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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환의 영화비평] 동성애적 코드로 장르의 상투성을 넘어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그것이 경찰이든 조폭이든 간에, ‘믿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쁜 놈들, 또는 불한당이라 부른다. ‘필요’는 바람난 애인 같아서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 상황을 믿어야지”라고 말하는 재호(설경구)의 말은 진리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불한당>은 끊임없이 상황을 뒤집으며 ‘배신의 서사’를 펼쳐 간다. 하지만 <불한당>을 배신의 서사라 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플롯의 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불한당>은 인물이 인물을 배신하는 것 이상으로,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배신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영화다. 격렬한 몸짓 뒤에 숨어 있는 아련한 감정, 그것이 바로 <불한당>의 정서다.

배신의 화법

<불한당>은 대략 3년의 시간차를 두고 교도소 안과 바깥,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 과정에서 현수(시완), 재호, 병갑(김희원), 천 팀장(전혜진)은 패거리를 바꿔가며 서로가 서로를 속인다. <불한당>의 기본적 스토리와 캐릭터는 전형적이지만 인물들의 속고 속이는 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장르적 상투성을 넘어서고, 관객을 진실 게임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불한당>이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플롯을 선택한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불한당>은 과거를 뒤집으며 현재를 의심하게 한다. <불한당>의 변성현 감독은 관객의 인과율적인 믿음을 배신하면서 관객과의 게임을 즐긴다. 과거의 사건이 원인이 되어 현재와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인과율의 서사적 논리임에 반해 <불한당>은 현재의 원인인 줄 알았던 과거의 사건(진실)에 또 다른 사건(진실)을 덧붙여가는 화법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현재에서 확실한 한 가지는 영화의 모든 인물이 배신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배신의 화법’.

<불한당>에서 가장 흥미로운 배신은 현수가 자신이 경찰임을 재호에게 고백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서사적으로 현수가 재호에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천 팀장을 배신하는 장면이면서도, 장르적으로는 언더커버 영화의 일반적 관습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더커버 영화는 위장 잠입한 인물의 정체가 탄로날 듯한 위기와 긴장감이 극적 근간을 이루지만, 진짜 신분과 가짜 신분 사이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이 영화의 매력을 배가시키곤 한다. 특히 거짓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실한 감정을 교환하는 관계로 변해갈 때 오는 정체성의 혼란은 <신세계>의 주요 테마이기도 했다.

<불한당>은 장르적 관습에서가 아니라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표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언더커버 영화의 매력을 붙들어맨다. 어쩌면 <불한당>을 언더커버 영화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단순히 신분 위장이라는 소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감추고 마초 남성성으로 위장한 채 살아야 하는 ‘언더커버 남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의 리얼리티

물론 언더커버 영화나 누아르 계열의 영화에서 배신이라는 설정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한당>은 이러한 배신과 파멸을 이끄는 팜므파탈의 역할을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부과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흥미롭다. 현수가 좀더 팜므파탈에 가깝긴 하지만 현수와 재호 모두가 서로의 파멸을 이끄는 팜므파탈일 수도 있을 것이다(이러한 남성 인물을 가리켜 옴므파탈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불한당>을 감싸고 도는 동성애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팜므파탈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불한당>은 동성애적 코드를 표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누아르 특유의 도덕적 모호함과 더불어 전형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을 인물에게 감정적 진동의 폭을 넓혀준다.

실제로 <불한당>은 반복적으로 상황을 뒤집는 플롯의 기예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병갑은 재호에게 “‘눈에 뭔가 씌었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는 <불한당>의 세계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일종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불한당>은 콩깍지를 쓰고 봐야 하는 작품이고, 그래야 재호가 현수에게 그랬듯이 ‘멍도 예뻐 보일’ 정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콩깍지는 동성애적 코드이며, 그때 영화 속 인물은 상투성의 영역에서 모호함과 다층성의 영역으로 도약한다. 가령 병갑과 현수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병갑은 현수에게 망신을 당한다. 이때 영화는 ‘뜬금없어 보이는’ 장면 하나를 이어붙인다. 술자리를 벗어난 병갑이 홀로 울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이 놓인 시퀀스만 뚝 떼서 본다면 부하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이 억울하고 쪽팔려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동성애적 코드라는 ‘상황’속에서 이 눈물은 전혀 다른 의미의 영역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현수와 재호의 몸과 몸이 부딪히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특히 화물 엘리베이터 안에서 재호가 현수를 벽으로 몰아놓고 그의 몸을 뒤지는 장면은 격렬한 몸짓이 아련한 감정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동성애적 코드라는 콩깍지가 눈에 씌일 때, 달리 말해 파편적인 상황 하나하나를 동성애적 코드라는 바늘이 누비고 지나갈 때 <불한당>의 의미는 다시 쓰인다.

<불한당>에서 인물의 선택과 행동의 숨은 동력은 동성애적 코드다. 영화 엔딩에서 보이는 현수의 눈물 역시 마찬가지다(물론 현수가 눈물을 흘리는 모든 이유를 동성애적 코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수의 눈물은 언어의 대체물이다. 말로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을 눈물로 표현하곤 하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현수에게 동성애적 감정이 언어적 재현 너머의 대상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셈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하고 남겨진 것들. 만약 동성애적 코드를 좀더 명확한 멜로드라마 구조 속에 노골화했다면 더 파격적인 영화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대가로 ‘말할 수 없음’에서 오는 감정적 파토스 역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최근 한국 주류영화는 현실의 리얼리티가 휘발된 지 오래고, 허구적 맥락의 리얼리티를 성립시키는 일에 급급하다. 게다가 장르영화를 두고 전통적 개념의 리얼리티를 거론하는 것만큼 촌스러운 일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세상과 맞짱 뜨듯 싸우던 그들이 끝내 넘지 못한 ‘경계의 리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 사회의 남성성과 비남성성,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놓인 경계의 리얼리티 말이다. 어쩌면 그 경계는 이들이 자신의 동성애적 감정을 부정해서라기보다는 (통념적 개념으로서의) 남성성을 포기하는 일에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허구적 맥락’의 리얼리티로 가득한 <불한당>이 현실의 리얼리티와 조우하는 순간이지 않을까? 끝내 말할 수 없는 것. 끝내 말해서는 안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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