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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의 엄청난 흥행, <뺑반> <기묘한 가족>이 택한 다른 길

이병헌 감독에게 관객은 왜 응답했나

<극한직업>

<극한직업>을 ‘정통 코미디’로 받아들인 모 평자의 반응을 보고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그걸로 글 하나를 완성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흐를 동안, <뺑반>과 <기묘한 가족>을 마저 보았다. 설날 전후에 개봉하는 3편의 영화에서 공통으로 읽어낸 부분이 있어 글로 엮으면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모른 척하고 영화의 흥행과 상관없는 글을 쓰자니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어색하지만 하나의 글 안에 느슨하게 연결된 두 가지의 글을 써보기로 했다. 지금 와서 <극한직업>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고 말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우선, 이 영화가 지닌 외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병헌이란 감독의 행보가 가져온 신선한 바람을 느껴야 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극도로 저조했던 2018년의 한국영화로 확장해서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 글이 전체의 전반부에 해당한다면, 후반부에 해당하는 글에서는 원래 의도한 바대로 <극한직업> <뺑반> <기묘한 가족>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소재 혹은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병헌으로부터 얻는 힌트

2018년 한국영화는 고전을 면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2017년 상황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2015년과 2016년의 박스오피스를 대비해보면 시장 하락세가 확연하게 눈에 띈다. 지난해 말, 100억원대 자본을 들인 영화들의 연이은 실패를 다룬 기사들이 몇 가지 나왔으나 현상의 나열 이상으로 파고들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러다 <극한직업>이 흥행하자 갑자기 ‘무거운 영화에 대한 피곤함’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진지한 비판과 어정쩡한 고민 사이에 머문 영화들에 물린 관객에게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극한직업>은 제격이었단 식의 진단이 들린다. 천만 넘는 관객을 동원한 16편의 한국영화 가운데 코미디로 분류되는 영화는 딱 두편- <7번방의 선물>과 <극한직업>- 이다. 수치상으로 한국관객이 딱히 코미디에 호의적인 건 아니라는 소리다. <7번방의 선물>이 개봉한 2013년 1월과 올해 1월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내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거니와 나는 지금 왜 관객이 웃고 싶었는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생활이 고달팠다고? 어느 시대의 누군들 안 그랬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난해에 줄줄이 망한 대작들과 <극한직업>의 가운데 서서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었다. 2018년 한국영화의 입지는 갑자기 출현한 것이라기보다 오랜 누적의 결과로 보는 게 맞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는 한국영화의 부활 지점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았던 감독들이 있다. 잠시나마 어마어마한 관객을 동원했던 조폭 코미디의 감독들은 곧 잊혔지만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류승완 등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가이면서 영화산업을 견인하는 이름으로 계속 호명되었다. 오래전 나는 한 칼럼에서 그들의 존재가 소중한 반면 대중영화 영역에서 무언가 어긋난 부분이 있음을 거론했다. 작가영화와 대중영화를 동시에 성취한 한국적 상황은 흥미로웠으나, 정작 그들 혹은 그들 외의 감독들이 한국적 장르로 거론될 만한 무언가를 빚어내지 못한 것이 불안했다.

이후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들은 ‘포스트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의 자리에 오르려고 경쟁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경쟁이야 무엇이 나쁘겠냐만 영화 제작의 발목을 잡는 몇 가지 현상이 거듭된다면 그건 문제다. 첫 번째는 감독이 항상 각본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다. 성공한 감독들에게 다음 작품에 대해 물을 때마다 듣는 첫마디는 “각본을 쓰고 있다” 혹은 “아직 각본을 쓰지 않았다”다. 각본이 물 흐르듯이 흘러나와 항상 대기 중이라면 문제될 것 없으나 대중영화 시스템 내부에서 각본을 쓰고 수정하는 데 2, 3년의 시간을 보내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왜 한국의 성공한 감독들은 자기가 각본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시 말하거니와 완전한 작가로 평가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런 상황을 계속 만들어낸다.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작가들이라면 몰라도 대중영화를 자주 선보여야 할 감독은 스스로에게 왜 각본을 고집하는지 물어봐야 한다.

