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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대책 없다>, 논란이 불러온 우연한 고찰들

퇴행적 자기애와 안티 이성애

서울에서 활동하는 하드코어 펑크 밴드 이야기 <노후 대책 없다>를 논하기 전에 짚어야 할 사건이 있다. SNS를 통해 불거진 감독 및 출연진의 성추행 의혹이다. 이 사건은 ‘○○○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사건이 발발한 페이스북 플랫폼의 특성상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을 드러냈고, 영화 제목을 명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가해자를 익명으로 게재한 점이다. 가해자의 사과와 대응이 필연적으로 요구됐던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달리, 피해자가 감독과 출연진에게 자신과 합의하지 않은 입장문이나 사과문은 게재하지 말 것을 요청하면서 사건과 관련된 발언은 잠잠해진 상태다. 피해자는 자신이 글을 쓴 목적은 특정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에서 펑크신 역시 가부장적임을 폭로하기 위한 글이었다고 밝혔다. 이같은 의도가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진술의 사실 관계가 중요한 피해자-가해자 사건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펑크신에 관한 문제제기, 넓게 본다면 펑크신에 관한 한편의 비평으로 읽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한 뒤에야 겨우 <노후 대책 없다>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글을 쓰는 목적은 글쓴이가 제기한 문제의식에 덧붙여 펑크신이 자정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펑크신 전반에 관해 말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며 고작해야 나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을 인식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다큐멘터리가 선택되고 배열된 진실일 따름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 우리에게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실제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관계자가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일 거다. 대신 우리는 그 필연적인 간극을 투명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성추행 논란이 불거진 이후 영화를 보게 된 나는 사건을 의식한 채 영화를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현실이라는 잣대로 영화를 들여다보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여성’이라는 성차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게 되었으나 곧 어떤 단일한 관점으로는 이 다큐멘터리를 꿰뚫을 수 없음을 절감했다. 여기서 ‘여성’ 대신 ‘이성애’로 문제의 틀을 옮겨보고 싶다. 문제를 제기한 자는 펑크신의 ‘가부장적’인 측면을 언급하긴 했지만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성애에 관한 은밀한 배제였고, 이것이 이번 사건과 어느 정도 연관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위적 퇴행의 행위들

<노후 대책 없다>를 통해 엿본 하드코어 펑크신은 이성애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적어도 성별 구분이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듯 보인다. 이성애와 관련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안팎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의 성격에 비춰볼 때 이성에 관한 언급이나 농담은 최소화된다. <노후 대책 없다>의 수록곡 가사 역시 여성 관객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나 ‘섹드립’이 전무하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노랫말을 가벼운 멜로디 속에 집어넣는 인디밴드의 노래, 소위 ‘센 노래’라는 강박 속에 여성혐오적인 가사를 이용하곤 하는 힙합 등 다른 음악 분야와 비교해본다면 이와 같은 측면이 두드러진다. 펑크신의 분노는 오직 위정자들이나 세상, 때로는 종교 혹은 자신을 향한다. 이성애적 잣대로 가사를 따져보았을 때 이들의 노래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건전하다.

특징적인 것은 영화의 주요 펑크 밴드인 파인더스팟의 가사에서 자신이든 세상이든 그것은 모두 남성으로 (구체적으로는 남성 성기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국가, 정부 다 좆까”, “좆이나 까잡숴”(<불한당들>), “좆나게 공부하고, 좆나게 스펙 쌓고, 좆나게 취직하고, 좆나게 뒤져”(<노후 대책 없다>) 등 남성 성기를 지칭하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나’라는 자아 대신 ‘좆’으로 지칭되는 성기가 있는 것 같다. <노후 대책 없다> 가사에는 공부와 죽음 사이에 스펙과 취직이 있을 뿐 또 다른 중요한 단계인 결혼, 출산, 육아라는 항목은 빠져 있다. 이것을 여성에 대한 억압이나 배제의 근거로 보는 것도 가능하긴 하나 온당치는 않다. 정상적인 성장의 단계로서 이성애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만 지적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남성 성기로 도배된 가사는 그들이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남성 중심이거나 적어도 ‘남성화된’ 여성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씁쓸한 인정에 가깝다.

