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비평
김응수 감독의 <나르시스의 죽음>이 보여주는 위태로움을 읽어보다

표면의 이중인화

김응수의 영화적 여정이란 현재 시점에 잔존하는 무언가를 ‘통해서’ 사라지거나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역사적 기억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과거에 접근하고, 다른 사람의 말과 몸짓을 매개로 나의 역사적 시간을 비춰보는 과정을 우리는 지켜본다. 죽은 이들을 떠올리는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거대한 댐과 나무(<과거는 낯선 나라다>), 1920년대 충주에 저수지를 만든 일본인을 위해 세워진 기념비(<아버지 없는 삶>), 충주댐의 기념탑과 호수 위로 희미하게 펼쳐진 물안개의 질감(<물속의 도시>)으로부터 낯선 기억이 솟아오르고 우리의 망각이 환기되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한편으로는 유적과 석탑, 묘지나 기념비와 같은 건축적 구조물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수와 바다, 냇가와 강물 등의 액체적 공간이 출몰하며 긴장 관계를 이루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전자를 ‘돌’의 흔적으로, 후자를 ‘물’의 유동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흔적을 품은 돌의 숏과 그것들을 다시 지금의 환경 안에서 감각하게끔 이끄는 물의 숏이 하나의 여정을 이루는 질료로서 부딪힌다. 이런 순간들은 질 들뢰즈가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의 영화를 두고 말한 것처럼, “역사는 대지와 분리할 수 없고, 계급은 땅 밑에 있다. 만약 우리가 사건을 포착하기를 원한다면 그곳으로 함몰해서 그 내면적 역사를 이루는 지질학적 지층들을 따라가야만 한다”는 장소의 시학을 조망하고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돌’과 ‘물’의 장면들은 흔적을 간직한 풍경이면서 동시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풍경이다. 그 사이로 뻣뻣한 표정과 몸짓, 중얼거리는 말, 구토와 눈물이 몸 바깥으로 흘러나오며 부재의 시간을 우리 몸에 가깝게 불러들인다.

본다는 것은 다시 한번 철저히 실패하고

그러므로 김응수 영화에서 펼쳐지는 여정의 경로는 세계의 변형을 대면하는 다면체적인 경계의 표면으로 주어지는데, 이런 표면적 세계에서 민감하게 두드러지는 건 시간의 사이와 차이의 감각이다. 표면으로서의 세계가 일으키는 변형과 변모가 서로 다른 몇 가지 시간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소멸하지 않고 비가시적으로 지속되는 역사의 시간과 마모의 흔적을 간직한 채로 침묵하는 장소의 시간과 때로는 기념비(‘돌’)를 올려다보고, 때로는 호수(‘물’ )를 내려다보며 분산적이고 분열적인 시선의 운동을 추동하는 신체의 시간이 서로를 끌어안으면서 잠재적인 접속을 만들어낸다. 가령 한국에서의 삶과 일본에서의 기억, 한 인물의 얼굴과 인물이 사라지고 없는 장소의 풍경,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초상과 청각적 주체로서의 남성의 음성을 교차하면서 불규칙적인 긴장과 접속을 구축하는 <아버지 없는 삶>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김응수의 영화(들)에서 주조되는 비선형의 영화적 논리를 불가시의 몽타주라고 말하고 싶다.

<나르시스의 죽음>은 어떤가.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이유로 의문을 느꼈다. 첫 번째는 영화가 미투 운동을 다룬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미투를 대면한 남성 주체의 반응을 관측한다. 그것이 남성 영화감독이 다루기에 부적절한 제재라든지 또는 영화적 대상으로 구성하기는 아직 조심스러운 사태라는 식의, 올바르고 명쾌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는 의제를 들먹이려는 것은 아니다. 김응수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미투라는 주제와 관련해 그가 퇴적과 잔존의 시간을 품은 기억과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억을 동반한 영화적 여정의 대상으로 존립하기엔 당혹스러울 만큼 현재진행형의 사태라는 점에서 미투는 <나르시스의 죽음>을, 또는 김응수의 시공간적 감각을 진정으로 위태롭게 흔든다. “나는 미투를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도입부의 목소리는 헛된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감춰진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매개로서의 기억과 사물을 가지지 못한 외부자의 필연적인 결론이다. 변모하는 질료의 조건이 김응수의 영화 안에서 내적인 패러독스를 일으키는 것이다.

