀가 등장하지만 작품은 러브라인이나 성장 과정에는 큰 관심이 없다. 분위기는 대체로 무겁다. 우울한 설정 탓에 최초 단편 형태의 원작이 잡지에 공개되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집단 괴롭힘 가해자뿐 아니라 위선, 소심함, 공격성으로 둔갑한 자기방어, 등교거부 등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소녀들의 성격과 행동도 어딘가 모나고 어긋나 있다. 사회는 편협하고 학교는 무심하며 어른들 역시 미숙하긴 마찬가지다. 굳세고 강하게 세계를 감당하는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누구든 강퍅한 삶을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작품이 견지하고 있는 이 완강한 차가움을 견디며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꽤나 마음이 괴로운 일이다.

우울감을 작품의 근본적 정서로 가져가되 인위적 스토리텔링을 거부한다는 입장에 서서 <목소리의 형태>는 관객을 서서히 빠져들게 하는 흡인력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원작 이야기의 힘에 더해 애니메이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점들도 담겨 있다. 작품은 7권에 달하는 단행본의 내용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움직임과 멈춤의 활용, 빛과 색조를 통한 분위기의 조성을 통해 작품의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간다. 초등학교 방과후 하교시간과 맞물린 해질녘의 빛, 벚꽃의 흩날림과 개울물의 반짝임, 도토리가 떨어진 나무의 밑둥, 담장을 둘러 핀 데이지꽃 등 기후현을 배경으로 한 서정적 일상의 묘사는 작품이 지닌 심리적 무거움을 달콤한 이미지로 포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소한 진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조한다.

특히 대화 장면에서 편집의 리듬감이 독특한데 이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사람의 대사와 다른 사람의 대사 사이 잠깐의 휴지, 시간적 여백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어떤 정서적 깊이가 배어난다. 한편 작품은 얼굴 표정을 중심으로 인물을 재현하는 익숙한 방식에서도 벗어나 있다. 얼굴을 제외한 인물의 신체부위, 가령 손의 포즈나 걸음걸이 등의 독특성이 인물의 개성과 내면적 특성을 표현한다.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된 쇼야의 심리는 그의 시선에서 바라보이는 장면, 즉 무릎 아래로 커팅되는 신체가 프레임의 구석에 위치되는 숏을 통해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작품의 미학적 형식과 인물의 정서적 깊이가 조응하는 방식은 야마다 나오코의 전작 <케이온>(2011)과 <타마코 러브 스토리>(2014)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 보다 원숙한 경지에 이른다.

체념의 정서 속 회복되는 관계성

<목소리의 형태>의 근본 전제는 우리가 모두 불안정성을 안고 사는 존재라는 점에 놓여 있다. 장애를 안고 사는 쇼코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쇼야도, 고등학생이 되어도 각자의 단점을 바꾸지 못하는 연약한 동창생들도, 자녀 양육에 미숙하며 감정 전달에 서툰 엄마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정성, 연약함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공감의 정서를 보다 깊고 넓은 지평으로 이끌어가는 특성이 된다. 내 연약함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마법적인 화해도 극적인 변화도 없다. 우울감과 자살 시도, 괴롭힘과 자조감 등 체념의 정서는 거의 작품의 끝까지 이어진다. 그렇지만 작품은 고립된 인간들의 관계성을 조금씩 회복해가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대화적 언어의 방식이다. 작품에서 대화적 언어는 말(음성)과 글(필담) 그리고 수화, 세 가지로 진행된다. 말은 때로 본심을 배반하기도 한다. 필담은 읽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화적 언어로 기능할 수 없다. 수화는 기호에 대한 해독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다. 미안하다, 친구가 되고 싶다, 좋아해 등 간단한 생각을 전달하는 것조차 서로에게 어렵다. 그 대신 작품은 비언어적인 풍부함, 가령 얼굴 표정이나 손의 포즈, 몸짓의 다양함, 걸음걸이의 형태, 말로 전달되지 않는 소리의 풍요로움 등으로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특히 마음의 진정성은 어떠한 ‘울림’을 통해 전달된다. 소리란 울림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작품의 초반에 쇼코가 잡고 있는 철 난간을 두드려서 쇼야가 앞에 있음을 알게 되는 장면과 쇼야가 쇼코에게 친구가 되자고 수화로 말하는 장면의 인서트에서 물의 파동이 이는 모습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오프닝에서부터 등장해 작품의 곳곳에 인서트된 파동의 이미지는 이러한 소리의 전달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언어는 목소리라는 형태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진심의 울림을 통해서도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의 입장을 변호한다는 점에서 작품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고 들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며 부끄러움과 자기혐오, 단점들을 안고 살아간다. 어른이 되어가도 나쁜 습성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너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타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인간적 연약함은 공감의 인류애 혹은 동정의 연대라 부를 만한 관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작품은 어느 한 사람이 최종적 피해자고 다른 한 사람이 최종적 가해자라는 입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모두 가해와 피해 이 사이 어디쯤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작품이 방관자나 전지적 관찰자의 시선보다 훨씬 공평하며 참여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연약하며 때로 비겁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타인과 관계를 절연하는 것보다는 그 연약함과 비겁함을 껴안으며 소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목소리의 형태>가 보여주는 굳센 입장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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