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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희와 녹양>의 오프닝 시퀀스의 두명의 남자, 두개의 키워드

영화 속의 영화가 말하는 것

안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은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중학교 1학년 보희(안지호)의 성장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어느 날 돌아가신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보희가 동갑내기 단짝 녹양(김주아)과 함께 아빠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형상으로 얼핏 줄거리만 접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고 단정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그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단순한 로드무비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점은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두명의 남자(‘자살하는 남자’와 ‘모자 쓴 남자’)였다. 이들은 영화의 후반까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들의 존재를 감독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 두 남자의 뒷모습을 보여주는가?

녹양은 첫 번째 남자에게 물었다

영화는 물소리와 함께 강물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의 상반신(뒷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윽고 남자는 물속으로 잠수하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장면이 바뀌면 영화관에서 주인공 보희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보희가 녹양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온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전에 본 장면은 이들이 본 영화의 엔딩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영화관을 나갈 때 엔딩 타이틀이 보이고 영화관의 문이 닫히면 ‘보희와 녹양’이란 이 영화의 제목 타이틀이 뜬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물속으로 사라진 남자(자살하는 남자)의 장면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다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남자(자살하는 남자와 모자 쓴 남자)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물속으로 사라진 남자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이 남자를 ‘자살하는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가면서 녹양의 질문, “주인공 남자애가 죽잖아. 그리고 어떻게 됐어?”에 보희가 “그 장면이 끝”이라는 답변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살하는 남자’는 영화의 결말에서 ‘보희’로 밝혀진다. 하지만 우리는 자살하는 남자로 오인된 이 장면이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 오프닝 시퀀스에서 물속으로 사라진 남자가 보희였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보희가 남자가 죽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나중에 나올 영화의 한 장면만 가져와서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보여주면서 마치 그 남자가 죽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일까? 이는 보희가 아빠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되는 장면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보희를 보여주는 방식 때문이다. 감독은 아빠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보희의 반응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희는 골목에서 아빠가 다른 남자와 포옹하고 입맞추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다 돌아선다. 감독은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등장인물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뒤집으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온 성별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감독은 녹양의 성격과는 정반대로 보희에게 소심하고 섬세한 성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희의 소원은 녹양(당차고 씩씩한)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감독은 한강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보희의 모습을 원경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마치 감독이 보희를 멀리서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전혀 예기치 못한 장면인 보희가 한강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순간 우리는 당황한다. 아빠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안 보희가 그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희가 물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장면, 즉 오프닝 시퀀스의 장면과 동일한 장면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녹양이 찍은 핸드폰 속의 보희를 바라보는 장면을 배치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녹양이 보희를 촬영했던 장면이다. 이어서 보희의 주변 사람들(술집에 있는 성옥, 소파에서 잠자는 보희 엄마)이 차례로 등장한다. 여기서 감독은 왜 곧바로 보희가 수영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주변 인물을 보여준 것일까? 이는 보희가 아빠를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된다. 이 장면은 실제로 보희가 아빠를 만난 것이 아니라 보희의 상상 속에서 아빠를 만나는 장면이다. 감독은 현실과 상상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보희가 강물에 들어간 장면 다음에 아빠를 만나는 장면을 배치하는 대신에 보희의 주변 사람들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다음 감독은 다시 한강에서 수영하는 보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빠를 만난 장면이 보희의 상상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녹양은 두 번째 남자를 잘 안다

이제 감독이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준 두 번째 남자인 ‘모자 쓴 남자’를 살펴볼 차례다. 이 남자도 뒷모습만 보인다. 녹양은 이 남자를 잘 안다(‘같은 옷을 입고 극장에 매일 오는 오타쿠’)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거나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결국 이 남자는 영화감독이고 더 중요한 것은 보희의 아빠로 밝혀진다. 그런데 감독은 자살하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이 남자에 대해서도 영화의 결말 부분까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자살하는 남자’와 ‘모자 쓴 남자’가 부자 관계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감독은 의도적으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 배치한 두 남자(자살하는 남자와 모자 쓴 남자의 뒷모습)를 영화관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것이다. 감독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그들을 다시 소환한 이유는 영화의 후반 보희가 접힌 사진의 가려진 부분에서 아빠의 얼굴을 발견하기까지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 기록(이 사진은 사촌 누나가 찍었다)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보희는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녹양이 핸드폰으로 보희를 촬영하는 것도 보희를 기억하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나중에 보희는 아빠가 만든 영화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본다. 녹양은 영화의 결말에서 보희에게 자신이 찍은 영상을 생일축하 선물로 보낸다. 그리고 영화는 녹양이 찍은 핸드폰 속 보희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에서 끝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로 돌아가보자. 보희는 영화관에서 ‘자살하는 남자’(보희로 추정되는)의 뒷모습에 눈물을 흘린다. 그때 보희의 아빠도 그곳에 있었다. 만약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놓친 관객이라면 결말에서 이 절묘한 우연의 순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감독이 영화에서 ‘영화 속 영화’를 삽입한 것은 영화를 보는 행위와 영화를 촬영하는 행위의 자연스러운 반복과 동시에 현실(자살 시도)과 상상(아빠의 만남) 그리고 회상(보희의 어린 시절)을 자유자재로 배치함으로써 변화하는 ‘영화 매체’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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