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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영화 <경계선>에 대해 말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질문이 자꾸 마음을 눌렀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질문을 뒤집어본다. <경계선>을 아름답지 않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해야 한단 점이다. 몇몇 화면들이 꾸준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토록 불쾌한 모습에서도 관객은 조금씩 감동적인 정서를 느끼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자면 물속에서 상대를 끌어안고 포효하는 두 남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장면은 사랑하는 연인을 그렸다기보다는 흡사 포효하는 동물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사실 <경계선>은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패러독스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티나(에바 멜란데르)의 얼굴이, 그리고 보레(에로 밀로노프)의 표정이 기존 영화에서 보지 못한 ‘추(醜)의 미학’을 직접 드러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계선>의 원작은 욘 아이비데 린드크 비스트의 단편소설이다. 감독은 각색 과정에서 ‘형사’와 ‘아이들’이 중심인 2차 플롯을 추가했다고 한다. 그외 이야기들은 원작과 거의 같다. 그의 소설을 각색한 또 다른 영화 <렛미인>(2008)이 신화 속 ‘뱀파이어’를 일상적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면, 이번 영화 <경계선>은 ‘트롤’을 스크린에 재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렛미인>처럼 <경계선>도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괴물의 모습을 그린다. 일상적 형태의 틀 안에서 영화 속의 괴물들은 숨죽이고 있지만, 아주 가끔 자신의 신화적 존재의 본질을 드러낼 때가 있다. 바로 이 순간, 그 괴물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의 발현이 경이롭다. 매우 미묘하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드나들기 때문이다. <경계선> 속 트롤 역시 영화에 표현되는 일상적 변화의 폭은 매우 비좁다. 어쩌면 대사 속 ‘트롤 종족’이란 말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이 지면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어떤 영화와 이 작품을 비교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작고 세밀하게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게 만든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

처음에는 알리 아바시 감독이 고정된 미(美)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보려주려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반증들이 보였다. 피에르 소르랭이 지적하듯 파솔리니의 영화는 “파솔리니 자신이 대중에게 제공하는 추한 세계에 유혹되었기” 때문에 나온 결론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르다. 비견컨대 파솔리니가 추함 자체에 대한 숭배를 지닌 연출자라면, <경계선>이 드러내는 표면적 혐오스러움은 ‘숭고함’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중반부 이후의 전개가 이런 점을 더 강조한다. 어떤 관객은 이 부분에서 ‘장르가 바뀐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일부의 평가에서 이즈음 작품에 대한 호감도가 낮아지기도 한다. 그만큼 톤이 다르다. 하지만 영화 전체의 질감이 어두운 멜로드라마인지 드라마틱한 스릴러인지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진짜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관객이 감각하고 사고하는 지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에서 ‘모럴’이라 부르는 도덕적 판단에 대한 문제가 이 부분에서 대두된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규칙 중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을 재현하는 일’에 대해 적법하다고 결론내렸다. 이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작가의 역할은 악을 묘사하는 데 핵심이 있으며, 작품을 통해 대중이 악을 대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 ‘모럴’의 문제가 대두된다. 자연도 아니고 신도 아닌, 인간 내면에 대한 고뇌가 작품에 새겨지는 것이다. 현대 영화의 메타 영화적인 본질과 <경계선>이 완성하는 이러한 성찰의 과정은 흡사하다. 둘 다 일종의 반성적인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시학>의 구절이 떠올랐던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내게 <경계선>은 티나가 코를 찡긋거리며 국경에 서서 냄새를 맡을 때까지는 그저 기이한 감상을 주는 영화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 주제의 방향성은 달라졌다.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이 과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지에 대해 스크린은 내게 묻고 있었다. 그렇게 파솔리니를 떠올렸던 영화는 미하엘 하네케의 건조한 멜로물을 향해 나아갔다.

<아무르> 같은 <경계선>의 추함

하네케의 <아무르>(2012)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지만 ‘죽음’을 그린다. 이 영화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아닌 노년기 부부의 사랑을 말하며, <미녀와 야수>의 남녀가 반전된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경계선>의 ‘추함’은 흡사 <아무르> 같다. 무언가 기존의 개념들을 뒤집어놓는다. 언뜻 주인공들 얼굴이 못나 보이지만 실상 더 추한 건 일상적 배경이다. 평범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풍경이 숲속 현실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이 고집을 내려놓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모럴에 대한 주제가 확고해지고, ‘보레’ 캐릭터 역시 중요해진다. 실상 주인공 티나는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보레를 추격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그녀는 같은 종족으로서의 어떤 ‘시선’만을 관객을 위해 제공한다. 보레의 악행에 대한 명징한 묘사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완성된다. 즉, 보레의 악행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나침반 격으로 이용되는 인물이다. 그가 인간 아이들을 더 악랄한 인간들에게 팔아넘기는 까닭은 인간 본성의 추함 때문이고, 말하자면 모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지닌 ‘자연주의적 시선’은 표면의 판타지보다 더 중요하다. 사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관점은 영화에서 모순을 드러내며 파괴된다. 차라리 영화는 “인간이란 원래 고독하고 비사회적이며, 다른 존재들과 관계 맺을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고 설명하는 자연주의자들과 연계하길 택한다. 흡사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만큼 아바시의 이번 작품은 초현실적 경계를 지향한다. 넘을 수 없는 것을 과감히 뛰어넘고, 판타지 장르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런 관점에서 <경계선>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해답은 직접 말하기 어렵다. 본질적인 ‘미추’에 대한 질문은 애초 관점을 바꾸어서 대답해야 할 영역이다.

조화로운 놀라움

아름답지 않아서 불안했던 피사체의 표면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감동이 된다. 괴물이 아닌, 숭고한 원시 자연을 구성하는 태초의 인간들이 영화의 시간을 장악한다. 그리고 후반부 스릴러가 인간적 운명의 비장함을 강조한다. 마침내 결말 부분, 티나가 트롤 2세를 안게 되면서 드러내는 불안과 환희의 교차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작품이 묻는 질문의 본질을 담는다. 더이상 영화에 흉한 표피는 없다. 트롤 아기가 보여주는 ‘모성 본능’의 문제는 오로지 끝까지 영화를 관찰한 관객만 느낄 수 있는 반성적 영역에 속한다.

언젠가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보았던 꼬마 괴물의 정체성과 이 영화의 감상은 크게 다르다. 말하자면 <경계선>은 기존 어떤 영화들도 추구하지 않았던 SF의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 아시아나 서유럽에서 볼 수 없었던 자연주의적 순수 판타지가 이곳에 담긴다. 이처럼 조화로운 놀라움이 우연히 탄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묘하게 관객의 마음을 빼앗는 이 영화의 과감함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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