감독은 스스로 각본을 쓰는 데 긴 시간을 투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와 각본에 힘을 주게 된다. 평범한 보통 사람의 영화로부터 관심이 멀어져, 무겁고 진지하면서 빛깔도 좋은 영화를 머릿속으로 그린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그런 결과물을 얻는 데 짧은 시간으로는 턱도 없다. 좋은 각본이 완성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더 큰 난제가 대기하고 있다. 경험상 그런 각본은 꼭 대자본을 요구한다. 열심히 노력을 들인 만큼 거대한 이야기, 휘황찬란한 볼거리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사소한 이야기, 소박한 볼거리는 안중에 없다. 100억원 혹은 그 이상을 호가하는 제작비와 환경을 마련하자니 또 인력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한다(하긴 한국에선 무슨 마법인지 100억원 정도는 어디선가 뚝딱 등장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것이 전체적으로 악순환을 부른다. 악순환의 정점은 시간의 허비다. 30대 감독이 영화 두어편 찍으면 40대가 되고, 다시 두어편 찍다 한두편 제작이 뒤집히면 금방 50대가 된다. 당신들은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가 아니다.

2018년 한국영화의 저조는 위에서 말한 문제들이 집단적으로, 그리고 극명하게 드러난 결과다. 100억원짜리 기업이 지난 한해에만 10곳 가까이 도산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지금 2018년에 나온 한국영화들의 작품성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영화들이 대중영화의 시스템 내부에서 어떻게, 왜 실패했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거다. 일단 지난해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고 실패한 영화들을 나열해보라. 감독들은 대개 전작의 성공을 맛본 자들이며, 절반 이상은 감독이 직접 각본에 손댄 작품들이다. 반대로 효과적인 흥행 성공을 거둔 <완벽한 타인> <독전> <곤지암> 등은 리메이크였거나 효율적인 제작 시스템이 뒷받침된 작품들이고, 우연인지 세 영화의 감독은 전작의 상대적인 흥행 실패로 손에 쥔 카드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18년에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달성한 <신과 함께-인과 연>의 김용화와 올해가 시작하자마자 천만 관객을 모은 <극한직업>의 이병헌은 기존의 한국 대중영화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에 해당한다.

