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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2>가 <데드풀>보다 나았던 이유

비교적 말이 되는 세계의 억지 농담

<프레스티지>(2006)의 원작자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안 좋아했다. 그는 놀란이 슈퍼히어로영화에 심리적 사실주의를 끌어들인 게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빌딩 위를 뛰어다니는 보디빌더에 대한 이야기라고. 심리학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어?” 그렇긴 하다. 하지만 놀란은 그런 걸 모르는 척하면서 심각하게 배트맨 영화들을 만들었고 그중 두 번째 영화는 걸작이다. <다크 나이트>(2008)의 심각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플레이보이 백만장자가 시장이 되거나 정치가에게 기부를 하는 대신 가면 쓴 자경단이 되어 악당을 처치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잠시 잊게 된다. 부분 부분의 심각함이 워낙 그럴싸하고 전체 그림도 말이 되어 보이고 여기저기 괜찮은 변명이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어떻게 배트모빌이 고담시의 러시아워를 뚫고 아무도 모르게 배트케이브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 건 아니지만.

난 종종 <다크 나이트> 3부작 전체가 농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유머 감각 없는 심각한 이야기꾼이 결코 완벽하게 진지할 수 없는 대상을 그리며 최대한 심각해짐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농담. 놀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배트맨 영화엔 그런 무뚝뚝한 농담의 흔적이 느껴진다.

슈퍼히어로물, 어처구니없음의 무한증식

완벽하게 말이 되는 코믹북 슈퍼히어로 이야기가 있을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는 거기에 해당이 안 된다. 일단 코믹북 슈퍼히어로 이야기는 처음부터 상황과 설정과 과학을 비교적 융통성 있게 다룬다. 둘째, 장수하는 슈퍼히어로 이야기는 대부분 시대에 뒤떨어진 설정에 기반을 두고 있기 마련이다. 이 모두를 업그레이드할 수는 없다. <슈퍼맨>의 크립톤 행성은 1930년대의 SF 상상력에 바탕을 둔 구닥다리 아이디어이고 <엑스맨>에 나오는 진화의 개념은 포켓몬의 진화만큼이나 비과학적이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들이 같은 회사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의 유니버스에 통합되면서 이야기는 더 말이 안 되기 시작한다. 애당초부터 전혀 다른 아이디어와 우주에서 시작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이면 카오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종 이들을 정리하기 위해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청소하는 것만큼 어마어마한 중노동이 동원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 세상이 특별히 더 말이 되는 곳이 되는 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곱하기를 시작하면 아무리 해결용 멀티버스를 만들어도 어처구니없음은 무한증식한다.

결국 이런 이야기는 S.T. 콜리지가 말한 ‘불신의 자발적 중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발적이기 때문에 내가 감당할 수 없다면 그건 그냥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나에겐 DC나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불신을 중지하기엔 지나치게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미칠 것처럼 갑갑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 세계에서 북구신화의 신들이 인간형 외계인이란 설정 하나 정도는 집어삼킬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을 포함한 우주가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도달할 수 있는 곳이 글렌 클로스가 리더로 있는 할리우드 엑스트라들의 동네에 불과하다면 나로서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그 단계를 통과해야 전 우주적 맬서스주의를 외치는 보라색 외계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여기까지가 내 한계다.

이렇게 보았을 때 데드풀은 내가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인공이다. 일단 그는 지금 멀티플렉스를 군림하는 슈퍼히어로 시네마틱 유니버스 중 비교적 말이 되는 세계, 그러니까 아직 디즈니 마블 유니버스에 흡수되지 않은 엑스맨 유니버스에 속해 있다. 둘째, 그는 그가 속해 있는 세계의 일관성에는 티끌만큼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허구의 세계에 속해 있는 주인공이라는 걸 알고 있고 늘 관객을 의식하며 말을 건다. 그러니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전혀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데드풀의 세계는 오히려 다른 세계보다 더 그럴싸하며 정직하다. 맬서스주의자 보라색 외계인이 이 세계에 속해 있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를 믿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데인저 마우스>의 두꺼비 악당 사일러스 그린백이 고철로 팔아먹기 위해 에펠탑을 훔치려 한다는 것을 믿었던 것처럼.

데드풀의 농담이 웃기냐고?

그렇다고 내가 첫 번째 <데드풀>(2016)을 높이 평가하거나 좋아하느냐. 그건 아니다. 나에게 이 영화는 ‘나는 농담한다!’를 끊임없이 외치는 이류 코미디언이 두 시간 동안 억지로 쥐어짠 농담 같았다. 최근 만들어지는 슈퍼히어로영화들 대부분(아마 <로건>(2017) 정도가 여기서 예외일 것이다)이 갇히고 마는 어정쩡하고 숨막히는 기성품의 영역이 있는데, <데드풀>도 여기서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했다. 종종 이 영화는 A급 블록버스터의 틀을 뒤집어쓴 중저예산 슈퍼히어로 패러디물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전성기 ZAZ 사단(데이비드, 제리 주커 형제와 짐 에이브러햄의 이름에서 따온 애칭)의 재치나 무정부주의를 갖춘 것도 아닌 그냥 그런.

그랬으니 <데드풀2>에 아무런 기대가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정작 시사회에서 보니 이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엄청 좋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아마 내가 심술을 잔뜩 뒤집어쓰고 보지 않았다면 더 즐겼을 것이다. 일단 슈퍼히어로 기원담의 지루한 의무방어가 없었다. 내가 질색하는 ‘냉장고 속의 죽은 여자’ 클리셰로 시작되긴 했지만 시간여행자 케이블이 등장했고 코미디이니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농담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케이블과 파이어피스트의 이야기는 의외로 무게감이 있었다. 영화는 정말로 뚱뚱하고 폭력적인 한 어린아이의 영혼을 구하는 데에 진지했고, 이 진지함은 저질스러운 농담으로도 완전히 덮이지 않았다. 나는 시사회가 끝나자 SNS에 이 영화가 1편보다 나았다고 썼고 그걸 본 잡지사 사람들에게 끌려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영화의 칭찬을 더 해볼까. 미안하지만 여기까지다. 더 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데드풀2>의 농담이 1편에서 이어지는 무례함과 정치적 이슈를 어떻게 결합해 균형을 잡으려 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조금만 노력한다면 나는 이 영화의 농담들을 조금 더 관대하게 해석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라색 투톤 염색을 한 유키오는 할리우드의 동양인 여성 캐릭터들 묘사에 대한 교묘한 풍자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렇게 애를 쓰며 이를 이해해주어야 하는가? 팬질하는 아이돌도 아닌데? 아무리 노력하며 봐도 <데드풀2>는 안전지대에 있는 부유한 이성애자 백인 남자들의 한가한 농담이고 이들의 여유만만함을 자비롭게 이해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이 영화의 액션 신을 찍기 위해 억지로 끌려나왔다가 안전 부재로 사망한 흑인 여성 레이서 조이 해리스를,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음에도 끝까지 위즐 역에서 밀려나지 않은 T. J. 밀러를, 불법촬영 성 편파수사를 규탄하러 혜화동에 모인 여성 시위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데드풀을 비롯한 영화 속 슈퍼히어로로 분장하고 기어나온 일베 패거리들을 생각한다. <데드풀2>의 농담이 웃기냐고? 이들을 잊을 정도로 웃기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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