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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관계와 실존에 대한 고찰

고양이는 실재하는가?

그는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 돌아선 적이 없다. 그 속에 추하고 악한 것이 있지는 않을까 미리 걱정하거나 판단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가짜 같다고, 이창동은 여겨왔다.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정말이지 그도 모른다.

이를테면 작가 지망생 종수(유아인)가 쓴 탄원서가 그렇다. 폭행치상 및 공무방해로 법정에 선 아버지의 선처를 위해 “(피고는) 정다운 이웃이었습니다”라고 썼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아는 마을 이장은 탄원서에 서명을 얹으며 말한다. “글 잘 쓰네.”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을 알 수 있는 상자처럼 결론이 정해져 있는 문장을 매끈하게 썼다는 얘기다. 아버지를 미화해서라기보다 결론을 정해놓았다는 점에서 이 탄원서는 가짜다(일단 결론이 정해지면 목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스타일의 저널리스트- 이건 긍정적인 의미다- 가 종수 아버지로 분했다). 종수가 하고 싶은 건 고유성을 지닌 예술인데 말이다. 메타영화로 볼 때 <버닝>은 <박하사탕>(1999)의 형식 실험 이후 가장 높은 목소리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작품으로 보인다(이 영화가 어느 평자로부터 낮은 점수를 받는다면 그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내겐 그 목소리가 제안을 넘어 촉구에 가깝게 들렸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자는. 심지어 종수가 벤(스티븐 연)을 추적할 때, 그러니까 관객이 종수의 시점에서 잔뜩 긴장할 때, 그간 원칙과도 같았던 음악의 금기를 심각한 데시벨로 무너뜨린다. 당신은 지금 영화를 보고 있어.

가변적인 관계가 진리에 다가서는 도구

내재와 외연의 변증법. 어느 전작보다 이 영화가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은 조형적인 것끼리의 쟁투다. 대사의 몽타주 혹은 상황들의 조응. 해미(전종서)가 보이지 않는 고양이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종수는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라고 묻는다. 해미가 팬터마임을 보여주며 했던 알쏭달쏭한 말을 받은 건데, 그녀가 응하는 말은 “기억나? 전에 나 못생겼다고 한 거?”다. 현재를 잊으면 되냐고 묻는데 과거가 기억나느냐고 되묻는 충돌. 초반부터 우리는 본 것과 기억하는 것 사이에서 골똘해진다. 우물이든 손목시계든 마찬가지다. 종수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고양이에게 “몸을 숨길거면 똥은 감추고 숨겼어야지”라 말한 다음 배설하듯 행하는 자위와 때마침 울리는 해미로부터의 전화 같은 연쇄 추돌을 전반부에 보고 있자면, 이 영화의 밀도와 속도에 관객의 태도도 수정되는 것이다.

이같은 맞부딪침에 대한 참고는, 멀리 갈 것 없이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나란히 초청된 장 뤽 고다르의 인터뷰에 있다. 이창동의 영화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 없는 고다르는 이렇게 말한다. “가령 ‘x+3=2’에서 x, 즉 세 번째를 찾기 위해 두개의 이미지를 포갤 때, 두 번째 이미지 자체에 매달려선 안 된다. 그걸 지워야 한다. 그것이 영화의 열쇠다”(<씨네21> 1156호, <이미지의 책> 장 뤽 고다르 감독 인터뷰). 관객이 영화에 개입할 때 정(正)과 반(反)을 고정불변의 존재로 인식한다면 합(合) 또한 정해진 결론 외에 달리 이를 곳이 없다. 그 사이를 보자는 얘기다. 사당동과 후암동과 파주와 반포의 관계 혹은 사회적 맥락, 장소성에 대한 개별 관객의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종수는 해미 집에 처음 들어설 때 “이만하면 괜찮네”라고 말한다. 종수의 집 마당에 앉은 벤의 첫마디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요”다. 각자의 처지와 조건 속에서 어떤 관객은 실제로 ‘우리 집보다 훨씬 좋다’고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좋은지 나쁜지 본성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의 문제가 이런 단순한 대사에서 시작한다. 종수에게 한국은 “개츠비가 너무 많은” 사회이고 벤에게는 “비닐하우스가 너무 많은” 나라다. 정해진 존재가 아닌 가변적인 관계가 진리에 다가서는 도구다.