흥행 감독의 이력을 쌓아가다 <미스터 고>(2013)로 큰 실패를 맛본 김용화는 이후 내부 시스템의 운용에 더욱 힘을 쏟으면서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장르적 특성, 대중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병헌이다. 이병헌이란 감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위에 언급한 한국영화 시스템의 고질적 문제에서 벗어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시스템의 억압 사이에서 슬기롭게 처신했다. 데뷔 이전부터 강형철 감독의 영화에 작가로 참여한 경력이 있음에도 그는 자기 영화는 꼭 자기 각본으로 찍어야 한다는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 각본을 쓰고 수정하는 데 수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제작 전에 이미 진이 빠지는, 그런 한심한 상황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투다. 좋은 각본이 있으면 거기에 자신의 양념을 쳐 더 좋게 만들면 된다. 상업영화 데뷔 이후 이병헌이 오리지널 각본을 쓴 작품은 <스물>(2014)뿐이다. 진입하기가 쉽지 않은 시장에서 젊은 감독에게 작품을 만드는 기회도 더 주어졌다. 수치로 따져 4년 동안 3편의 영화를 내놓은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본으로부터의 자유는 오히려 이병헌이란 감독의 색채를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각본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난 만큼 그는 장르의 허울로부터도 자유로운 감독이다. 그렇게 얻은 자유를 그는 작품의 질에 쏟아부었다. 여기서 질이라 함은, 코미디 장르의 에센스라 불릴 만한 요소들을 말한다. 코미디는 장르의 태동기부터 유지되어온, 즉 장르의 근간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하위 장르인 양 대우받곤 한다. 이병헌은 코미디를 찍는 것에 대해 어떤 콤플렉스도 느끼지 않으며, 코미디 장르에서 성공한 이후에 단박에 다른 장르로 갈아타겠다고 계획하는 인물도 아니다. 좀 과장해 말하자면, 작가의 고질병에 빠진 한국영화계에 아주 ‘신박한’ 인물이 등장한 셈이다. 그의 전작들- <스물>, <바람 바람 바람>(2017)을 본 관객은 신기할 정도로 이병헌이란 이름을 잘 기억한다. 물론 유명 배우와 이름이 같다는 장점 덕분이겠으나, 코미디를 찍던 여타 감독들의 이름이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되지 못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의 영화가 안겨준 코미디적 요소를 관객이 먼저 인정했다는 말이다. <극한직업>의 성공 밑에는 그런 토양이 깔려 있다. 단순히 웃기는 대사 몇 마디로 성공한 영화가 아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생전의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에 대해 알게 된 후, 리들리 스콧 같은 주변의 노장 감독들에게 작품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아흔 가까운 나이에 지난해에만 두편의 영화를 거푸 내놓은 이스트우드가 신기했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작품을 동시에 진행해온 스티븐 스필버그는 또 어떤가. 작품과 작품 사이에 매번 3, 4년 이상의 시간을 꼬박꼬박 보내는 한국 감독들이라면 그들의 기술과 지혜를 들여다볼 일이다. 이병헌은 천만 영화를 연출한 최연소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헛된 고집을 피울 것이냐, 지혜롭게 행동할 것이냐, 그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마돈나는 <Music>에서 “음악은 부르주아와 반골을 섞어놓는다”라고 노래했다. 영화도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는 단순히 돈을 벌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난 설을 통과하면서 <극한직업>은 과연 위대한 일을 해냈다.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물경 천수백만명이 훌쩍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찾았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는 신분의 벽이 없다. 극장 밖에서야 다른 신분을 가지고 살겠으나 객석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그들은 차이 없는 시간을 보낸다. 웃을 일이 별로 없다던 그들이 함께 배를 잡고 웃었다는 글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들은 대체 무엇에 그리 공감했을까? 아마도 주인공 고 반장(류승룡)의 처지가 아니었을까. 고 반장의 입장은 <뺑반>과 <기묘한 가족>에 나오는 인물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관객 앞에 나타난 그들은 대체로 ‘미래에 대한 불안, 빈곤층으로의 추락에 대한 공포, 가난의 경험’을 느슨하게 공유하고 있다. 그들을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것이다. 행동이 어떠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이 느끼는 불안의 기저는 동일하다, 불확실한 미래. 2019년이 시작하자마자 나온 세편의 영화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극한직업>과 <뺑반> <기묘한 가족> -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기

고 반장이 이끄는 마약반은 실적이 좋지 않아 해체 위기에 놓인다. 경찰 조직 내에서 별로 신뢰도도 높지 않은 고 반장이 자기 미래를 밝게 볼 리 없다. 쉴 나이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조직이 당장 내일이라도 자신을 쫓아낼 것 같은 위기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IMF 외환 위기 이전에도 살기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러나 IMF 외환 위기라는 상황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공식적으로 인증받기에 이르렀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월급이 잘 나온다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대비한들 불안감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만연한 불안이 주변을 에워싼다. IMF 외환 위기 전에 직장인들이 종종 내뱉던 말은 “안 되면 택시나 운전하겠다” 또는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겠다” 같은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상징적인 말투로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했다. 그런데 IMF 외환 위기 이후 직장인들은 자영업을 제2의 삶의 방안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수많은 직장인들이 조그만 가게를 여는 길을 택했다. 그러므로 고 반장이 잠복근무 도중 머물게 된 치킨집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 충분히 뽑아 올릴 만한 이야기였다. 몇년 전, 나는 다른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극한직업>이 그 영화를 카피했다고 말할 마음은 없다. <극한직업>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흥미로운 소재를 선택해 이야기를 전개했을 따름이다.

<뺑반>은 경찰 내부에서 갈 길을 놓고 고민하는 은시연 경위(공효진)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출세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선배 윤 과장(염정아)이 있다. 그런데 <뺑반>의 실제 주인공은 순경 서민재(류준열)와 사업가 정재철(조정석)이다. 시연이 민재와 재철이 벌이는 싸움을 바라보면서 인간이자 경찰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를 깨닫기 때문이다. 민재와 재철은 둘 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약 운반을 하면서 불우한 사춘기를 보냈던 민재는 구렁텅이에서 은인을 만나 경찰이 됐고, 재철은 가난했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이재에 힘쓰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극한직업>의 고 반장이 엉뚱한 선택을 했음에도 충분히 공감을 산 것과 달리 <뺑반>은 영화가 한참 진행되도록 대체 어느 인물에 공감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인물과 이야기의 축이 둘 혹은 셋으로 갈라져 있어서 왔다 갔다 한다(한준희 감독의 전작 <차이나타운>(2014)처럼). 가난과 범죄가 연결되는 이야기는 정의를 찾는 경찰 시연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기보다 충돌하는 경우가 더 잦다. 엄청난 차들은 도로 위를 험난하게 달리는데, 달려나가야 할 이야기는 정작 인물에 걸려 넘어질 판이다.

