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비평
<그녀들을 도와줘>, 앤드루 부잘스키의 무질서한 운동

비명이 멈추는 자리

리사(레지나 홀)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앤드루 부잘스키의 <그녀들을 도와줘>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리사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화면 안팎의 물질성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걸음을 옮기며 바깥의 변화를 예민하게 수용하는 리사의 신체적 반응을 빌려 프레임 내부로 침입해 들어온다. 영화의 도입부는 이런 성질을 선제적으로 제시한다. 리사는 혼자 눈물을 닦고 있는데, 그 행위는 제대로 완수되지 못한 채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메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는 징후적인 신호였다. 금고를 노린 침입자의 소리가 들려오고, 신입 직원들과 온갖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영화는 ‘더블 웨머’라는 이름의 작은 스포츠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지탱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얼마나 다종적인 질료들이 관계를 이루고 모순을 만들어내는지를 폭로하며 그것이 부서지는 과정을 해부학적으로 관측한다.

<그녀들을 도와줘>의 모럴은 영화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로 단일한 논리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는 이상할 정도로 시간 흐름이 감지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는 의도적으로 맑게 갠 백주의 풍경만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저녁과 밤의 광경은 어느 장면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둠이 찾아오면 카메라는 오직 실내 전경을 비출 뿐이다. 기묘하게 밝음을 유지하는 무시간적인 세계에서(여기서 부잘스키의 전작 <컴퓨터 체스>(2013)의 엔딩에서 태양을 비추는 화면을 검은 얼룩으로 뭉개버린 광학적 시도가 이런 기이한 밝음에 대한 저항임을 파악할 수 있다) 리사는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의 영상, 직원과 고객 또는 가족과 동료의 관계, 경찰의 협조와 범죄의 행태 사이를 가로지른다. 형태를 이루는 요소를 하나씩 떼어내거나 추가하면서 또 다른 형태로 이탈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잘스키는 제한된 시공간 안에 공존 불가능한 배치의 방법들을 산출해내는 것으로 픽션을 작동시키고 있다.

부잘스키는 '더블 웨미'를 세계 안의 또 다른 세계로 형성한다. 이곳은 구성원들의 내재적인 규칙이 기계의 무심한 운동처럼 가혹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공간이면서 불법적인 공모가 이루어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텔레비전 모니터로 가득한 이 공간의 전경은 “영화가 세계의 도시라면, 텔레비전은 폐쇄된 마을을 구성한다”고 지적한 세르주 다네의 견해를 환기시킨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세계. 단지 공통의 영역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이 전부인 무대. 이곳은 영화의 역량이 부재한 채로 텔레비전의 기능으로만 작동하는 세계다. 대신 부잘스키는 영화 없는 세계의 주변부에서 작동하는 영화의 기능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더듬어본다. 카메라는 식당 내부와 외부를 쉼 없이 가로지르는 리사의 동선을 집요하게 좇으며 매 순간 다른 문제들이 프레임 안으로 침투하고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세계의 외양을 담아낸다. 내러티브의 리듬은 조금씩 변수를 맞이하면서 픽션에 다공적인 구멍을 구축하는 것이다. 질서가 카오스로 이행하는 과정, 경계의 붕괴를 발견하면서 <그녀들을 도와줘>는 영화라는 무질서의 운동을 지속시킨다.

루이스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1962)에서 부르주아 집단은 비가시적인 원리로 인해 바깥으로의 움직임을 차단당하지만, <그녀들을 도와줘>의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식당에 들어오고 나간다. 문제는 현대의 노동계급에 주어진 그 자유의 환영이다. 스포츠바에서 동등한 노동자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녀들은 집단으로 호명될 수 없다.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이들의 ‘자매애’를 흔드는 여러 층위의 계급적 긴장이 침입해 오는 건 그래서다. 리사는 바의 사장 커비(제임스 르그로스)와 동행하면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을 비롯한 각종 폭력과 격차를 체감한다. 결정적인 배반은 모든 공모의 목적이었던 샤이나(제나 크레이머)가 새삼스럽게도 폭력적인 남자친구와의 동행을 선택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이 순간에 리사는 ‘더블 웨미’의 불공정한 구조가 그들을 집단으로 구성하는 유일한 구조라는 아이러니와 대면한다.

리사는 ‘더블 웨머’의 제도 안에 머무는 것을 중단하고 비참과 불확실의 외부로 이동한다. 이 선택을 낭만적인 탈출로 이해할 순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녀는 다시 생계를 위한 면접에 뛰어들고 있다(마찬가지로 이 선택을 순응의 증거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중단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다른 곳, 바깥으로의 이행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멈추지 않는 걸음, 이탈의 움직임. 픽션에 구멍을 만들어내는 건 이런 지향성이다. 절망한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움직임을 멈춘 리사의 상반신이 근사한 자세로 면접장의 테이블에 되돌아오는 것은 영화의 일탈적 궤적이 만들어낸 도약이다.

그러니 연대가 성립되지 않음이 폭로된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그들은 연대의 방법론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리사를 대신해 바의 매니저 역할을 맡은 대니얼(샤이나 맥헤일)에게도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성희롱을 일삼는 남성 고객들의 말과 시선, 지저분하게 음식을 먹는 입과 맥주를 쏟고 지나치는 손짓이 그녀의 공감각적 영역 안으로 진입한다. 이렇게 보면 <그녀들을 도와줘>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연대가 실패에 이르는 까닭은 리사가 보고 듣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정확히 인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니얼은 처음으로 이 공간을 구성하는 너저분한 몸짓들을 시점숏으로 포착하면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리사가 겪은 감각에 근접한다. 이 불가능한 접속을 지나치고 난 뒤에야 바의 노동자들은 질서를 깨트리는 몸짓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테이블 위로 올라선다.

면접장에서 놀랍게도 재회한 리사, 메이시, 대니얼은 건물 옥상으로 향한다. 백색으로 칠해진 옥상은 구체적인 시각적 정보나 지표가 완벽히 사라진 기이한 이미지의 공간이다. 어둠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거의 추상적인 사막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한낮의 밝음에 그들은 무엇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그들이 지르는 비명은 하층계급의 손상된 목소리와 몸짓을 가시화하지만 그 퍼포먼스는 가혹하게 생략되고 만다. 세 인물이 한데 모였지만, 그들이 향한 곳은 결국 비좁은 섬에 다름아니다. 이곳에서 리사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던 리사, 그리고 카메라는 픽션에 균열을 일으키지 못하는 시선의 무기력에 마침내 도달한다.

<그녀들을 도와줘>가 모든 것이 변모하고 변주되는 영화적 여정이라면, 이 마지막에선 세계를 향한 어떤 변형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비명과 외침은 가능하지만 지속을 상상할 수는 없다. 고속도로 반대편에서 우리가 다시 가족이 될순 없겠냐는 메이시의 제안에 리사가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까닭도 이와 같다. 변화를 일으키는 건 이미지가 아니라 크레딧이 모두 지나고 난 뒤에야 들려오는, 누군가를 깨우는 듯한 남성의 목소리이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자는 누구인가? 세 여성이 재회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어쩐지 지나치게 매끄러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흑인의 몽상이자, 여성 노동자들의 백일몽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불가능한 시공간의 감각을 재생한다.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는데도, 이곳은 어느 공간보다 폐쇄적이고 고요하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