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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와 실존이 죽음을 욕망한다는 역설

실존과 떠남에 대하여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1975)는 사막으로 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취재를 위해 사막으로 간 로크(잭 니콜슨)는 심장마비로 죽은 타인의 신분을 도용해 타인으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신분 도용이라는 소재는 <리플리>(1999)와 같지만, 리플리(맷 데이먼)와 로크의 목적은 반대된다. 리플리의 신분 도용이 타인의 자본 또는 계급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면, 로크의 신분 도용은 자신을 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리플리는 상류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려 노력하지만, 로크는 자신을 찾는 이들을 피해 끝없이 도망쳐 다닌다. 그리고 <잃어버린 도시 Z>는 말하자면 리플리에서 시작해 로크로 끝을 맺는 이야기다.

퍼시 포셋(찰리 허냄)이 처음 볼리비아 원정을 떠나게 된 이유는 대부분의 여정이 그러하듯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당시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훈장을 얻어 불명예스러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겠노라고 다짐하며 집을 떠난다. 그의 여행은 돌아오기 위한 여행이며,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포셋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백인들의 아마존 원정은 황금과 명예를 얻어 귀환하고자 하는 여행이었다. 그들은, 몸은 정글에 있으되 마음은 언제나 유럽이나 미국에 머물렀다. 볼리비아에서 고무 사업을 하는 농장주가 이런 백인들의 전형이다. 그는 볼리비아 정글 한가운데에 ‘오페라 하우스’를 차리고 노예를 이용해 오페라를 즐기며, “평화란 변화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오페라는 서구 사회에 계속 머무르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

위치가 변하지 않는 운동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전작 <이민자>(2013)에도 이 백인과 유사한 관객이 등장한다. 쇼 호스트 브루노(호아킨 피닉스)는 자신의 쇼를 보러 온 관객에게 “의자에 편히 앉아 세계 여행을 하시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쇼가 위치를 바꾸지 않는 운동, 즉 가짜 운동임을 말하는 것이다. 관객은 브루노의 쇼에서 여러 인종의 여성들을 보고 환호하지만, 이들은 서구 백인 남성의 편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관객은 쇼가 끝나면 전과 다르지 않은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브루노의 쇼는 마치 레일 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다시 출발한 자리로 돌아오는 안전한 롤러코스터와 같다. 그들은 그들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쇼뿐만 아니라 백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도 이와 같다. 포셋이 볼리비아에서 돌아와, 영국 왕립지리학회에 아마존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도자기를 내밀었을 때, 학회원들은 “그깟 그릇!”이라며 포셋의 증거를 무시한다. 발전된 도예술은 분명한 문명의 증거임에도 이들에게는 문명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문명이 없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정복자인 백인들이 원주민에게 행한 착취와 추방, 살해의 역사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당위와 존재는 이처럼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요컨대 본다는 것은 어떤 위치에서 보는 것이며 그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면 사물의 다른 면을 볼 수 없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포셋도 마찬가지였다. 포셋은 탐사를 따라가겠다는 아내에게 “남자와 여자의 역할은 구분 돼! 이게 문명이야!”라고 소리치며 아내를 ‘야만’으로 취급한다. 이 말을 통해 ‘문명’의 야만에 대한 지배와 가부장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같은 얼굴임이 드러난다. 전작 <이민자>에서는 삼촌의 독단에 항의하는 숙모에게 삼촌이 “여긴 내 집이야!”라고 소리지른다. 자본이 가부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가부장제와 자본, 그리고 ‘문명’, 이들의 동맹은 존재자들의 위치를 고정시킨다.

왜 그는 ‘떠남’에 집착하는가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는 결국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사람들,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관객은 이들에게서 실존에 대한 고민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존이라고 번역되는 ‘existence’는 서 있는(sistere) 곳에서 나오다(ex)라는 뜻의 라틴어 ‘existere’에서 유래했다. 말하자면 실존은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운동이다.

감독의 전작 <투 러버스>(2008)에서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사랑하는 미쉘(기네스 팰트로)을 위해 가족과 직업을 모두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하는 인물이다. <이민자>의 브루노 또한 사랑하는 에바(마리옹 코티야르)를 위해 자신의 직업과 지위를 버리고, 결국에는 에바마저 놓아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다. 몇번 보지도 않은 사람과 왜 이토록 깊은 사랑에 빠지고, 왜 이들에게 사랑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중요한 의미인지에 대해서 감독은 전사(前史)를 끌어들여 명확히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배우의 표정을 통해 인물의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예를 들어 레너드의 쓸쓸한 표정을 통해 가족과 직업이 그의 공허를 조금도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레너드는 가족과 함께 고향에 있지만, 사막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도시 Z>에서도 포셋이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푸른 사막으로 불리는 볼리비아의 정글에 집착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서 명성을 얻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이미 그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겪은 일들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2차 원정을 통해 ‘야만인’에게 그들만의 문화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세계대전을 통해 가장 문명화된 유럽이 가장 야만적인 모습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에게 굳건했던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흔들리고, 그는 이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포셋에게는 고향도 푸른 사막과 다르지 않은 곳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포셋이라는 인물이 왜 머무르지 못하고 푸른 사막으로 떠나는지를 완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다만 실존과 연관해서 사유해볼 수 있다. 실존이 위치를 벗어나는 운동이라면, 이는 무한한 운동으로 귀결된다. 운동을 멈춘 곳이 존재자의 또 다른 위치가 되기 때문이다. 실존은 결국 위치를 가지지 않는, 무를 지향하는 운동이며 아무도 아닌 존재를 욕망하는 운동이다. 예컨대 <여행자>에서 로크는 그가 도용한 다른 사람의 삶이 그의 일상이 되는 순간, 다시 사막이라는 좌표가 없는 곳으로 나가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포셋은 푸른 사막에서 나침반을 보내주는 것으로 자신의 좌표를 완전히 상실하고자 한다.

실존이 죽음을 욕망한다는 역설은 시인 심보선의 시구를 빌리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청춘>)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언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라도 지각할 수는 있다. 영화의 대사처럼 지각은 이해의 범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레이에게 삶이란 목적론이나 인과율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포셋이 왜 그토록 떠남에 집착하는지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태어났거나 혹은 그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볼 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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