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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감정이 통제된 세계에서는 이미지가 지배한다

유폐된 세계

200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송곳니>는 지적이며 독설적인 야심가의 작품이었다. 세상의 지배질서와 권력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흡사 ‘황금족쇄’에 묶여 있는 무지한 자들의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것이다. 영화에서 자본가이자 가부장으로 군림하는 한 남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담장 높은 저택에 감금하고 훈육하며 살아간다. 저택 내부의 삶은 얼핏 안전하고 풍족해 보이지만, 그 유폐된 삶 이면은 왜곡된 성욕과 폭력, 지배와 복종으로 굴절되어 있다. 남자는 이제 곧 성인의 문턱으로 진입하려는 아이들에게, 담장 밖 세계는 야수와 괴물, 위험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세뇌한다. 이 허술하고 터무니없는 거짓 논리는 아이들에겐 그 자체로 진리이자 세계가 된다.

<송곳니>에서 묘사되었던 이 왜곡된 세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이후 선보였던 모든 영화적 세계의 요약이다. 비논리와 궤변, 금기와 처벌, 불가해한 세계의 질서와 폭력은 흥미롭게도 영화적 서사로까지 고스란히 관철된다. 그럼에도 란티모스는 자신이 설정한 영화적 세계와 사건들에 대해 굳이 개연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가령 2011년에 만들어진 <알프스>는 죽은 이들의 역할을 대행해주는 비밀 모임에 관한 이야기다. 그 어떤 금전적 보상이나 사적인 감정에도 연루되지 않은 이들은 조직의 납득 불가능한 금기에 수긍하고, 그 위반에 대한 처벌까지 감내한다. 관객은 왜 그들이 조직과 죽은 자 게임에 집착하는지 끝내 알 수 없다. 2015년에 선보인 <더 랍스터> 역시 세상의 끝, 불가해한 세계와 권력에 대한 또 다른 알레고리이자 풍속화이다. 남녀가 짝을 짓지 않으면 동물로 변하는 처벌을 받는 세계. 그리고 이와 반대로 반드시 홀로 살아가야만 존재를 보장받는 세계가 마주하며 쟁투를 벌인다. 권력자의 논리가 세계의 질서로 관철되는 순간,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은 금기에 순응하거나 처벌을 강요받는다. 이것은 흡사 지배적 가치와 부르주아 교양주의를 가치 전복적으로 풍자했던 루이스 브뉘엘의 <자유의 환영>(1974)을 연상시키는 란티모스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필모그래피는 드디어 <킬링 디어>로 이어진다. 그리스 신화, ‘이피게네이아의 비극’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심장의학 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은 몇년 전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숙명과 죄의식, 단죄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첨단 과학과 자본의 마천루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받았던 미국 상류층 중년 남자의 삶은 느닷없이 끼어든 한 소년의 ‘말’과 ‘시선’에 의해 비과학과 주술, 은유와 상징, 속죄와 희생양이라는 신화적인 세계로 전도된 것이다. 그 세계는 또다시 비극으로 귀결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친족살해의 죄의식과 함께 유폐된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 <더 랍스터>에 흥미로운 대사가 등장한다. 감정을 통제하는 세계로부터 탈주한 ‘근시 여인’ (레이첼 바이스)은 “감정이란 억지로 만드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말한다. 연인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을 테마로 삼았던 <더 랍스터>는 물론이고, 죽은 자의 말과 행동을 재연하되 그들의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역할놀이를 진행했던 <알프스>, 그리고 오로지 생물학적 배설 행위로만 허용되었던 <송곳니>의 섹스 신까지, ‘금지된 감정’은 란티모스의 서사와 시각적 스타일에 있어서도 중요한 테마였다. 이것은 <킬링 디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절개된 가슴 사이에서 박동하는 심장을 길게 클로즈업하는 이 영화의 오프닝숏은 핏빛 심장의 원초적인 이미지 그 자체만으로도 격렬하며, 필사적인 생존욕구와 더불어 불온한 긴장(신화적 제물)까지 야기한다. 그러나 이에 대비되는 바로 다음 컷은 의사 스티븐과 동료의 무의미하고 건조한 대화 신이다. 이 장면은 소년 마틴(배리 케오간)과의 만남, 그리고 주인공 가족의 저녁 식사 신의 무겁고 권위적인 분위기까지 연결된다. 그의 전작에 대한 리뷰에서 ‘기계인형’으로까지 비유되던 란티모스 특유의 건조함은 영화 속 캐릭터로부터 감정을 지워버리는 특유의 ‘무드’이자 ‘모드’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영화 <킬링 디어>는 유독 하나의 캐릭터에 기묘한 힘을 불어넣는다. 16살 소년 마틴이다. 그 역시 여느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건조하고 느린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와 시선은 저항 불가능한 명령처럼 여타 캐릭터들을 장악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 캐릭터와 사건은 분명 장르적 게임이며, 마틴은 게임의 조정자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재밌는 것은 이 가학적 지배의 논리가 단순히 캐릭터의 대사와 사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카메라의 독특한 수사학을 통해 고조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초반 긴 복도를 따라 이동하는 롱테이크숏을 목격한 바 있다. 특히 병원 복도를 따라 빈번하게 등장하는 롱테이크숏들은 때로는 부감 혹은 앙각으로 주인공 스티븐을 바짝 뒤쫓거나 응시한다.

