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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를 다시 보게 하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다

자기 자신 되기

<어스>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첫 번째,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두 번째, 도플갱어가 나오는 통로는 왜 놀이공원의 내부에 있는가? 세 번째, 레드의 끝없는 무용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이 질문들에 따라서 <어스>를 보는 관점은 세개 혹은 그 이상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어린 애들레이드가 들어간 놀이공원 거울 방에서 거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거울 방 내부에서는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신화가 흘러나온다.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이 신화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다룬 레슬리 마몬 실코의 장편소설 <의식>에도 등장한다. 거미 여인 치치나코가 대상을 상상함으로써 대상을 현존하게 만든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화다. 거미 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이며, 그렇기에 거미 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상징이며, 거미에 비유되는 레드 또한 원주민에 대한 상징이라 볼 수 있다. 도플갱어들이 <신체강탈자의 침입>(1956)에서처럼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설정만 봐도 도플갱어를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왜 거미를 창조의 신으로 생각했을까? 거미는 자신의 몸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거미줄은 도플갱어들이 손을 맞잡고 연결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세계와 맺었던 관계들을 단절함으로써 탄생했다. 도플갱어들이 사용하는 흉기가 무엇인가를 잘라내는 가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던 필 감독은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이지만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대량학살하에 일군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바탕으로 “우리는 미국인이다”라는 레드의 대사를 해석해보면, 이 대사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우리도 동등한 미국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라’는 선언적인 의미가 첫 번째이며, ‘우리도 너희와 같은 학살자로서 미국인이다’라는 비판적인 의미가 두 번째이다. “학살의 망각이 학살의 일부”(장 보드리야르)라면, 학살을 기억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이다. 물론 <어스>를 단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학살의 기억만으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도플갱어들이 살고 있는 지하 세계는 일종의 수용소이며, 이 가상의 수용소는 배제와 단절이 일어나는 모든 수용소의 풍경들을 지시한다. 이렇듯이 영화는 학살과 수용소에 대한 기억이라는 역사적 관점으로 독해될 수 있다.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하필이면 놀이공원인가? 거울 방이 있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라는 단순한 해답이 있을 수 있다. 거울 방과 거울 이미지를 가장 잘 활용한 작품은 오슨 웰스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이다. 이 영화에서 남편과 남편을 살해하려는 아내가 거울 방에 들어가고, 수많은 거울들은 두 인물의 거울 이미지를 끝없이 복제(시뮬라크르) 한다. 거울 이미지가 증식할수록 한 인간과 그의 거울 이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아진다. 동시에 수없이 분열하는 남편과 아내의 거울 이미지는 서로 겹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남편을 살해하려는 아내와 남편의 동일성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타자는 나의 시뮬라크르이며, 나는 타자의 시뮬라크르이다.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와 레드(루피타 니옹고) 또한 마찬가지다. 누가 애들레이드이고 누가 도플갱어인지를, 즉 원본과 시뮬라크르를 구별할 수 있는가? 애들레이드와 레드는 서로의 또 다른 거울 이미지는 아닌가?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는 시뮬라크르가 원본을 대체한 세계다. 게이브(윈스턴 듀크), 키티(엘리자베스 모스), 조시(팀 헤이덱커)는 모두 타인의 시선에, 즉 자신의 이미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게이브가 요트를 구매한 이유는 요트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요트가 주는 중산층의 이미지를 구입한 것이다. 다시 말해 게이브에게 이미지는 곧 자기 자신이며, 그렇기에 더 좋은 요트를 구매한 조시에게 참을 수 없는 열등감을 느낀다. 중산층의 이미지만 존재할 뿐 그 이미지를 떠난 중산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는 이미지가 전부인 이들에게 도플갱어는 단지 원본의 복사본이 아니다. 이들은 도플갱어에게서 익숙하지만 낯선 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도플갱어일지 모른다는 자각에서 오는 공포를 함께 느낀다. 즉, 원본은 없고 도플갱어(시뮬라크르)만 존재할 뿐이다. 복제물들로 이루어진 놀이공원은 바로 이런 현대사회를 축약해서 보여준다. 이렇게 이 영화는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현대사회가 시뮬라크르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이 만들어진 1966년에는 새로운 지적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어스>가 흥미로운 지점은 시뮬라크르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시뮬라크르에 저항할 단서까지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창조적 시뮬라크르, 바로 예술이며 세 번째 질문에 대한 탐구와 닿아 있는 지점이다. 레드의 끝없는 무용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거미 여인의 신화로 돌아가자. 대상을 상상함으로써 현존하게 만드는 거미 여인의 작업은 바로 예술 그 자체다. 그렇기에 거미 여인에 비유되는 레드는 일종의 예술가이며, 애들레이드가 꿈꾸었던 미래이자 자신이 포기한 과거의 욕망이다. 애들레이드는 무용을 통해 언어를 배운, 예술에서 재탄생한 존재다. 그렇기에 애들레이드가 무용을 시작하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두려워하는 장면에 대해서도 두개의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 해석은 자신이 저지른 어린 시절의 악행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놓은 무용에 대한 열망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할 때 어린 애들레이드의 무용 장면은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욕망의 변형이 된다. 이 점에서 애들레이드가 레드를 살해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살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심리적 관점 혹은 여성 서사적 관점

애들레이드의 욕망에 대한 억압은 그의 위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초반부 애들레이드는 한편으로는 권태로워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이 권태와 불안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들레이드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 혹은 아내라는 대상적 위치에 있는 애들레이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거울을 응시하게 된다. 그래서 애들레이드와 레드의 싸움은 내면의 투쟁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무엇이다. 다시 말해 이 싸움은 오직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한 여성의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심리적 관점 혹은 여성 서사적 관점으로 <어스>를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세개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통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학살하고 싶은 대상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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