전작인 <산나리>의 제작 동기가 되는 남북정상회담, <나르시스의 죽음>의 전제로 작용하는 미투 운동은 소실과 흔적을 간직한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인식론적 전환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에의 요구는 4·16에 관한 두편의 영화인 <오, 사랑>과 <초현실>을 기점으로 김응수가 통상적인 상영과 개봉의 경로를 따르는 대신 다운로드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공개한다는 선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식이 급격한 전환을 맞닥뜨리는 순간을 영화적 픽션에 담아내면서 김응수는 그것을 극장의 어둠이 아닌 사적인 내부 공간에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단순히 관객을 대하는 현실적인 고려에서 나온 판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지만, 김응수 영화에서 그려지는 주제와 대상이 당대 현실과 긴밀한 접속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하는 변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관찰과 탐구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마련하는 대신 격렬한 전조에 몸을 내맡겼다. 그렇다면 주체와 매개된 기억과 장소를 잃은 카메라는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는가. <나르시스의 죽음>에는 여행의 궤적이 없다. ‘돌’로서의 건축적 구조물도, ‘물’로서의 액체적 공간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나르시스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즉각적으로 거울이자 창틀로서의 물의 성질과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는 걸 고려해보면 이 영화에 물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의도적인 판단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대상을 응시한다는 사태는 가능할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의 내부로 과도하게 침입하는 현재라는 사태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두 번째로, 오직 음성으로만 주어지는 이 영화의 주체(현실의 김응수이자 그의 그림자를 배면에 품고 영화 속에서 ‘K’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픽션적 존재로서의 영화감독)가 미투 운동을 대면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전면화하는 매체의 표식들에 의문을 던지고 싶다. <나르시스의 죽음>은 수평으로 움직이며 숲의 풍경을 관측하는 패닝숏과 함께 세편의 영화(<쉰들러 리스트> <이창> <소피의 선택>)에 관한 기억과 해석을 들려주는 K의 음성을 결합하는 구성을 취한다. <아버지 없는 삶> 이후로 만들어진 김응수의 영화들이 에세이 영화의 용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사적인 시네필리아의 경험을 재생한다거나 다른 영화들과의 교통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분명 이례적인 방식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 다른 영화들을 경유한 그의 해석이 미투 운동에 관한 특별한 관점을 제공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는 그가 느끼는 존재론적 불안이 영화 안에서 특권적인 위상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반대로 이 영화에서는 말하는 것의 능력과 보는 것의 무능력이 예민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진정 대담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김응수가 그 어떤 매개적 대상과도 결부하지 않고 현실과 픽션, 그리고 영상과 또 다른 매체간의 충돌적인 응시를 그려낸다는 점이다.

왜 응시인가? K가 불러내는 픽션의 장면들을 더듬어보자. 각각의 영화들이 가진 내러티브적인 논리와 무관하게 K가 구상하는 논리 안에서 주요하게 소환되는 순간들이거나 또는 영화 내부에서 잉여적으로 방치된 순간들이다. 그건 영화 전체와도 동떨어져 있는 시공간적 경험의 순간이며 이미지와의 단독적인 대화의 기억일 것이다. 따라서 K가 구성하는 픽션의 기억은 거꾸로 기억의 픽션으로 풍경 위에서 다시 정립된다. 흥미롭게도 세편의 영화에서 K는 주제론적 분류와는 별개로 일관되게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는 대목을 선별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때 벌어진 응시를 지금의 조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인가?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응시라는 사태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음성을 조합하는 것으로 명쾌히 재현되는 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돌출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움직임을 지속하는 패닝숏 위로 오버랩되는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들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숲의 풍경과 겹쳐지는 이미지 가운데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영상과 서정적인 회화의 이미지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상과 음성이 구성하는 흐름에 미묘한 불화를 발생시키면서 프레임 위에 존립하는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와 효과에 주목해보자. 사진과 영상의 이런 배치를 단순히 정지와 운동의 대비라고 말하는 건 충분치 않다. 수평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고정된 채로 프레임에 새겨진 이미지의 충돌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공존하는 독특한 이중운동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사진적 이미지가 더욱 주요한 영화적 질료로 각인되는 것은 영화가 김응수, 또는 영화감독 K 자신의 초상사진 여러 장을 풍경과 중첩시키는 대목에서다(사진과 영상의 모순적 관계 를 고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에 마주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곧 자신의 붕괴를 직면하는 남성 주체를 묘사한다는 측면에서, <나르시스의 죽음>은 크리스 마커의 기념비적인 사진-영화 <환송대>가 마련한 장소에 미묘하게 접근한다).며칠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반복해 바라보는 주체의 시간과 사적인 역사로 회귀하는 시간이 분열적인 시차를 활성화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혼종적으로 결합한 영상과 사진의 이중운동이 가리키는 바이다. 김응수, 또는 K는 미투 운동이 자신의 삶에 근본적으로 새겨진 존재론적 불안을 드러낸다고 밝히며, 나와 무관한 것으로 나의 존재가 무너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르시스의 죽음>은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나’를 지칭하는 응시의 역설적 사태에 부합하는 (지극히 보르헤스적인) 파국적 내러티브를 마련해둔다.

