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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에서 마네의 <자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쟁으로 멈춘 시간을 넘어서는 법

어떤 의미에서 <프란츠>는 모든 예상을 깨는 영화이다. 프랑수아 오종이 찍은 ‘전쟁영화’ 혹은 그의 첫 ‘흑백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시작과 함께 서서히 무너지고, 기존의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나 파격의 코드들도 죄다 엇갈린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신선한 경험을 준다. 관객은 여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전후의 사랑’과 관련된 사건을 차례로 겪는데,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픈 마음’만이 와닿는다. 비슷한 상황을 그린 여타 영화들과는 다른 현실감이다. 원작으로 알려진 <내가 죽인 남자>(1932)와도 다르다. 상영 내내 그 이유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보며 작은 힌트를 얻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자살에 대한 우화’를 담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죽음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시신 없는 무덤에 정중히 목례하듯, 거짓에 거짓이 입혀져 전체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리고 그 허구의 구성을 관객은 직접 ‘경험’한다. 적어도 이 경험에 있어 거짓은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거짓의 영화’라고 단정짓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바꾸어 말해, 이 작품은 ‘실제로’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알려졌다시피 <프란츠>는 에른스트 루비치의 <내가 죽인 남자>를 각색한 작품이다. 그리고 루비치의 영화는 1930년에 출간된 모리스 로스탕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았다. 원작의 이야기는 프랑스 군인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오종은 독일인 약혼녀 안나의 시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후반부에 적극적으로 안나 캐릭터가 개입되면서부터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변한다. 프랑수아 오종에게 각색 작업은 드문 일이 아니다.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1999)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쓴 희곡을, <인 더 하우스>(2012)는 스페인의 희곡을 각색했다. 그리고 <스위밍 풀>(2003)은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1969)에서, <영 앤 뷰티풀>(2013)은 루이스 브뉘엘의 <세브린느>(1967)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도 그는 원작의 분위기를 상쇄시켜 자신만의 아우라를 완성해낸다. 예컨대 파스빈더 영화에서 발견되는 ‘권력의 모티브’는 에로틱한 관계의 극대화를 통해 욕망으로 전환되며, 브뉘엘의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은 봄의 태양을 만나 밝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므로 굳이 그의 작품을 원작과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프랑수아 오종 자신과의 내면적 비교를 통해 새로운 작업을 판단하는 편이 더 낫다. 특히 이번 영화 <프란츠>에서 사용된 ‘비교’ 방법은 이전에 행했던 각색의 경향을 정리해놓은 듯 명료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 후반부에 집중해 이 작품을 살피려 한다. 루비치의 영화에서 벌어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여주인공의 시선으로 재편된 후, 이전의 이야기가 발생시킨 콘트라스트에 집중해 후반부의 전개가 진행된다. 앞서 완성한 스테레오타입의 클리셰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극 전체의 목표처럼 보인다.

흑백영화라는 의외의 선택이 경제적인, 그래서 필수불가결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더라도 불쑥 삽입되는 ‘컬러’ 화면에서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후반에 이르러 색감 있는 화면에 대한 이해의 순간이 온다. 바로 ‘회상’을 통해서다. 채색되는 몇몇 장면이 안나의 ‘기억’에서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 연주’와 같이 먼 과거의 일을 현재에 끄집어내는 순간이 그렇고, ‘강에서의 수영’과 같이 감정의 결정을 생성해 차후 기억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횟수가 빈번해질수록 안나의 움직임에 강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아마도 그녀가 프랑스로 떠났던 것은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의 ‘변신’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새로운 프란츠를 통해, 즉 ‘허상적 실제’를 통해 그녀는 세상이 바뀌는 꿈을 꾼다. 이러한 그녀의 움직임을 우리는 ‘무의식에의 여정’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마네의 <자살>과 현실을 직시하기

생각해보면 1918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이들의 시간은 멈추었다. 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아버지들의 시간, 자신의 파트너를 기다리는 여인들의 시간, 그리고 직접 그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시간도 멈췄다. 이러한 ‘죽음의 시간’ 저변에는 전후의 무기력증과 존재에 대한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다. 첫 장면에서처럼 검은 옷을 입고 무덤가를 떠도는 작은 유령들이 독일사회를 배회한다. 그러던 중 불현듯 나타난 존재 하나가 도발적인 거짓말로 멈춰진 세상을 뒤흔든다. 아드리앵이 만들어내는 환영적 자기 암시가 직접 ‘프란츠’라는 새로운 무의식의 좌표를 생성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프란츠>는 ‘죽음으로 생겨난 황폐한 세계의 표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온힘을 다해 과거를 변형시키는, 병사의 환각적 꿈이 무의식의 치유를 시작한다. 그 결과, 프란츠의 부모는 자신들의 멈춰진 시간을 되살려내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안나는 다르다. 전반부의 사건에서 그녀는 이미 아드리앵의 거짓말을 인식하였다. 게다가 이후의 사건에서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가리키던 무의식의 지표마저 실은 실체 없는 허구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그녀가 그 멈춰진 시간을 넘어설 것인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즈음, 꽤나 빠른 속도로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 한점이 나타난다. 생의 허무한 실상에 맞선 무의식의 좌표가 가리키는 끝점에서 ‘마네의 프란츠’라고 부를 수 있는 <자살>(1877~81)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영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그림 속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턱시도를 입은 사내가 침대 가장자리에 흐트러진 자세로 걸쳐져 누워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권총이 매달려 있고, 복부에서는 피가 흐른다. 아마도 밤 시간에 그는 이 공간에 들어왔던 것 같다. 신발이 신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강한 심리적 압박감이 그를 억눌렀을 것이다. 해가 밝을 때까지 기다릴 만한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을 통해, 감상자들은 아침의 ‘빛’으로 죽은 자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이다. ‘밤’의 극단적 결말을 통해 우리는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 마네의 그림은 처참한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엿보게 하는 데 목표가 있다. 영화의 후반부도 마찬가지다. 안나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먼저 ‘본다’는 행위로 정리될 수 있으며, 나중에는 ‘엿본다’는 정도로 표현될 수 있다. 그만큼 부수적이며 간접적 사건들이다. 그러니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유화를 보며 그녀가 되뇌는 “이 그림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고백은 뚜렷하고 솔직한 욕망의 곡선이라 말할 수 있다. 동화에서처럼 행복한 결말이 아니기에 더욱 현실적 인식이다.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에서 결말은 늘 연약한 실체를 드러내며 아쉬운 마음을 주었던 것 같다. 이 마음을 ‘멜랑콜리’라 부를 수 있다면, <프란츠>를 본 후 남은 현실감은 우수보다는 냉정함에 더 가깝다. 아프고 서늘한 감정이 극장 밖을 떠나지 않는다. 예전 <8명의 여인들>에서 보았던 감성적이고도 이성적이며 재기발랄한 오종이 여기에는 없다. 대신 세상 전체가 거짓이고 틀렸다고, 현실을 직시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묘령의 여인이 그를 대신해 서 있다. 그녀의 시선은 고요하지만 단단하다. 묘지 앞에서 빛나는 유령보다 처참한 현실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더 아름답다는 걸 그녀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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