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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움직임과 그로 인한 균열을 놓치지 않는 우디 앨런의 시선 담긴 <원더 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80살을 넘긴 노장의 새 작품 <원더 휠>(2017)은 여태껏 접하던 우디 앨런식 영화라는 평가가 많았고 나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익숙한 전개를 따라 마지막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돌연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영화를 침범하고 들어왔음을 느꼈다. 당황함에 잠시 넋을 빼앗겼다 다시 후다닥 정신을 차렸으나 얄궂게도 영화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예쁜 관람차 하나를 보여주며 막을 내렸다. 그때 내가 영화관을 나오며 든 생각은 ‘당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영화 <올 더 머니>(2017)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에 당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 할 수 없다 하여 그저 흘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 글은 <원더 휠>이 내게 선사한 불가해한 순간을 붙잡기 위한 허튼 노력들의 흔적이다.

케이트 윈슬럿의 얼굴, 그에 집중하는 영화의 시간

영화는 코니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극이 진행될 것이라는 믹키(저스틴 팀버레이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우디 앨런의 <원더 휠> 안에 ‘믹키의 극’이 존재하는 액자식 구성인 셈이다. 여기서 지니 역의 케이트 윈슬럿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사실은, 지니가 믹키의 극 안에서 사실 조연이라는 점이다. 믹키의 극은 지니가 아닌 캐롤라이나(주노 템플)의 등장으로 시작되며 캐롤라이나가 사라지자 황망하게 끝이 난다. 지니는 자신의 삶에서도 줄곧 스스로의 존재감 없음에 괴로워하는데, 연극의 주역을 맡지 못했던 과거를 아쉬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일(웨이트리스)을 비하하는 남편의 폭력적인 말에 시달리기도 한다. 주위의 소음에 귀를 틀어막는 지니의 행동은 주변 인물들에게 눌린 채 자꾸만 위축되어가는 그녀의 상태를 드러낸다.

결국 지니는 캐롤라이나가 사라지도록 만든다. 이 순간 영화를 보는 내 입에서는 옅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히스테리에 못 이겨 경쟁자를 제거하는 여자라니 얼마나 수없이 보아온 이야기인가. 그런데 문제는 다음 장면에서 발생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믹키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참 동안 자기의 말을 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꽤 당황했는데, 그 이유는 마치 그곳에 아무도 없고 지니 혼자서 대화를 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말의 내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그녀의 묘한 태도 때문이었다. 작은 소음에도 위축되던 그녀는 이제 편안하게 이완된 채 주인공과 같은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그 드라마틱하고 연극적인 행동은 이 짧은 찰나의 순간을 연극으로 만들었으나 특이하게도 이 연극에는 관객의 자리가 삭제되어 있었다. 지니의 초점 없는 시선은 믹키도, 관객도 아닌 허공 어딘가에 던져진 채 머물렀으며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말하자면 지니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간에서 자신만을 위한 연극을 정성스레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영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질적이고 독립적인 무대가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이 장면을 두고 상황을 착각한 지니가 혼자서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미리 무대 의상 같은 옷을 입고 믹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니는 자신에게 주어질 약간의 틈, 그러니까 믹키가 찾아와서 캐롤라이나에 대해 따지고 들기 전, 그 잠깐의 찰나를 기다리며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믹키의 옛 연인으로서 예측한 것이 아니라 극의 배우로서 예감한 것이다. 그리고 믹키가 등장하자 지니는 주변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한다. 그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자신을 방해하는 소리밖에 없으므로 귀를 여는 순간 이 무대를 빼앗기게 되리라는 걸 말이다. 결국 그녀는 주인공의 옷을 입고서 세상을 향한 문을 닫은 채 자기 안으로 깊숙이 도피함으로써 무대를 지켜낸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지니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즉흥적이지 않고 계획적이다. 그녀는 지금 착각을 빙자하여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대를 지키고 있다. 이 장면에서 지니를 연기하는 케이트 윈슬럿의 모습은 실로 놀랍다. 그녀의 입은 시종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바쁘게 움직이지만 눈은 그 누구도 없다는 듯 텅 비어 있다. 나는 하나의 얼굴에서도 눈과 입이 모순적으로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그녀의 텅 빈 눈동자는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한 인간을 체화하는데, 몸은 있되 의식은 없으므로 공허하고,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기에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텅 비어 있기에 역설적으로 무한히 확장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모든 순간을 담아낸다. 이때 영화는 지니를 지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주목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내어준다. 그러므로 이 기묘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케이트 윈슬럿의 얼굴과 그것에 온전히 집중하는 영화의 시간이다.

범상한 순간들 중에서 스치는 일순간의 파열

황홀했던 순간도 지나가고, 지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아무리 돌아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관람차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일상이라도 어딘가에는 쉬이 포착하기 어려운 떨림이 존재하며, 그 단단한 지반에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을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기 직전, 공허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지니의 얼굴이 다시 한번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균열이 포착되는 순간은 모두 극(믹키의 극 혹은 영화)이 끝나기 직전이다. 우디 앨런은 어째서 극이 끝나는 순간에 균열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일까. 그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나는 이 영화적 운동을 보고서 판의 경계가 떠올랐다. 서로 다른 지각판이 만나는 경계에는 늘 균열이 존재하며 그 틈을 비집고 마그마가 분출된다. <원더 휠>에서도 하나의 극이 끝날 때마다 그 불안정한 틈 사이로 지니의 욕망이 올라온다. 하지만 금세 진압되고 마는 아들의 불장난처럼, 지니의 욕망도 자꾸만 극을 끝내려는 연출자들에 의해 금세 진압되고 만다. 그러나 그 시뻘건 욕망은 완전히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균열의 틈바구니에 몸을 비집고 앉아서는 분출되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은 채 뜨거운 숨을 헐떡이며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떠올렸을 때, 그리고 자신의 삶과 닮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우디 앨런을 생각했을 때, 나는 혹시 그에게도 영화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과 현실이라는 서로 닮은 두개의 극 사이에 존재하며, 변화하길 원하지만 비슷하게 반복되고, 파괴적인 욕망이 분출되기 전에 서둘러 균열을 봉합하게 되는 그 무언가 말이다. 결국 <원더 휠>에서 계속되는 반복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깨고 올라오는 욕망의 움직임이며 그런 균열을 놓치지 않는 우디 앨런의 시선이다.

이 영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내게 있어 <원더 휠>은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하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하여 비평적으로 동의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범상한 순간들 중에서 스치는 일순간의 파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순간을 담은 얼굴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명백한 결론 앞에서도 나는 자꾸만 그것을 의심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지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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