게다가 여기에 결합되는 묵중한 클래식 음향들은 어딘지 기시감을 자극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스탠리 큐브릭이 <샤이닝>(1980) - 그리고 미궁과 판타지, 금기와 처벌이라는 측면에서 상동적인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1999)까지 - 의 전망 호텔과 미궁에서 선보였던 예의 카메라워킹과 미장센들인 것이다. 큐브릭의 세계에서 그것이 단순히 시각적 기교가 아니라, 귀기어린 존재의 전능한 지배력과 시선으로 귀속되는 힘의 과시였다. 이러한 유령적 전능성은 <킬링 디어>에서 노골적으로 그 의미와 스타일을 오마주하며 차용된다. 그것은 서서히 스티븐 가족에게 다가가 불안을 자극하고 감정을 지배하고 운명을 포획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친부 살해가 친자 살해로 역전되는 신화적 비극, 그리고 역시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을 레퍼런스로 삼는, 스티븐의 아내 안나 역의 니콜 키드먼(의사 남편과 그에 대한 의심, 심지어 그녀가 파티장에서 입는 검은 드레스까지)의 존재와 성적 판타지, 침실 및 파티장의 조명과 색채의 미장센, 클래식 선율과 숏의 기이한 몽타주들은 명백히 큐브릭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란티모스의 흥미로운 재해석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슬로모션과 드넓은 설정 숏을 쓰는 방식은 아름답다. 가령 마틴이 킴(래피 캐시디)의 감정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과정은 대사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둘이 함께 산보를 하거나 오토바이를 타는 것과 같은 소소한 장면들만으로 구축된다. 그러나 숏의 속도와 사운드, 오블리크한 앵글만으로도 불온한 지배력과 비극의 운명은 충분히 암시된다. 또한 신이 전환될 때 삽입되는 와이드한 설정 숏들은 분명 아름답지만 동시에 숨막히는 고립감과 출구 없는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 넓은 공간에서 인물은 오로지 저주받은 자들로 한정된다. 넓지만 유폐된, 모순적인 공간과 이미지들이 이 영화를 지배한다.

표면적으로 <킬링 디어>는 스릴러와 오컬트 장르의 컨벤션과 포뮬라를 차용한다. 그래서 이것은 또한 할리우드 스릴러 장르를 전복적으로 패러디했던 미하엘 하네케의 <퍼니게임>(1997)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장르적 문법에 따라 사건과 장면을 예측하고 긴장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주인공 의사는 왜 소년을 만나는가? 소년은 왜 그 가족에 접근하는가? 소년의 저주는 정말로 발생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안나가 깨어나 침대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그녀가 걷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누구를 희생양으로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알고 있기에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스티븐이 가족을 응시하는 순간마다 살해의 순간이 아닐지 긴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결말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그 질문들이 전혀 유효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진짜 질문은 역시 마틴에 의해 말해진다. 안나가 마틴에게 ‘왜 남편의 잘못으로 인해 나와 아이들이 처벌당해야만 하는가’를 질문한다. 이에 대한 마틴의 응답.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공평한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 유일하게 정의에 가까운 일이에요.” 저주에 가까운 마틴의 행위에 대한 논리는 윤리적 딜레마를 자극한다. 음주 의사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반격은 어디까지가 공평과 정의에 해당하는 것인가? <킬링 디어>는 전작들에 이어 란티모스가 구축하는 비극의 판타지 혹은 고문받던 마틴이 내뱉은 단어 그대로, 정의와 권력에 관한 우아하고 처연한 ‘은유’와 ‘상징’의 ‘예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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