도구에 대해 나아가 묻자. 칼은 옳은가? 말이 안 되는 질문이다. 종수의 칼은 마늘을 다질 때도 쓰이고 누군가를 찌를 때도 쓰인다. 소는 정의로운가? 종수의 소는 부정하고픈 아버지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어머니를 도울 수단이기도 하다(어머니는 우물이 있었다고 했다. 우물이 있었어야 종수는 해미를 구원한 적이 있는 것이다. 있고 없고가 단독으로 규정될 수 없다). 벤의 대사처럼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역시나 우주의 질서에 관심 많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눈 동그랗게 뜨고 물은 적이 있다. “먹이를 사냥하는 사자가 악한가?” (<인터스텔라>) 모든 것은 연기(緣起)한다. 관계하는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존재한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얘기다. 색(존재)은 곧 공(정해진 실체가 없음)이다. 고양이든 우물이든 관계를 맺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없다.

존재와 관계의 변증법

이쯤에서 양자역학의 원리로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천재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76)가 25살이던 어느 날 밤, 공원을 거닐다 한 행인을 ‘보았다’. 멀찌감치 지나가는 행인은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날 때 보이다가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행인은 다음 가로등 밑에서 다시 나타나고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생각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충분한 크기와 무게를 가진 물체가 아니라 전자(電子)라면?’ 흥분에 차 계산에 몰두한 그는 ‘전자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할 때에만, 다른 무언가와 충돌할 때에만 물질화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입자들의 관계성이자 비결정성이다(카를로 로벨리 지음,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존재론적 물리학 여행>에서 요약). 전자들이 빛이나 공기와 만날 때만 물질화한다면, 끝내 원자로 이뤄진 행인은, 나의 시선과 만나지 않은 고양이는, 과연 실재하는가? 우주의 관점에서 하이젠베르크의 행인은 전자보다 ‘충분히’ 크고 무거워서 홀로 무(無)에서 유(有)로 존재하는가?

<버닝>이 근원적이라면 이처럼 존재와 관계의 변증법, 색(色)과 공(空)의 몽타주를 이미지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10)의 문학 강좌 장면. 시인은 ‘본다’는 행위를 강조하며 사과 하나를 꺼내들고 말한다. “여러분은 사과를 본 적이 없어요.” 피해와 가해의 시점에 관한 영화로서 <>의 악센트이기도 하다. 보는 자로서 시종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버닝>의 종수는 사과가 구(球) 모양이라는 걸 알기 어렵다. 우리 모두가 달려도 사과 표면의 한치밖에 나아가지 못하는 미물이기 때문이거니와 네오리얼리즘의 분명한 연장선이기도 한 이 영화가 사과를 내려다보지 않고 사과 위에서 기꺼이 헤매는 까닭이다. 김영진 평론가의 “수평적 태도로 접근한 공감의 기운은 이 영화 곳곳에 넘쳐난다” (<씨네21> 1157호, 김영진의 <버닝> 평론)는 지적처럼 말이다.

<버닝>을 보며 이 영화를 3D로 촬영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빔 벤더스가 무대의 원근 개념을 타파한 혁신가 피나 바우슈를 3D에 담았듯, 이창동의 수평적 태도와 3D는 충분히 어울려 보인다. 추적과 방황의 운동뿐 아니라 예컨대 인천국제공항을 뒤로한 종수의 트럭 뒤 창 너머 석양과 마지막 장면에서 같은 위치에 놓인 불꽃의 대응을 입체 화면으로 본다면, 관객도 한층 흥미로운 마음으로 사과 위를 헤맬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의 뜻대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순간을 한껏 늘려 ‘연장된 현재’를 이미지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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