<기묘한 가족>은 호러에 어울릴 소재를 코미디로 끌어온 작품이다. 좀비가 뛰어든 코미디 <기묘한 가족>은 한적한 국도변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사실 주유소는 망한 지 오래, 영화는 일종의 범죄 행위를 통해 돈을 버는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근래 한국의 상업영화가 빈공층과 거리를 둬온 것과 다르게 독립영화에서 빈곤층은 낯설지 않다. 비율로 따지면 거의 3분의 1에 육박할 정도인데, 그러한 빈곤의 드라마 중 또 적지 않은 수가 범죄와 랑데부한다. 돈이 필요한데 구할 길이 없어 누군가를 납치하거나 살인까지 벌인다는 식이다. 그러한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와 만난 결과가 <기묘한 가족>이라고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다.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제작된 <기묘한 가족>에는, 거대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들에서 접하게 되는 억눌린 인상이 적다. 식상한 말이지만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은 듯한 <기묘한 가족>은 김지운의 1998년작 <조용한 가족>의 21세기 버전 같다. <조용한 가족>의 가족은 이제 막 산장을 열어 돈을 벌어보려는 사람들이고, <기묘한 가족>의 가족은 돈을 벌어보려다 이미 사업을 말아먹은 사람들이다. 막무가내로 사업을 운영하는 두 가족에게 돈벌이는 언감생심 어울리지 않는다. <기묘한 가족>에서 가족들이 좀비와 벌이는 한바탕 싸움은, <조용한 가족>에서 가족들이 원인 모를 시체들과 벌이는 소동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질문은 그것이다, 오랜 편집 경력을 지닌 이민재 감독이 <조용한 가족>의 세기말 가족을 21세기 영화에 이식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뺑반>은 후반부에 이르러 민재와 재철의 이야기로 갈피를 잡으려고 한다. 민재는 서부극의 고독한 영웅 캐릭터다.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향해 돌진하는 인물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것도 가난했던 청년이.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민재의 매력은 재철과 맞붙으면서 나와야 한다. 둘 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민재는 더러운 방식으로 삶을 영위해온 재철에게 맞선다. 영화는 민재가 재철과 피 터지는 싸움 끝에 승부를 가르는 과정을 긴박하게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몇몇 구멍을 메워야 하지만 장르의 속도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그 과정의 설득력이다. <뺑반>에서 민재가 추구하는, 그리고 민재를 통해 시연이 깨닫는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게 문제다. ‘인간이 된다는 것,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으로 쉽고 단순하게 표현하면 될 것들이 시원하게 제시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언어들로 건네진다. 그러니 딱딱한 교훈을 주입한다는 인상을 준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재철과 같은 악당들이 현실에서 더 잘된다는 푸념이다. 권력과 돈으로 결탁됐음에도 웃으며 잘 자는 인간들이 널렸는데, 민재가 재철과 싸워 이겨봐야 통쾌함은 얻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의 결말에서 재철이 또 다른 계획을 꾸민다는 설정은 ‘악당이 더 잘 잔다’는 주제로 선회하도록 만든다. 민재처럼 살아봐야 마음 편할 일 없다는 결론, 개운한 결말은 아니다.