영화의 후반부, 페인트로 칠해진 군인 조각을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이미지로 번갈아 제시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드물게 ‘돌’의 형상을 비추는 순간이지만, 정작 그 형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원적 흔적도 비추지 않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과거와 기억의 몸을 빌리지 않고 세계와 영화, 영상과 사진, 평면과 깊이, 수직적 응시와 수평적 관측의 ‘연약한’ 경계면 위에서 픽션의 이중인화를 구현하고 있음을 폭로해버린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단순한 재현에도, 현실의 흔적들을 교직하는 픽션의 몽타주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나르시스의 죽음>에서 숏은 사진과 영화가 서로의 영역에 느슨하게 포개어지며 결코 정합적인 형태로 소화되지 않는 어긋난 시간성과 이질적인 운동을 만들어내는 장소다. 이것은 (불)투명한 간극이자 스크린이라는 연약한 껍질로서의 경계다.

우리의 신체를 표상할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의 응시는 지속될 수 있을까. 지속이 불가능하다면 자연스럽게 영화는 중단될 것이다. 반대로 지속된다면 영화는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을까. 눈이 없는 응시는 무엇으로 지탱될 것인가. <나르시스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미투 운동이 불러일으킨 인식적 변혁을 마주 보면서 반대편으로는 ‘나’, 또는 영화감독 K의 존재론적 소진을 주시한다. 이것은 세계의 흐름과 원리에 관한 심층적인 진실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표층적인 응시의 실패를 재구성하는 시도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의 실패를 가져오면서 그것을 현재의 (또 다른) 실패로 재구축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화적 주체로서의 김응수, 또는 K의 단일한 내면을 볼 수 없다. 그는 김응수와 K로, 카메라 뒤의 응시자와 풍경 외부의 대상으로, 사적인 역사와 결합한 비가시적인 육체와 현전하는 음성으로 찢겨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표상, 응시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표면으로서의 숏뿐이다. 수평 움직임으로 지속되는 풍경의 표면 위에서 사진과 영상의 온갖 시제들이 진동하는 것은 그곳이 유일한 픽션적 장소로 카메라의 눈앞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기억으로서의 김응수의 실패가, 음성으로서의 K의 실패와 공명한다. 본다는 것은 다시 한번 철저히 실패한다.

신체 없는 숏의 겉면에 새겨진 것들

실패의 실패를 반복하면서 김응수, 또는 K는 윤리적 언술의 상투성(그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허접함”)을 역설한다. 사진가는 촬영하고,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한다. 단지 그뿐이다. 그의 진단은 60년대 장 뤽 고다르가 제기한 동어반복의 용법을 떠올리게 한다. ‘밀고자는 밀고를 하고, 연인들은 사랑한다’(<네 멋대로 해라>), ‘여자는 여자다’(<여자는 여자다>), ‘자신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라’(<비브르 사 비>의 도입부에 인용되는 몽테뉴의 문장). 그러나 이 단정의 용법은 하나의 층위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는 수정과 재정의의 과정에 놓여 있다. 이는 <나르시스의 죽음>의 도입부에 나오는 내레이션이 일찌감치 예고하는 사태이기도 하다. 세계의 표면은 그것을 마주하는 K의 웅얼거림, 다름 아닌 ‘겨울이다’ 또는 ‘봄이다’ 또는 ‘겨울과 봄 사이의 언젠가’라는 용법으로 정의되고, 그 구분의 틈새에 머무는 ‘더 정확히 말하면’이라는 수정의 용법으로 매 순간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런 점에서 <나르시스의 죽음>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간극의 틀을 드러내고 지워버리며 다시 구축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저항적 픽션이 된다.

제라르 바이크만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이미지에 관한 논의에서 “오늘날 인간의 신체적 이미지에서 가스실에서 벌어진 참혹한 공격의 잔상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한다(공교롭게도 <나르시스의 죽음>에서 거론되는 세편의 영화 중 두편이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차용한다). 김응수는 어떠한 신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시각적 형식을 구성하면서 그 ‘참혹한 공격의 잔상’을 신체 없는 숏의 겉면에 새겨둔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한 김지은씨의 목소리가 이미지없이 풍경 위로 울려퍼지고, 환호하는 나치 병사들의 이미지가 소리 없이 제시되는 공격의 잔상을 말이다. 이것은 정당한 결합이 아니라 가능한 결합으로 픽션 주변부를 맴돌고 있다.

‘나’의 역사를 표상하는 정지된 사진과 ‘나’의 시선에 공백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풍경의 영상을 기묘하게 공존시키는 픽션의 방법론으로 김응수는 그 어느 때보다 아슬아슬한 영화적 여정을 구조화하고 있다. 이는 프레임이라는 틀에 한정되어 있지만 아무런 물질적 지지체도 없는 듯 떠도는 이미지의 여정에 가깝다. <나르시스의 죽음>의 시공간은 앎으로의 진전과 과거로의 회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끝내 그 이중적인 운동이 하나의 얇은 표면에서 마주치는 모순적 모형의 세계다. 내부란 없으며 외부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K의 부조리한 단언이 결론처럼 발화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사진적 이미지 앞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행위와 표면에 달라붙어 접촉하는 행위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로서의 세계를 숏의 표면에 물질화하는 것, 응시의 실패가 반복되는 자리에서 <나르시스의 죽음>이 모색한 (가능한) 영화의 윤곽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