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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왕> 독립영화적인 서사에서 벗어나기

가능의 장소, 가변적 관계

영화 만들기를 환유하는 영화에 관한 영화. <국경의 왕>이 영화 만들기에 관한 자기 반영적 영화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배우 김새벽을 제외하면 감독의 전작 <라오스>(2014) 출연진이 대부분 합류한 데다 감독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탭이 배우를 겸한다. 주요 캐릭터는 영화를 만들었거나, 만들기 위해 일단은 무언가를 쓰거나 구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이가 임정환 감독만은 아니며, 자기 반영성은 만드는 방식의 곤궁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때도 있다. 물론 곤궁이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종종 자기만족적 신세 한탄이 자기 반영성으로 둔갑하며, 이 둘을 분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적어도 지금의 한국 독립영화를 논할 때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설명에는 부연이 필요하다.

<국경의 왕>에는 현실의 조건과 충돌하며 돌출되는 서사적 야심이 있다. 이것이 여타 독립영화와 다른 임정환 감독만의 개성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감독은 낯선 땅에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도착한 여행객을 보여주지만, 여행객이 낯선 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뒤 다시 원래의 장소로 회귀하는 방식의 전형적인 여행자 서사와 거리가 멀다. 여행지에서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린 인물들이 머물거나 떠나기를 선택하기도 전에, 이야기는 다른 형태로 이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행지는 단순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환기하는 그럴듯한 도구가 아니라 서사를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감독의 영화제작 방식이 실제로 그럴 뿐만 아니라 영화 내부에서는 일종의 미신적인 주술로서 그렇다. 감독은 <라오스> 이후 대략적인 이야기의 얼개만 가지고 사람들을 모아 출국한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면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 내부에서도 ‘떠남’은 일종의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어느 밤 유진(김새벽)이 울린 종소리에 나타난 유령은 그에게 “떠나면 된다”라고 일러준다. 비현실적인 인물과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감독은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관객을 설득할 생각이 전혀 없다. 감독의 태도는 설득이 아니라 주문 외기에 가깝다. 꽃을 주는 관상가, 종을 내미는 교회남자, 동방정교회 교회 앞에서 기도하는 불교 신자 원식(정혁기), 나아가 동철(조현철)이 몰두하는 ‘포켓몬 잡기 게임’ 등 영화 속 인물들이 지닌 종교에 가까운 믿음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요구된다.

인물들이 이상하리만치 자주 언급하는 세르게이/세르지오라는 이국의 이름은 짧고 효과적인 주술처럼 들린다. 원식은 세르게이(박진수)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세르지오라고 잘못 부르곤 하는데 그 덕에 세르게이/세르지오라는 이름은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원식의 착각으로 동유럽식 이름과 이탈리아식 이름이 꽤 자연스럽게 겹치는데, 이 과정에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예기치 않게 소환된다. 웨스턴 장르를 이탈리아에 들여온 스파게티 웨스턴의 대표 인물이자 말년에는 미국에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를 만든 레오네는 미국과 유럽을 넘나든 ‘횡단의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영화에서 한번도 등장하거나 언급되지 않은 ‘국경의 왕’의 실체를 세르지오 레오네라고 치환하는 것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것이 뭐 어쨌다는 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원식의 ‘착각’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라는 현재의 장소를 넘어 이국적인 것이 혼란스럽게 우글거리는 작은 틈을 연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환상 속에서 환기되는 상상의 왕이라면, 실제 차원에서 국경의 왕은 유진 주변에 불쑥 나타나는 남자(임철)다. 그의 정체는 매 순간 변화한다. 1부에서는 조선족이다가, 2부에는 북한 사람으로 언급되며, 사람들의 대화에서 고려인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마지막에 그는 자신을 ‘유령’이라고 소개한다. 국적의 경계를 넘는 동시에,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는 그는 어떤 인물이 아니라 가능성 그 자체를 육화한 인물인 것도 같다. 1부에서 그는 유진에게 ‘오늘 만난 낯선 이가 낯선 이가 아닐 수도 있다’, ‘우연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가능성에 관한 말을 늘어놓는다. 이것은 그가 가능성을 표상한 인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주술이자 힌트다. 남자가 유진에게 준 물건들은 몇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꽃’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마음(이를테면 유진이 동철에게 준 꽃 화분)이자 묘지의 이미지와 함께 등장하면서 죽음, 추모라는 의미 역시 지닌다. 세번 울리면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종은 누군가를 종교로 끌어들이거나 돈을 벌기 위한 상술처럼 보이지만, 마침내 실제 주술적인 기능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 <국경의 왕>을 마주하며 느낄 수밖에 없는 혼란의 정체 역시 어떤 것도 가능한 상황이 만들어낸 신기루처럼 보인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혹은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허구인지 가려내는 것은 의미 없다. 가능성은 그 자체로 인물의 정체성을 읽는 방식인 동시에, 그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화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국경의 왕을 찾아서’라는 별도의 제목으로 시작되는 2부는 1부에 관한 느슨한 메이킹 필름이다. 이때 ‘만들어지는’(메이킹) 것은 통상적으로 일컫는 영화 촬영의 단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시나리오 단계 혹은 시나리오 이전의 경험과 기억의 차원을 가리킨다. 이는 서사적 측면을 향한 영화의 관심이 보여주는 것이자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점을 마련한다. 현철(극중 에피소드에 따라 동철이 현철로 불린다.-편집자)은 유진에게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영화 안에서 하려다 보니 결말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영화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이자 현실의 불가능을 일깨우는 토대다. 이를 바탕으로 돌이켜보면, 1부는 가능한 이야기인 동시에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모순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터무니없어 보이는 동철과 원식 그리고 세르게이의 이야기 역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여지를 준다. 범죄, 모험, 미스터리 등 장르영화를 환기하는 동시에 철저히 ‘독립영화적’ 방식으로 구현된 이 에피소드는 어쩌면 독립영화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그 모든 이야기의 혼합물이자 실현일 수 있다.

<국경의 왕>은 1부와 2부의 분절된 구조를 통해 영화를 시청각적 실현 이전, 시나리오 혹은 이야기의 차원으로 해체하면서 ‘가능한’ 독립영화의 서사가 무엇인지에 관해 질문한다. 낯선 땅에서 유진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 은경(이유진)은 영화 일을 그만둔 뒤 폴란드에서 다른 일을 하는 중이다. 영화를 여닫는 장소로 의미심장하게 등장한 폴란드의 공원묘지는 어쩌면 그 안에 잠든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피지 못한 이야기를 꽃으로 추모할 것인가, 종을 울려 깨울 것인가. 영화가 멈춰 선 곳은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다. 그 사이에서 <국경의 왕>은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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