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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영상미로 역사적 본질을 살리고자 애쓴 <군함도>의 미덕

매혹적인 판타지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9일 현재 인터넷에 집계된 <군함도>의 관객수는 아직 700만명에 이르지 못했다. 언론에 공개된 <군함도>의 손익분기점이 800만명이라 하니 이 영화가 흑자를 기록하기는 무척 힘겨워 보인다. 나는 스크린 독점 문제 때문에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한 집단적 의사 표시는 <군함도>의 류승완 감독도 찬성하고 있는 스크린 독점 규제법을 마련하는 데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여전히 공감하기 힘든 것은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논란이다. <군함도>가 친일영화라든지 ‘국뽕’영화라는 다소 황당한 주장은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가 일제강점기의 징용자들이 겪었던 현실을 외면한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나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모든 문학과 영화들은, 실은 대부분 판타지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과 허구를 보태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허구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의 본질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어떤 미적인 성취를 이뤘는지가 중요하다. 그 점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적 사실에만 매달릴 때 예술에는 건조한 뼈대만이 남는다. 또는 이러한 역사적 비극을 상업영화로 만드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그러한 입장을 역사에 대한 과도한 엄숙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만약 역사와 관련된 예술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만 몰두해야 한다면 멕시코 혁명을 배경으로 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갱들>(1971)은 무엇이고, 베트남전을 다룬 <지옥의 묵시록>(1979)이나 <디어 헌터>(1978), 심지어 스페인 내전 속에서 벌어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는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주저 없이 졸작들이 되어야 한다. 솔직히 그러한 주장들을 접할 때 간혹 나는 소름마저 끼친다. 그래서 ‘<군함도>는 역사극을 가장한 탈출 판타지’란 비판을 나는 악평이 아닌 호평으로 애써 읽고 싶어졌다.

역사적 사실을 치밀히 재현하다

지난 <씨네21> 1117호에 실린 류승완 감독의 인터뷰를 읽고 안 사실이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군함도>는 역사적 사실들을 꼼꼼하게 검토했다. 그중 인터뷰에서 굳이 언급될 필요가 없었지만 음악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눈에 띄었던 것은 이강옥(황정민)의 대사에서 언급되는 “재즈가 금지된 지가 언제인데…”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사실은 음악계 내에서도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30년대 빅밴드 스윙으로 대표되는 재즈는 미국을 뒤덮은 것은 물론이고 유럽, 아시아까지 그 인기를 확장시켰다. 상하이와 도쿄는 재즈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동아시아의 도시였고 일제를 통해 재즈는 조선에도 상륙했다. 당시 조선의 작곡가였고 노래와 연주를 겸했던 김해송은 재즈를 시도한 조선 최초의 음악인이었는데 그가 작곡한 <청춘계급>(1938)을 이강옥과 그의 악단들은 <군함도>의 반도호텔 무대에서 연주한다. 중요한 점은 <청춘계급>의 노랫말에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자조와 퇴폐가 그대로 실려 있다는 점이다. “춤이나 추잔다. 사랑의 탭댄스/ 이 밤이 다 새도록 춤이나 추잔다/ …/ 샴팡을 마시며 춤이나 추잔다.”

1941년 태평양전쟁과 더불어 일본에서 전면 금지된 재즈지만 1945년 징용 전야의 암울한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식민지 대학생(장성범)의 참담함이 <청춘계급>의 노랫말과 완벽하게 조화한다.

<군함도>가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연구자들의 언급이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식민지 조선이 겪었던 역사적 본질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독립군 요원 박무영(송중기)이 변절한 독립운동가 윤학철(이경영)의 정체를 밝혀내는 미스터리식 플롯은 현실감이 떨어졌지만(송중기의 너무도 ‘전형적인’ 연기는 이 비현실적인 설정에 기인한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살아 숨쉬는 인물들(특히 조연들)의 성격들은 그러한 단점을 충분히 상쇄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이다.

특히 “너도 조선놈한테 하소연 좀 해야 마음이 좀 풀릴 것 아니냐”는 최칠성(소지섭)의 말에 “날 징용 보낸 것도 조선인 이장이고 일본군한테 팔아넘긴 것도 조선놈 포주인디, 조선놈한테 하소연을 해야? 그래야 맘이 풀린다고?”라며 냉소적으로 반문하는 오말년(이정현)의 대사는 핵심을 찌른다. 노무계 완장을 차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학대하는 송종구(김민재)의 존재도 마찬가지다(비록 그가 일본인 여고생을 강간하는 설정은 너무 과도하다고 느꼈지만). 일제의 잔혹한 수탈은 선한 조선인과 악한 일본인 사이에서만 벌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친일 조선인이며 그 과정에서 일본을 따라 부화뇌동하는 다양한 군상들이 출연했다. 그들의 존재를 통찰하는 것은 일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통치 방식(폭력적인 권력의 통치 방식)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다. 친일 문제를 현재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름다운 화면과 장엄한 음악의 조화

<군함도>에서 상세하게 언급되는 조선인 임금 문제 역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조선인들이 끌려간 곳은 일제의 국가기관이 아니라 일본의 민간 기업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인들은 ‘명목상’ 노동자였다. 여기에 국가가 폭력을 동원해 사적 이익을 지원한 것이다. 너무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제국주의 전쟁의 근원은 이윤 추구라는 사실을 영화는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군함도>의 미덕은 상상력과 이를 구현한 아름다운 화면에 있다. ‘<군함도>에는 영웅만이 존재하고 민중이 없다’는 일부 지적과 달리 감독은 마지막 탈출 장면에서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의 역동성을 부각하느라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조금은 과도하다고 느낀 욱일승천기 절단 장면은 심지어 차전놀이를 연상시키는 집단의 힘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석탄 벨트를 타고 절벽과도 같은 군함도의 장벽을 넘어 석탄선에 이른다는 세팅 그 자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은 이 영화의 최고 미덕이다. 탄광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새신랑’은 훈도시 천을 엮어 내린 줄을 타고 고공에 매달린 석탄운반용 긴 자루 속으로 위태롭게 내려간다.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구슬픈 전래 자장가가 흘러나온다. “둥개, 둥개, 둥개야.” 그 공포의 순간에 주변의 소리는 암흑 속에 잦아든다. 하지만 자장가 노랫소리만은 홀로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그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석탄 벨트 위를 기어간다. 이 장면에서 늘 쓰였던 방준석의 음악과는 별도로(물론 그의 음악도 훌륭했지만)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1965)에서 등장했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The Ecstacy of Gold>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그럼에도 음악과 화면은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이 장면은 영화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매혹적인 판타지의 표본이다.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늘 일본어를 섞어 쓰시던 아버지 밑에 자라면서 제식훈련, 교련수업, 군대생활로 점철된 1960년대생인 나의 청춘은 변형된 식민지 시대였다는 것을. 아울러 역시 좋은 영화란 허구를 통해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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