이같은 설명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의 애정의 대상으로 기능했던 여성의 존재가 아예 삭제된 ‘남탕 영화’가 부상한 맥락과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이 애정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진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2016)는 특히 <노후 대책 없다>와 함께 이야기할 지점이 많은 영화다. 표면적으로 남성이 우글대는 안남시와 펑크신이 비슷한 양상을 보일뿐더러 구체적으로는 인물이 드러내는 ‘퇴행성’이라는 맥락에서 그렇다. 이를 잘 보여주는 구체적인 장면이 있다. <아수라>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안남시장 박성배는 재개발 관련 회의의 소란을 정리하며 테이블을 마구 내리쳐서 컵이 엎질러지는 바람에 바지가 젖는다. “너무 무섭게 얘기하셔서 오줌을 다 싸버렸네”라고 너스레를 떤 그는 이후 보좌관들이 바지를 말리는 사이, 넥타이 맨 양복 셔츠 차림에 벗은 엉덩이를 긁적이며 장내를 오간다. 기저귀를 갈기 위해 수없이 허전한 아랫도리를 경험해야 했던 퇴행적 유아성과 탐욕의 결탁은 그 의복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좌관이 반쯤 걸친 팬티를 올려주는 장면에서 의존적 퇴행성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아수라>의 퇴행이 풍자적이라면, <노후 대책 없다>의 퇴행은 자위적이다. 남성성에 대한 강조는 성적 욕망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영화에 등장하는 성기에 관한 언급들은 선정적이기보다는 퇴행적이다. ‘파인더스팟’의 심지훈은 인터뷰 도중 뜬금없이 책상 아래로 자신의 성기를 만지고, 옆에 있던 송찬근이 주의를 준다. 팬티만 입은 채 발광하며 공연하던 ‘크라이스트 퍽’의 정진용은 누군가가 팬티를 벗기자 벌거벗은 채로 바닥에 뒹굴며 노래한다. 집에서 속옷에 티셔츠를 입은 채 돌아다니거나 ‘엄마’의 잔소리를 두려워하는 것도 퇴행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코스튬과 특성들처럼 보인다. 무대 위와 무대 밖이 전혀 위화감이 없는 출연진에게 성숙은 ‘개나 줘버려’야 할 것이고, 퇴행은 찬미 받아야 마땅한 어떤 것이다.

시끄럽게 분노하고 함께 울부짖기

그러나 퇴행은 남성의 것에 한정되기보다는 오이디푸스 이전의 근원적인 유아성에 가깝다. 이 영화와 영화에 담긴 노래가 관객에게 전달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분노’와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노래가 세상을 향한 묵직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해도 일단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시끄러움이다. 영화의 포문을 연 펑크의 정의(“펑크가 뭐냐면 무지하게 화나서 그걸 발산하는 음악이지 뭐”)에 따라 화가 나는 이유는 다양할지라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이다. 소리를 지른다는 건 우리가 성장하면서 결별해야 했던 퇴행적 행위 중 하나다. 펑크는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표현이 ‘우는 것’밖에 없었던 시절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노 머니, 노 퓨처’인 지금과 실상 다를 바 없다는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울부짖음은 묘해서 시끄러움은 행위자의 몸을 마구 움직이게 하고, 아이처럼 울거나 웃게 만든다. 그것은 행위를 지켜보는 관객에게도 묘한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그것은 전염성이 있다. 이제 울음은 누군가가 나를 돌봐주기를 원하는 울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을 달래는 ‘DIY’(Do It Yourself)의 일환이며, ‘너도 같이 울부짖자’고 말하며 선창하는 울음이다. 퇴행성은 의존과는 거리가 먼 자위적인 성격의 것으로, 근원적인 본성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들이 앞으로도 이성애적 여성과 연대하는 것에 회의적이라고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외침은 성별 구분 이전을 지향해야만 성립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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