<기묘한 가족>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다. <조용한 가족>의 욕망은 <기묘한 가족>에서 그대로 재연된다. 체질적으로 돈벌이에 어울리지 않거니와 무계획이 특기인 꿈은 냉엄한 사회구조에서 실현되기 어려울 것임이 예상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돈을 벌기를 욕망하는데, 기이하게도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생각지 않는다. 누군가 그들에게 돈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대답을 망설일 것처럼 보인다. 산이 있어 등산하듯이 그냥 돈이 있으니까 자기 주머니에 넣고 싶다는 식이다. 돈과 끈끈하고 철저하게 맺어져 있으면서도 정작 무개념으로 일관하는 인물의 특성은 좀비의 등장으로 인해 거울을 얻는다. 그러나 거울로 머릿속 상태를 비춰보지는 못하는 법, 그게 <기묘한 가족>의 소동을 낳는다. 눈앞의 좀비에 대처하는 것 외엔 갈 곳을 잃어버린 가족이 내 모습이라고 한들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기묘한 가족>은 기특하게도, 나와 당신의 욕망을 조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 머물렀다면 B급 취향의 괴상한 영화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목적과 방향성을 지닌 인물은 아버지(<조용한 가족>에서 아버지로 나왔던 박인환이 분했다)다. 세상이 멸망할 동안, 그는 가족의 돈을 빼내 꿈에 그리던 하와이 여행을 무사히 다녀온다. 목적을 지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에게 좀비 항체 보유자의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 그에게 묵시록적 사회의 미래를 묻는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한다. 이민재 감독은 좀비처럼 방황하는 존재들에게 손가락을 겨누는 것으로도 모자라 겁도 없이 정체성을 묻는다. 길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정체성, 좀비 코미디엔 과한 꿈이었을까. 너무 멀리 간 영화에 관객이 벌을 내린 지금, 감독은 자기가 가는 길을 알고 있었는지 나는 궁금하다. 이 영화에 호의적인 나는 알고 있었을 거라는 쪽이다.

<뺑반>과 <기묘한 가족>을 놓고 보면, 이야기와 인물이 딜레마에 빠졌을 때 어디로 갈지 선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뺑반>은 주제와 교훈을 고수하기를 선택했고, <기묘한 가족>은 뻔뻔한 이야기하기 방식대로 끝까지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극한직업>이 부딪혔을 딜레마는 치킨 가게가 성공한 바로 그 지점에 자리한다. 마약반 동료들이 성공한 치킨 가게에 미치도록 매달려 있을 때, 혼자 바깥에서 잠복수사를 펼치던 영호(이동휘)는 범인은 언제 잡을 것인지 따진다. 자기 가게가 성공한 양 즐거워하던 관객도 질문하게 된다. “그러게, 언제까지 닭만 튀기고 있을 건가?” 심지어 체인화한 치킨 가게를 통해 전국적으로 마약이 유통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마당이니 인물들은 법을 지키는 형사로서 심각한 자격 상실에 처한다. 맛깔나는 대사를 안아 든 배우들의 날렵한 입담으로 전반부의 코미디를 지탱했던 영화는 후반부의 변신을 마련한다. 고 반장과 동료들이 반성한다거나 윤리성을 회복하는 일은 장르의 전개 과정에서 재미없다고 이병헌은 판단했을 것이다. 그는 전반부의 코미디에 후반부의 액션으로 대구를 형성했다. 근래 몇년간 관객과 만나 실패하지 않은 장르인 형사 액션물로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작전이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경찰 내부에서 무능의 아이콘 같았던 그들이 치킨 가게를 성공시키는 것도 모자라 숨겨진 전투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이병헌은 말한다, 이미 나쁜놈들과 싸워 시원하게 이기고 있는데 그런 걸 따져서 뭐할거냐고.

누군가는 <극한직업>의 시나리오가 완벽했다고 말했다. 어림없는 말이다. <극한직업>은 시나리오의 구멍을 연출의 힘으로 밀어붙인 경우다. 이병헌이 지닌 연출의 힘은 나와 당신이 즐거워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는 데서 나온다. <인랑>(2018)에서 중경(강동원)과 윤희(한효주)가 키스를 나누었을 때 난데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나는 “그들이 이미 눈빛으로 감정을 나누지 않았냐”고 따졌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극한직업>의 엔딩에서 그야말로 난데없이 장 형사(이하늬)와 마형사(진선규)가 키스를 나누는데, 그걸 보고 딴지를 거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냥 웃는 것으로 반응했다. <인랑>의 키스 신 연출이 <극한직업>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게 아니다. <극한직업>을 보는 내내 호감을 쌓은 관객은 결말 즈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병헌은 그 믿음을 얻어냈다. 종종 장르의 가치를 폄하받던 코미디로 그걸 해냈으니 더 박수를 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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